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인과 고난 Part I
본문 :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설교자 : 조정의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오늘 말씀의 부제는 ‘고난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6가지 명령’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6가지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난을 기대하라(“이상히 여기지 말라”(12)), 고난을 기뻐하라(“즐거워하라”(13-14)), 고난을 기피하라(“고난을 받지 말라”(15)), 고난을 당당히 여기라(“부끄러워하지 말라”(16)), 고난을 기회로 삼으라(“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 고난 중 주님만 바라라(“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7-19))입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명령들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명령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명령들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앞서 당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앞부분에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지역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환란이 함께 한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 14장을 보면 바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9장을 보면 에베소 지역에서 복음을 박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받은 고난과 현재 우리의 고난이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의 고난을 그들의 고난과 비슷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들의 고난은 정말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했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경험해야 했으며 육체적인 핍박이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광기어린 핍박이 있었고 그러한 고난으로 순교 당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한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복음으로 인해 박해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곳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도 차별금지법 등의 법률이 통과될 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는 고난에는 질병으로 인한 것,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 직장 내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할 때 경험하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과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한다면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아내의 질병이라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모든 성도님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겪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명령: 고난을 기대하라(12절)
말씀은 “사랑하는 자들아”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말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자 접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이론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편지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사랑하는 자들, 그가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아끼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손을 붙잡아 주면서 따뜻하게 전해주는 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이 본문 말씀이 무엇인지 그저 알려주기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참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당한 시험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시험”에서 “불”이라는 말은 무섭고 파괴력이 강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가볍고 견디기 쉬운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뒤흔들만한 시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시험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에 대해 ‘그것은 별 것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불과 같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시험입니다. 시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목적입니다. 불의 목적은 태워버리는 것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는 불의 모습은 금을 제련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불로 달구면 광석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순수한 불만 남아있습니다. 불이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임한 불시험이 그들을 연단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온전한 모습, 부족함이 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의 시련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최근에 시험을 겪으면서 이 시험이 우리 부부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험은 인내심을 키워줍니다. 우리로 성숙한 거룩으로 이끌어주고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켜 줍니다. 그동안 의지하고 있었던 것들이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남아 그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영적인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그동안 어려움이 없을 때는 잘 몰랐던 나의 참 모습,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 외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들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시험은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는”의 더 정확한 해석은 “일어나는”입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영어로 ‘happen’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해프닝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그냥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처럼 느껴집니다.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험이 일어난다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모든 우리에게 허락된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통제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신실하게 돕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에 주어진 시험과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는 방향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나고, 때로는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일어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 자연재해 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하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신실하게 우리의 환경을 만들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토기장이가 섬세한 손으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명령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계속 이상하게 여기고 의문을 갖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놀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질병이 생겼을 때 태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의문을 갖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지?’라는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인하여 당하는 시험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예견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듯이 우리 역시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고난을 기대하십시오. 당연히 고난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2천 년 전에 예루살렘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법정에서 그의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천지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었습니다. 그분이 피조물에 의해 고난을 당하신 것, 그것만큼 이상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그 일 조차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구원하시며, 예수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주사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고난과 환란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명령: 고난을 기뻐하라(13-14절)
13절은 “오히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고난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고 ‘대신’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아래 주어졌다, 모든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신다, 모든 시험을 하나님은 반드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모든 시험의 결과는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이다, 시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셨고 자기 권리를 내려놓으시고 섬기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여러분의 시험 중에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 주님 가신 길 가는 것, 험한 그 길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갈길이죠’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시험과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감당하십시오. 그럴 때 참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여러분이 경건하게 살고 있다면 박해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너희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1장 6-7절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광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실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다면,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버린 돌처럼 여겼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로 여기셨습니다. 그 돌이 ‘거치는 돌’, ‘부딪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즉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했고 그분께 나아갔고 모퉁이 돌이신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지고 다시 그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이 됩니다. 현재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주님의 영광이 임했을 때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지금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이어받을 자라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답게 살아감으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자는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경건치 않은 자와 죄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심판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의 집, 의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영원한 영광을 위해 고통도 함께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이 임했을 때 이 모든 사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고난이 나를 둘러 쌀 때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께 주무신다고 하거나 왜 나를 돌아보지 않느냐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존 스토트의 책에는 한 연극이 소개됩니다. ‘기나긴 침묵’(The Long Silence)이라는 제목의 연극입니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수십 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거대한 평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앞에 비취는 눈부신 빛으로부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맨 앞부분 가까이에 있는 몇몇 집단은 격하게 이야기했다. 수치에 움츠러든 것이 아니라 호전적인 태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어? 그가 고난에 대해 어떻게 안단 말이야?” 피부가 거무스름한 건방진 젊은 여자가 눈에 불을 켰다. 그녀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문신으로 새겨진 번호를 보여주기 위해 옷 소매를 잡아 뜯었다. “우리는 공포, 구타, 고문, 죽음을 참고 견뎠어!”
다른 집단에서는 한 흑인 소년이 옷깃을 내렸다. “이건 어때요?” 그는 흉한 실 모양의 화상 자국을 보이면서 물었다. “린치를 당했어요. 아무 죄도 없이 다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말이에요.”
다른 무리에서는 우울한 눈빛의 임신한 여학생이 있었다.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해요. 그넌 내 잘못이 아니예요” 그녀는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집단들은 각각 그들의 지도자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 한 명, 흑인 한 명,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 지독하게 불구가 된 관절염 환자, 탈리도마이드로 인한 기형아 등이었다. 평원 한 가운데서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그들의 제안을 제시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다소 재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기 전에 그분은 그들이 견뎠던 것을 견디셔야 했다. 그들의 결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의 출생의 합법성이 의심을 받게 하자. 그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을 주어서 그가 그 일을 하려 할 때 가족들조차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하자.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도록 하자. 잘못된 비난을 받고, 편견에 찬 배심원들에게 재판을 받고, 비겁한 재판관에게 선고를 받게 하자. 그가 고난을 당하게 하자”
“마지막에 혼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무섭게 맛보도록 하자. 그 다음에 그를 죽게 하자.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도저히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하자. 그것을 입증해 줄 많은 무리의 목격자들이 있게 하자.”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판결을 발표하는 것을 마쳤을 때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갑자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미 그 형벌을 다 당하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고통은 모르실 거야’, ‘높은 곳에 계시는데 내가 당하는 고통을 아실까’라는 생각이 오늘 본문 말씀을 잊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견디기 힘든 여러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고난을 말씀의 진리로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신실하게 통제하셔서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것으로 온전히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