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러나 이제는
본문: 로마서 3장 21~31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이력서를 쓰신 적이 있으십니까?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학력이나 경력을 증명하고 내가 회사에 필요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력서를 씁니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력서에 더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경험을 쌓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어찌 보면 세상의 종교가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신적인 존재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영적인 이력서에 뭔가 더 적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더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더 많이 착한 일을 하고 고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이 믿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고를 했으니 이렇게 헌신을 했으니 하나님이 날 받아주실 것 같고 저 사람과 달리 나는 이렇게 했으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이력서에 빈칸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짜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던 유대인은 어떠합니까? 그들의 이력서에는 유대인 이라는 특별한 항목이 따로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민이야! 저 이방인들과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야!’ 그들은 이방인과 다른 이력서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력서에 언약 백성의 증거로 할례 받은 자라고 적었기에 100%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할례와 율법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긴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지금까지 이것을 말하고 경고했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외 없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그 높은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높이 뛸 수 있을까요? 2.45미터라고 합니다. 저를 가볍게 뛰어 넘고도 남을 만큼 훨씬 더 높이 뛰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높이까지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수가 높이 뛰는 것을 옆에서 보면 어떨까요? 참 대단하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어떨까요? 옆에서 보는 것만큼 대단하게 보일까요? 만약에 비행기를 타고 그 모습을 본다고 하면 어떨까요? 선수가 뛰는 거랑 제가 뛰는 거랑 다르게 보일까요?
사람이 아무리 높이 뛴다고 한들 사람이 아무리 의를 행한다고 한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욥의 친구가 말한 것처럼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입니다(욥25:6).
사람이 아무리 거룩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눈에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정말적인 상황을 아는 사람은 이제 다음의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더러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21절부터 바울이 대답합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모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사람에게 그들 자신에게 맞춰져있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시선을 옮겨서 다른 것을 보게 합니다.
롬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은 절망뿐인 사람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게 합니다. 율법이 줄 수 없는 의로움, 그 의로움을 주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옛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새 시대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뜨거운 감격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내용이고 또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라서 이 말이 내 마음에 그렇게 울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이 두 마디보다 더 경이로운 단어는 없다“
소망이 없던 나에게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이 마땅한 나에게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운명과 해결할 수 없었던 나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신 복된 소식 그 놀라운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
복음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율법을 반대하며 등장해서 유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증거된 것입니다. 구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신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옛적부터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고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1단계 계획으로 율법을 주셨다가 ‘이스라엘의 실패, 역시 안 되겠다.’ 2단계 계획으로 ‘예수님 출동’ 이런 게 아닙니다. 복음은 플랜B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선하신 뜻 가운데 처음부터 복음을 계획하셨고 완벽한 때가 되었을 때 복음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설명합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주어집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냐는 말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두고 의롭다고 죄인을 의인이라고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일이 그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일,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하신 세 가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한 가지 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속량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옛날 성경에는 속량을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은 범죄자를 가두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의미입니다. 구속, 속량이라는 말은 당시에 노예시장에서 사용되었던 말인데 주인이 값을 지불하고 종을 구입한 다음에 그 종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고 죄의 포로가 되어 죄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이라는 값을 치르고 사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값없이 은혜로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값이 지불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일, 둘째는 화목입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범죄 했을 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 값이 지불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사람에게는 이 죄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일을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제물이 되셨고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일, 셋째는 간과입니다.
롬 3:25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간과하심을 잘못 이해하면 죄를 그냥 봐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 간과하심은 죄에 대해서 그냥 눈감아주고 면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나오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이 참으심으로 죄에 대한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심판을 유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누가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심으로 그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죄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모든 죄 “전에 지은 죄”까지도, 그 모든 죄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해서 용서하신 것입니다.
“곧 이 때에”(26)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의로우신 성품에 따라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일을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 하나뿐인 방법 십자가를 예수님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완전함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의와 칭의는 둘 다 십자가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십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칭의를 함께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정의와 칭의를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우리가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이 놀라운 일에 대해서 어떤 적용을 할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세 질문을 통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자랑할 데가 어디냐?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첫 번째 질문에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자랑할 만한 여러 특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만 그랬을까요? 이방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랑은 타락한 우리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데 있어서 내가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사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누가 대놓고 자신을 자랑하겠습니까? 보통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자랑하기보다 은근히 자신을 자랑하기도 하고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나 정도 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난 교회에 다니니까 성경을 읽고 기도하니까 헌금을 하니까 저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생각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자랑거리를 찾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나의 유일한 자랑이 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찬양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자랑하며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6:14)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롬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두 번째 질문에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차별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구별되도록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맡았고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 특권적인 역할을 오해했고 이방인을 무시했습니다.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선민의식으로 철저하게 이방인을 차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차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똑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허락하십니다. 한 주석가는 이 진리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간단하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한 가족이며 같은 상에서 먹는다.”
한 집에 살면서 같이 밥 먹는 사람을 식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한 식구입니다. 같이 밥 먹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식탁에서 차별 없이 함께 식사할 수 있습니다. 양반 자리, 상놈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 차별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구별들, 인종이나 국적이나 계층이나 성별이나 연령이나 그 모든 다름으로 인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피부색이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외적인 것들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우리의 교제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모두 다 동등합니다. 교회는 가진 것으로, 배운 것으로, 사회적 위치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질문, 율법을 파기하느냐?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세 번째 질문에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율법을 폐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은 율법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은 마치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폐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율법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믿음과 율법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굳게 세웁니다. 율법이 그 역할을 다 할 때 죄인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은혜 앞에 겸손하게 되어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 되어 서로를 세워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역할을 알고 굳게 세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의를 나타내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이 경험이 과거의 기억이 되고 이 경험이 현재와 점점 멀어질수록 우리는 그 때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복음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얼마나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얼마나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는지 놓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감격을 다시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지막지한 은혜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진노를 막아주셨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고 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되어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죽어 마땅한 내가 그러나 이제는 살아서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새로운 인생, 주님과 함께 하는 진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 그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눈부시게 밝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여내신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을 자랑합시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복음에 대한 감격을 새롭게 함으로 우리 주님을 자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