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러나 너는
본문: 디모데후서 3장 10~15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가 살면서 때때로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도’ 정확하게 ‘그러니까 너도’ 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말, 같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너만 손해야! 그러니까 너도 유별나게 그럴 필요 없어! 그러니까 너도 적당히 하면 돼!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똑같아, 그러니까 너도 하지 마! 괜찮아.’
‘그러니까 너도’라는 말은 다르게 살지 말고 세상에서 하는 것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우리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성경이 이와 다르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러니까 너도’ 라고 말씀합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디모데의 시간여행으로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디모데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을 가지고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하여 현재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면 교훈이 무엇인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19개의 특징을 보면서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고 죄를 따르는 사람들, 말세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 오늘 본문은 앞에 언급된 말세에 진리를 떠난 사람들과 대조가 됩니다.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 보겠습니다.
딤후 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딤후 3: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원래 10절 말씀은 “그러나 너는” 하고 시작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말이 어순 때문에 그런지 위치가 옮겨져 있습니다. 11절 중간에 “네가 과연”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그러나 너는”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대조되는 느낌이 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언급하면 진리를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너는” 그러나 너는 다르다. 디모데는 그들과 다릅니다.
왜 다릅니까? 말씀에서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바울은 디모데가 ‘보고 알았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나 너는 보고 알았다’, 디모데의 과거입니다.
여기 “보고 알았다”라는 말은 의역한 것인데, 직역하면 ‘따랐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따라가는 것, 그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는 따랐거니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따랐다는 말을 왜 우리 성경은 보고 알았다고 했을까요? 잘못 번역했을까요? 우리는 따랐다는 말을 이해했다는 의미로 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말씀 중간에 ‘여러분, 잘 따라오고 계시죠?’ 라고 말할 때 이때 따른다는 말은 전하는 말씀을 잘 듣고 계시는지, 잘 이해하고 계시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보고 알았습니다. 이해했습니다. 마음으로 따르고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살았습니다. 디모데는 진리를 떠난 자들과 다른 것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디모데는 바울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 바울이 전하는 진리와 그에 따른 행실, 삶의 방식과 태도를 말합니다.
“의향”, 인생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해 집중했습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 믿는 자들은 인내를 통해 소망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 목록에서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음과 고난” 오래 참음과 인내를 말하면, 자연스럽게 박해와 고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세 도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언급하는데, 아마도 디모데는 이 도시에서 고난당하는 바울을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은 디모데에게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바울이 지켜봤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모든 고난에서 바울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바울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른 삶, 그것을 디모데가 보고 배웠고 이해했으며 따랐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했던 명령대로 한 것입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진리를 떠난 사람들과 다르게 삽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따르고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과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리스도를 따라 삽니다. 그래서 다릅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바울을 따릅니다. 바울 곁에서 그의 가르침을 들었고 직접 그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나 너는 다르다’ 그들과 다릅니다. 다른 것을 따르는 자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나의 신분, 나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난날, 여러분의 과거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과거에 주님을 만난 이후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물론, 부족함이 있고 넘어짐이 있고 연약함도 있지만 내가 가는 방향은 세상과는 다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계속 들을 수 있는 속삭임에 대해서 ‘그러니까 너도, 그래서 너도, 저 사람들처럼 너도’, 이런 유혹에 대해서 거절하며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따른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을 따른 디모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고난에서 바울을 건지시고 그 뜻대로 바울을 사용하신 주님,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계속해서 다르게 살기를 원한다면 시시때때로 생기는 두려움을 버리고 매순간 결단함으로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결단이 여러분의 계속되는 과거가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볼 때, 나의 지난날을 돌아볼 때 그 모든 날들이 주님을 따르는 날들이 되도록 주님과 함께 하는 역사가 되도록 자신을 점검하고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의 과거, ‘그러나 너는 따랐다’입니다. 이어서 디모데의 미래입니다. ‘그러나 너는 받으리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디모데의 미래는 어떠합니까? 뭔가 기대하고 기다릴 만한 것이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를 받으리라” 사람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상황이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은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더 주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박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의 미래를 두고 당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면 너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네가 경건한 삶을 산다면 오해와 비방과 미움을 받을 것이다’
세속적인 사람은 경건한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기에 싫어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러했고 바울이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디모데도 그럴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이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다가올 미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미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가 이러합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미래의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고 속는 일이 만연할 것입니다.
갈수록 더 안 좋아 질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들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겉모습을 꾸미고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헛된 것에 소망을 두게 하고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이런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해질 것이고 진리를 떠나서 점점 더 부패할 것입니다.
13절에 “더욱 악하여져서“, 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다, 전진하다’는 뜻인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의 방향은 잘못된 방향입니다. 잘못된 방향은 가면 갈수록 더 안 좋아집니다. 상황이 악화될 뿐입니다. 진리를 반하고 있을 때, 진리를 등지고 섰을 때 그럴 때 전진은 오히려 후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괜히 부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고 비관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러하고 이 땅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말씀이 그러합니다. 이 땅에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방향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만약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시간이 갈수록 전진이 아니라 후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어려움, 수고와 고생이 무엇을 위함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경건으로 인해 따라오는 고난입니까? 아니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따라오는 마음의 가책입니까?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살펴봤는데 큰 차이는 없습니다. 과거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 현재까지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입니다. 바울은 한 가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일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너는 거하라‘, 디모데의 현재입니다.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거하라”는 말은 현재시제로 지속되는 명령입니다. ‘계속 거하라’는 말입니다. 계속 거하라, 계속 머물러 있어라, 계속 그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배우고 확신한 일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이 배우고 그 배움을 통해 확신한 것을 계속 지켜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될 영적인 전투 속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확신을 가지고 배운 것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배운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배웠을 때 배운 것을 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왜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걸까요?
디모데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에게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배운 것인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확신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정말 확신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걸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낚시를 배운다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낚시를 배우는 것, 유익한 일일 수 있지만 제가 확신을 가질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낚시를 베드로에게 배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누구에게 배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주님에게 낚시를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해서도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저에게 사람을 낚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르침에 대해서 저는 제가 배운 것에 대해서 확신할 것입니다. 배움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배우느냐,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디모데의 경우 어떠합니까? 디모데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본문을 보면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누구”라는 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는 단어를 사본에 따라 단수로 볼 수도 있고 복수로 볼 수도 있는데, 만약 복수로 본다면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디모데가 무엇을 배웠습니까? 본문에서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디모데가 배운 성경은 구약입니다. 어릴 때부터 디모데는 구약을 배웠고, 그리고 바울을 만나서 바울을 따르면서부터는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시에 근거한 사도의 가르침, 지금 우리로 말하면 신약을 배웠을 것입니다. 결국 디모데는 구약과 신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웠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주님의 계시를 받은 바울에게 배웠고 또한 성경을 배웠습니다. 확신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며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확신하며 배운 것이 어떤 일을 합니까? 성경이 주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디모데를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건져주셔서 죄를 따라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도록 참으로 가치 있고 귀한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비록 그 길에는 고난이 따라오지만 계속되는 어려움을 만나게 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배운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에 계속 거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 확신은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게 붙들어 줄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 진리의 말씀에 대한 확신은 바다 위에 있는 배를 단단히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닻과 같습니다. 아무리 높고 거친 파도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세상의 풍파와 거센 유혹과 계속되는 공격이 있다 하더라도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파선하지 않고 믿음의 항해를 계속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이 그러한 일을 합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세상과 다르게 살려면 계속되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진리의 말씀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그 진리 가운데 머물러 계십시오. 배우고 확신하십시오. 그러면 무섭고 어두운 밤이 계속 된다 하더라도, 망망대해, 끝이 없어 보이는 바다 한 가운데 있을 때에라도 빛과 같은 성경이 있다면 어둠을 해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그 말씀을 붙들 때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리하면, 오늘은 디모데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계속해서 진리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주어진 이 명령은 우리를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믿는 자로서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다르게 살려고 할 때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유혹과 압력과 핍박과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너는” 흔들리지 말라, “그러나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너는” 그 자리를 지키라, “그러나 너는” 반석처럼 굳게 서라,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바울의 삶을 생각하고 또 디모데에게 주어진 명령을 생각하면 때로는 이런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지,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잖아! 디모데는 바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바울과 함께 했잖아!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야!’
지금 나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게 생각됩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들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뭐하고 지냈는지 한숨이 나오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사용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나의 인생을 내 마음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나의 할 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주님 뜻을 행하며 진리의 말씀을 따르며 그 가운데 거하고 주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일을 뜻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과거의 일로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걱정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가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는 것,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지키고 내 삶을 점검하는 것, 그리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다르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