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는 누구인가?
본문 : 누가복음 8장 22~25절
설교자 : 최종혁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고 서로에게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참된 의미의 삶, 진정한 삶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식적인 정보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앎에서 시작해서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알고 있다면 그에게 참된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고 있으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상들의 전통적인 신이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바뀐 것입니다. 잘 달래줘야 하고 빌어야 하고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 속의 하나님도 어느 정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복과 심판은 하나님의 기준이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잘 하면 신이 무엇을 이뤄주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이슬람은 알라라는 신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알라와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같은 신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과 그들의 알라는 전혀 다른 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속성과 그들이 말하는 알라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이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성경을 보시면 복음서에는 빨간 글씨가 있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빨간 부분은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도 어느 장은 빨간 색이 많고 어느 장은 검은 색이 많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말씀을 길게 기록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행하신 일들을 기록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하신 말씀(6장) 후에 이적들을 기록합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 등입니다(7장 전반). 그 후에는 또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춰서 빨간 색이 점점 많아집니다.(7장 후반). 특별히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로 시작하여 말씀을 듣고 그것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이제 누가는 다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에 초점을 맞춥니다. 검은 색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총 네 번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거라사인의 땅에 있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십니다. 또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그 중간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습니다. 9장에서는 예수님만이 하셨던 일들을 제자들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의 중심에 있는 주제가 바로 “예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그 질문을 하고, 9장에서는 헤롯이 같은 질문을 합니다(9:9). 그리고 9장 18~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질문이 핵심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던진 질문 “그는 누구인가”입니다. 이 두 질문이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이 됩니다.
이 질문이 나온 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봅시다.
- 상황
“하루는”(22절)
누가는 정확히 언제 이 일이 발생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이 계속되던 날 중의 하루였고,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기를 시작하신 그 날이었고 저녁이 되어 날이 저물 때쯤이었습니다(막 4:35).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제자들은 꼭 우리가 잘 아는 12명의 제자들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배웠던 사람들을 통칭해서 제자들이라 부릅니다. 아마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배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을 때 사용했던 배를 타고 갔을 것입니다. 23절에서는 “행선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배가 노를 젓는 배가 아니라 돛이 있는 배였음을 말합니다. 막 4:36에 따르면 다른 배들도 예수님이 탄 배를 따라 갔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그냥 “호수”라고 말씀하셨지만, 배경을 보면 갈릴리 호수임이 확실합니다(26절). 갈릴리 호수에 대해 성경은 여러 명칭을 사용합니다. 긴네렛, 기네사렛, 디베랴 호수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모두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남뜸인데 외동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행정구역으로는 봉명2리입니다. 성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가 여러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가 맞을까요, 호수가 맞을까요? 사람들은 호수가 너무 커서 바다같아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바다의 개념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요?
갈릴리 호수는 꽤 컸습니다. 둘레가 약 53km정도 되고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1km정도 되는 큰 호수입니다. 인근에 있는 어비리 저수지의 50배가 되는 크기이고 오산시의 3배가 넘는 크기입니다. 오늘날은 갈릴리 호수라는 명칭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히브리어에 ‘얌’이라는 것이 있는데 물이 모여있는 것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바다도 호수도 성전의 물두멍도 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호수와 바다를 구분할 때 혼선이 빚어졌던 것입니다. 굉장히 큰 호수였고 주변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업을 했던 생활의 터전이었고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곳도 갈릴리 호수과 관련이 깊습니다.
예수님은 호수 저편에서 해야 할 일도 있으셨고, 예수님은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도 있으셨습니다. 신학자들이 이날을 바쁘고 힘든 하루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칠 계획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점부터 군중에서 멀어지시고 제자들에게 집중하십니다. 교훈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 있어서, 이어지는 폭풍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폭풍을 통해 제자들을 교훈하실 생각도 분명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는 목적지를 정하여 순항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피곤하신 예수님은 잠이 드셨습니다. 우리는 폭풍이 올 것을 안다면 배를 띄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꼭 배를 타야 한다면 아마 준비를 할 것입니다. 폭풍이 올 것을 알고 계셨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미리 준비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은 육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주무셨습니다.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갈릴리 호수는 매우 낮은 지역이었습니다. 해수면 아래로 200미터 정도에 위치해 있고 주변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분지입니다. 특히 동쪽이 매우 가파른 언덕인데,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대륙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호수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 갇힌 공간에 폭풍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12월에서 2월, 늦게는 4월까지도 이런 폭풍이 발생했고, 그럴 경우 파도가 수 미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호수에서 이런 파도를 보기 힘든데 갈릴리 호수는 바다가 아니지만 그런 갑작스런 폭풍이 발생하는 호수였습니다. 이 폭풍은 갑작스럽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밤에는 이런 폭풍이 잦지 않았는데, 아마 제자들도 그래서 더 아무런 대비 없이 배를 띄웠을 것입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배에 물이 들어 왔고, 침몰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됐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전문적인 어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 폭풍이 몰려 올 때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폭풍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위태한 상황에 빠졌고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가는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은 고물(배의 뒷부분)에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기록합니다(막 4:38). 처음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출발했을 때와 상황은 많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출발할 때와 같이 평온하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변한 상황만큼이나 마음의 상황이 변했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어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24절)
여간 해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시다는 것도 알았고, 또한 자신들이 이런 일에는 전문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폭풍 속에서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았고 예수님을 깨우기로 합니다.
“주여 주여” 반복해서 부르는 것은 그들의 다급함을 나타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마태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누가의 ‘주여’에 해당되는 단어에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여’는 광범위하게 리더쉽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주’ 즉 주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마가는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서로 마구 부른 것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깨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자들은 혼동과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을 깨우기 위해 여러 표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마가의 기록(“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을 보면 그들의 심정을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말에는 약간의 불평도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글로 이 사건을 접하는 우리에게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배를 탄 경험이나 죽음에 가까웠던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제자들은 지금 실제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혼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봅시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폭풍으로 배에 물이 차던 상황에도 잘 주무셨던 주님이 제자들 때문에 깨어 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꾸짖다는 표현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셨고(4:35, 41) 열병을 꾸짖기도 하셨습니다(4:39). 꾸짖는다는 의인화된 표현 때문에 굳이 이 폭풍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모든 것에게 말씀으로 존재할 것을 명하셨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피조물에게든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셨다고 꼭 그것이 생물체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의 다른 이적들이 그러했듯,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바람과 물결은 순식간에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즉시 시행됩니다.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지만, 바람이 그친다고 해서 물결도 즉시 그치지는 않습니다. 여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멈춰도 물결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렇게 폭풍이 일었을 때 바람이 멈춰도 물결은 1,2시간 지속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명령하셨을 때 바람도 그치고 물결도 즉시 그쳤습니다.
이로써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전하게 호수를 건너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다른 이적들이 그러하듯, 단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 주목적은 아닙니다. 25절을 보시면 이 말씀이 기록된 분명한 목적이 나타납니다.
- 두 개의 질문
-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 “그는 누구인가?”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내실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자도 살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이 절대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자연’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인간에게 무력감만을 안겨주는 거센 폭풍우 속에 예수님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예수님을 깨우던 제자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렇지 않게 바람과 물을 향해서 명령하셨고 바람과 물은 당연하다는 듯이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상황을 보고 두려웠고 놀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연히 날씨를 맞춘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말하는 순간 폭풍이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폭풍은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분명하게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기 위해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고, 폭풍은 그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렇게 자연이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도했을 때 해가 멈추었고 모세가 하나님께 구했을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폭풍이 잠잠해졌는데 그 폭풍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 잠잠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피조세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 피조의 법칙을 깰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바다와 물결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제자들은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앞에 있는 예수님은 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피곤해서 폭풍 중에서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령하자 금방이라도 배를 침몰시킬 것 같았던 폭풍이 완전히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사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놀랐던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가 너무나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은 아래 시편의 말씀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시 107:23-30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했다면 이 폭풍을 잔잔하게 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일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들과 함께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겼습니다. 사실 이것이 그들이 폭풍 중에서도 보였어야 할 반응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알았다면 전적으로 신뢰했어야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계신 예수님이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폭풍을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기보다 폭풍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폭풍의 심각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과 그들의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이런 상황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순간 그들은 마치 믿음이 전혀 없는 자처럼 행동했고, 믿음이 다른데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 상황은 무엇이 특별했을까요? 그 동안 예수님을 잘 따라오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께서 구해주신 것을 보아 왔습니다. 많은 이적들을 보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워왔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제자들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익히 알고 있던 그 능력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지금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그 동안 제 3자의 입장에서 대부분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했는데, 이제 매우 직접적으로 그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익히 잘 아는 호수입니다. 배를 타는 일도 평생 해왔던 일입니다. 그 동안 믿고 따라왔던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고 나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달라진 것은 갑작스러운 폭풍 때문에 지금 내가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이 시험은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폭풍 속에서 두려워했고 또한 예수님께 대해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성품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들의 상황은 인간적인 면에서 충분히 두려워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그 폭풍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예수님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자의 마땅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 있는 자로서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폭풍의 주인은 아닌 것처럼 폭풍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폭풍이 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잊었습니다. 예수님이 폭풍을 잠재우고 나서야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그 예수님께 반응해야 합니까? 그분을 믿고 따라야 했습니다. 그분의 능력, 선하심을 믿고 의지해야 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습니다. 폭풍이 왔다면 그것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임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주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은 그 폭풍을 다스리시는 분이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제의 폭풍우를 만났을 때 보였던 반응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 보이는 반응과 유사합니다. 내 주변의 상황이 내가 원한 것과 다를 때 하나님이 없으신 것처럼,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숨어 계셔서 아무 일도 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신경도 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그런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불평과 두려움을 통해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인생의 폭풍 속에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미 그런 상황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한번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어떤 하나님을 지금껏 믿고 섬겨 왔는가? 인생의 평온함 가운데 내가 감사하고 찬양했던 하나님이 지금은 다른 분이 되셨는가? 인생의 어려움을 만날 때 그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경험을 해야지만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진리는 내가 경험하든 하지 않든 진리입니다.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 삶 속에서 증명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내 삶에서 증명되어야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가장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때로 눈에 보이는 현실은 진리의 말씀과 다르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관심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고 닥쳐올 폭풍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믿음의 눈이 있었다면 그들은 폭풍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예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최소한 예수님을 깨우기 전에 그분이 누구신지 서로 말하였다면, 이 사건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아닌 그들이 믿음이 증명된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환경에 따라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에 따라 말씀에 순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여전히 확신 가운데 거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셀라)”(시 46:1-3)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힘써 배우고 알아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함 가운데 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폭풍 후 만이 아니라 폭풍 전에도, 그리고 폭풍 중에 물으십시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떤 분이신가?
구역모임을 위한 질문들
1.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다른 신에 대해서 나눠 봅시다.
2.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 삶의 어려움을 만날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이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