제목 : 그리스도인과 교회 II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10-12절
설교자 : 조정의
벧전 3:10-12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0-12절에서 베드로는 앞에서 말한 것을 확증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였으며 신약성경의 저자였습니다. 그런 큰 권위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어떤 권면을 할 때 구약성경을 증거로 든다는 것은 참 놀랍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도 성경으로 확증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 시편 34편 12-16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말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공감하는 것, 사랑과 동정, 겸손한 삶에 대해서 말했고, 교회 밖에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그러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건과 명령,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10).
여러분 중에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복 받길 원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시편에서는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34: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복된 삶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일까요? 오래 사는데 자식들은 속을 썩이고 몸은 아픕니다. 돈이 많은 것은 행복일까요? 저는 아내와 로또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라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자 하다가 누구는 돈을 주고 누구는 주지 말자는 말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그만 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건강과 돈, 명예 등이 우리의 행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는 것은 사는데 필요한 것일뿐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3).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권력, 부, 무병장수는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삶과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삶과 의미 있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장을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인데 그것으로 글씨를 쓴다면 어떨까요. 뭔가를 세게 긁거나 또는 흙에 쓴다면 글씨를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망치가 만들어진 목적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그루뎀은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외적인 환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허락한 인생을 즐기는 것과 그 일생을 만족해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인간적으로 볼 때 좋은 날을 경험한 사람은 아닙니다. 매맞고 헐벗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당한 그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30년을 광야에 있다가 몇 년의 사역 기간 이후에 참수형을 당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삶이 가치 있고 복된 삶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가 만들어진 목적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좋은 삶과 복된 삶이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굴복하지도, 할 수도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삶에 대해 한 주석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삶은 멸망을 향해 곤두박질 치며 외치는 비명’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불못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이 땅에서는 영생의 맛을 보는 삶이고 이후에는 영생을 누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야 합니다. ‘내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처럼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는 소원이 있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말할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와 같은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명령에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 34편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고대의 레시피’라고 합니다. 그 레시피에는 다섯 가지 재료가 들어가 있습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10-11).
다섯 개의 명령어가 있는데, 저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악을 떠나라’와, ‘선을 행하라’, 그리고 ‘화평을 구하라’입니다.
악에서 떠나라
모든 악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더러운 것이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서 죄가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그 죄는 입술을 통해서 말로 표출되기도 하고, 행동을 통해 행위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분노라는 마음의 죄가 입을 통해 폭언이 되고, 행동을 통해 폭행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입술과 행위, 두 가지를 다 금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비난, 중상모략(이간질), 기만, 남의 평판을 깎아내림, 비방, 모욕, 조롱, 비꼬는 말 등 혀로 저지를 수 있는 죄는 매우 많습니다. 잠깐 혀를 조금 움직이는 것으로 많은 죄를 쏟아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금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데 잠그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다윗이 시편 141:3에서 말한 것처럼 내 입에 파수꾼을 두어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표출되는 악에 대해서도 그것을 떠나라고 명합니다. 폭력, 성적인 죄, 도적질, 간음, 살인 등의 행위로 저지르는 죄들도 떠나라고 말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박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 어찌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이 편지를 받았던 소아시아의 성도들은 믿지 않는 주인과 사회를 통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입술로 죄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욕할 수 있었습니다. 때론 행동으로 되갚아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들 중 하나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복수로 당장은 해결되는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악을 더욱 늘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말과 행동에 대해 ‘그럴 만 했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떤 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라
여기서 말하는 ‘선’은 그저 착한 일,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는 것이었고 사환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이었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연합, 공감, 사랑, 동정, 겸손히 행하는 것이었고 외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원하시는지, 무엇이 선한 삶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입술로 행위로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죄에서 멀리 떠나는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앞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성경에 기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면 됩니다. 말씀에 그것에 대해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는 성경을 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연합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 프로그램과 리더십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이 단순한 두 가지 명령, 선을 행하고 악을 떠나라는 명령에 있습니다. 교회가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사모하며 그 말씀에서 얻은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화평을 구하라
이 명령에는 ‘구하라’와 ‘따르라’는 두 개의 명령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소원하는 것, 바라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끝까지 추격해서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평을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백성들이 아니니 지옥의 불쏘시개와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 둘 사이의 벽은 이처럼 두껍고 단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벽이 허물어지고 그들은 형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평화가 가능합니까? 그리스도 안의 평안이 그들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에 감사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세운 불합리한 제도에 순종하고, 고집스러운 주인에게 순종하며 남편과 아내가 화평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연합하고 겸손할 수 있는 이유,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한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 명령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사회, 어느 기관, 어느 지역에 있든지 화평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악을 떠날 것과 선을 행할 것, 화평을 구할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 가지를 명령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12)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상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을 들어서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인용한 구약성경 시편 34편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34:4)…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21)”. 하나님이 보지 못하는 곳과 듣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욱 의인에게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한, 악에서 떠난 삶, 순종하는 삶, 화평을 구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 도다”(34:16). 하나님의 얼굴이 악인을 향해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선생님이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그렇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편 34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이유없이 자신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울왕을 피해 도망다닙니다. 다윗은 기회가 찾아와도 사울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는 악에서 멀어지고자 했고 선을 베풀려 했습니다. 사울을 피하다 블레셋에 들어가 아비멜렉 앞에 서게 됩니다. 원수의 소굴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때 다윗은 그 앞에서 미친 척을 하고 그를 본 아비멜렉은 다윗을 돌려보냅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돌보셨고 위험으로부터 건지셨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8)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고 이 땅에서도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집에서 아픈 아내를 돌보고 있습니다. 아내를 돕는 일이 항상 기쁨이었으면 좋겠는데 때로는 그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내 죄책감이 듭니다. 그런데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제 마음 속에 아내의 말이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아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에게 아내가 얼마나 값진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해야 하는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것도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을 주시기에 앞서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시기 앞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잊지 마라’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추구하는 이유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더욱 맛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큰 힘을 얻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그래서 참 소중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꼭 한 번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말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을 잊지 마십시오.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주님의 칭찬을 우리 모두가 들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