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의 몸, 지체의 각 부분 1/2
본문: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
설교자: 조정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할 때, 강조하는 것은 하나 됨과 다양성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절). ‘교회도 그러하니라’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교회 대신 “그리스도”가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만큼 친밀하게 연합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주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으셨다(행 9:4). 교회의 하나 됨을 통하여 세상은 그리스도를 본다(요 17:21). 하지만, 교회는 하나 되기 힘든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민족의 다양성과(유대인, 헬라인), 신분의 다양성을(종, 자유인) 극복해야 했다. 어떻게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실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하나 된 교회를 통하여 이루실까? 교회는 반드시 이 비밀을 알고 적용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드러나신다.
1.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다(12-13절)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몸을 구성하는 부분(members)은 다양하다. 마찬가지로 한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다양하다. 민족, 혈통, 나라, 신분, 학력, 재능, 나이, 성별, 성향 등 한 사람도 완전히 같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르다.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이 함께 모였는데,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는 여간해서 무너뜨리기 힘든 담이 세워져 있었고(엡 2:14), 종과 자유인은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하여 친밀해지기 어려운 관계였다(골 3:11). 그들이 하나 된 것은 상호 간의 배려나 연합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결과였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다(엡 4:3):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13절).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또한 우리 각 지체가 몸의 각 부분을 맡아 제 기능을 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분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와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 모두 수동태, 즉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이루어낸 일이 아니라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주권적인 사역을 가리킨다. 성령 세례는 거듭날 때 신자 안에 일어나는 초자연적 역사로,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셔서 더러운 마음을 제거하고 거룩한 새 마음을 가진 자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증언했다(요 1:33).
한편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외치시면서 그분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을 약속하셨다. 성경은 그 생수의 강이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했다(요 7:37-39).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서 신령한 일을 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부족함 없이 공급하신다. 당신이 거듭났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성령은 당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 교회는 각각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길 때 하나 된다.
2. 열등감은 하나 됨을 망친다(14-20절)
우리가 성령께 받은 은사로 각각 제 역할을 하여 한 몸을 이루려 할 때, 두 가지 큰 유혹에 빠질 수 있다: 1) 열등감, 2) 우월감. 이 두 가지 문제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데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여러 지체는 각각 자기 역할이 있다.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코는 맡고, 입은 말하고 먹는다. 불필요한 지체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지체도 없다. 각각 자기 역할을 다 하여 몸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유기적으로 협력한다. 그런데 만일 지체 중 하나가 다른 지체와 비교하며 열등감을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 바울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발은 손에 비하여 쓸모없게 여겨졌고, 귀는 눈에 비하여 천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이 몸에 붙어있을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기능을 다른 지체가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중요하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17절). 귀는 눈에게 열등감을 가졌지만, 바울은 답한다: ‘눈만 있으면 어떻게 해. 귀, 네가 있어야 들을 수 있어.’ ‘또 귀 너만 있으면 어떻게 하니, 너는 냄새 맡을 수 없잖아.’ 한마디로 각각의 지체가 자기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이 모두 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역할을 다른 지체가 대신 할 수 없어서다.
교회의 각 지체는 자기 역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 역할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8절).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거룩한 지체로 삼으시고 또 그 역할을 하도록 필요한 능력을 성령으로 공급하신다. 당신이 열등감을 느낀다면 당신에게 그 역할을 맡기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당신이 자기 역할이 뭔지 더 잘 알고 있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 악한 마음이 교회를 나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교회는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는 원리로 세워진다: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19-20절). 몸을 이루는 데 한 지체가 아니라 모든 지체가 필요하다. 그 모든 지체가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다. 400개 조각으로 구성된 퍼즐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몇 개의 조각이 반드시 필요한가? 한 조각의 퍼즐이 가장자리에 있든, 중앙에 있든, 그림 속 주인공의 일부를 담고 있든, 큰 의미 없어 보이는 배경을 담고 있든, 그 한 조각의 퍼즐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의 각 지체도 그렇다.
육신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일, 겉으로 드러나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 하지만 교회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인정하시는 일이다. 교회 모든 역할은 그날에 주님 앞에 드러나고 영광스러운 칭찬을 받을 역할이다. 그거로 충분하지 않은가? “내 하나님의 성전(교회)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시편 기자처럼 기뻐하며 맡은 일을 하자(시 84:10).
3. 우월감도 하나 됨을 망친다(21-27절)
열등감과 결은 다르지만 똑같이 교만에서 비롯된 잘못된 태도는 우월감이다. 바울은 다시 한번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21절). 눈과 머리는 다스리고 가르치는 은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고, 손과 발은 봉사하고 돕는 은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든 다른 지체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핵심이다. 열정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섬김이 특출난 성도가 있으니 하는 말인가? 아니다. 대단해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는 성도에게도 절대로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 모두가 요긴하고 귀중하기 때문이다.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우리 몸의 지체 중 실제로 약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한 경우가 있다. 눈이나 손, 발 없이 사는 사람은 있어도, 심장이나 위장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지체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비교한다(얼굴, 팔다리). 간이나 십이지장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그만큼 관심을 덜 갖고 덜 귀히 여기는 셈이다. 아름답다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지체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는 지체는 귀히 여김을 덜 받는 그 지체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도 그렇게 보신다. 교회 중에 부족해 보이는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신다.
24…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고르게 하신다. ‘고르게 하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동사다. “특별한 목적, 상호 후원과 의존을 이끌어내기 위해 서로 다른 부분을 함께 섞는 것”을 의미한다(예: 색깔 혼합). 하나님은 우리 눈에 부족한 지체도 몸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택하여 사용하신다. 우리가 연약한 지체를 더 아끼고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눈에 부족한 지체를 더 귀중하게 돌보신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별 볼 일 없거나 몸에 유익보다는 짐이 될 것 같은 지체를 볼 때도 우리는 분쟁을 일으키는 사고나 언행을 금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지체는 함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시는 지체다. 그러므로 서로 같이 돌보라고 명하신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기 원한다.
부족한 지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 덜 귀히 여기는 지체, 아름답지 못한 지체 등으로 표현된 성도는 육신적인 기준으로 볼 때, 크게 드러나지 않고 인정과 칭찬을 덜 받는 역할을 맡은 성도를 의미하지, 인품과 언행이 덜 성숙한, 그래서 다른 지체에 어려움을 끼치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자는 성도의 드러난 죄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야 하고(갈 6:1), 육신적인 성도는 죄에서 돌이켜 더 이상 교회에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 몸의 지체가 병들었을 때, 다른 지체는 회복을 돕고, 병든 지체는 낫기를 애쓰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하나 돼야 한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자기중심적인 사고 즉 이기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악한 태도다. 교회 모든 지체에 최상의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교회 모든 지체가 부담을 주더라도 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런 개인주의적 태도는 교회의 하나 됨을 망친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내는 데 커다란 방해가 된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서로 같이 돌보기는커녕 분쟁을 일으키는 데 무기로 사용했다. 몸이 아니라 지체,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을 더 내세운 결과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마음을 버리고 공동체적인 마음을 품어야 한다. 개인이 각자 자신을 세우는 교회가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엡 2:22).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6-27절). “너희” (복수) 곧 우리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 지체가 되어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하고 친밀하게 하나가 된다(롬 12:5). 한 성도의 고통은 모두의 고통이고, 한 성도의 영광은 모두의 기쁨이다. 반대로 어떤 성도가 높임 받을 때, 시기하고, 어떤 성도가 고통받을 때,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이다. 열등한 은사는 없다. 모두 필요한 은사다. 하나님이 교회에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택하시고 은사를 부어 주신 것이다. 우월한 은사는 없다. 모두 귀중한 은사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자매인데 어떻게 귀하지 않겠는가? 그들 모두에게 교회에 소중한 은사를 주셨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자신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는지 잘 모를 때, 어떻게 교회에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28, 30절엔 하나님이 교회 중에 세우신 몇 가지 은사가 나온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 통역하는 자.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터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을 했던 과거의 일꾼들이다. 능력을 행하는 자와 병 고치는 은사, 각종 방언과 방언의 통역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 사도와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확증하기 위한 은사로 말씀의 계시가 완성된 지금은 중지됐다. 남은 건 교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을 일반적으로 “봉사의 일”이라고 부른다(엡 4:12). 성도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빌 3:3).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명령한다(벧전 4:10). 교회의 여러 가르침 사역에서 자기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모임에서 다스리고 돌보는 역할을 하는 성도도 있다. 크게 보면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도 봉사의 은사이지만, 그 외 다른 모든 교회를 세우는 일이 봉사라는 것을 기억하라. 성경은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라고 말한다(벧전 4:11). 당신에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소원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여기고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감사하라. 그 모든 섬김에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봉사가 크던 작든,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하나님께 귀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