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구원하시는 하나님-사가랴의 찬양
본문 : 누가복음 1장 67~80절
설교자 : 최종혁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성경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구원사,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처음 타락했을 때부터 메시야(구원자)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인류의 역사를 통해 구원자와 그가 할 일에 대해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을 한 번에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조금씩 여러 형태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와 예언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적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나 의식을 통해 다가올 일의 그림자를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그것의 절정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은 그 절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시점이자 율법 시대와 은혜 시대의 전환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로 인해 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망은 모든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그 사건을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 1-2장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는 부분적으로 찬양하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총 5번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인 사가랴의 찬양이 분량에 있어서 가장 길고, 구속 사건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불순종한 결과로 그는 10개월 동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64).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입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67). 세례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그 어머니 엘리사벳도 그러했으며, 이제 아버지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을 입어 예언적인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찬가는 마리아의 것과 비슷합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구원이 핵심 주제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찬가가 개인적인 성격의 노래라면 사가랴의 찬가는 공동체적입니다(46, 67절 참고). 사가랴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셨던 약속들입니다. 우리가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은 크게 6가지가 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 제사장 비느하스와 자손들, 모세, 다윗 등의 인물과 맺은 언약, 그리고 새언약이 있습니다. 노아의 언약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이었고, 제사장과 맺은 언약은 ‘너희가 영원히 내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언약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율법을 통해 이것을 지키면 복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화가 있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나머지 3가지 언약은 구원과 관련된 약속들입니다. 바로 아브라함, 다윗과 맺으신 언약, 그리고 새언약입니다. 사가랴의 찬양에는 이 3가지의 언약이 담겨있고, 그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언약,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68-71)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68-69). 그는 찬송의 대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돌보셨다’는 말은 원어로는 ‘찾아왔다’는 의미입니다(78).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가실 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이고 또 하나는 ‘심판’입니다. 창 50:25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출 3:16에서는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고 말씀하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구원해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사가랴는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이미 이뤄진 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00년 간 침묵하시는 것 같았던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셨고 기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속량하셨다”는 것은 ‘구속하셨다’는 것으로, ‘다시 사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 그들을 다른 민족에게 ‘파셨다’, ‘넘겨주셨다’고 표현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져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다시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 것이었기에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 약속이 확실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다윗의 언약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69). 짐승의 ‘뿔’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강력한 왕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 ‘일으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사람을 보내실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백성들에게 보내신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말한 “구원의 뿔”은 자신의 아들, 요한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뱃속에 있었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구원의 절정, 그 시작을 알리는 누가복음 1-2장에서는 다윗이 자주 언급됩니다(1:27,32; 2:4,11). 다윗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성경 사무엘하 7:11로 가보겠습니다. 다윗이 평안함 가운데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를 보니 회막, 오늘날로 말하면 천막, 텐트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집을 지을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1-13). 여기서 말하는 “집”은 어떤 건물이 아니라 왕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손을 주시리라 말씀하시고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취되었지만, 그의 왕위는 견고하거나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약속의 온전한 성취는 한 인간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6). 이 영원한 왕위는 영원하신 왕, 메시야를 통해 하실 일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70-71).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시고 또 여러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세상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할 온전한 왕이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메시야를 통해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사가랴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는 이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받는 일, 원수들이 심판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행 1:6). 메시아의 선구자(요한)이 태어났고 마리아의 뱃속에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이 될 아기가 있었으니 사가랴는 이제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하고 모든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역사가 이제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이유(72-75)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72-73).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의 결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가 ‘그들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고 기뻐하셨기에 그들을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언급합니다.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73).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시고, ‘네게 복을 주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은혜로 선택하시고 복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기를 반으로 쪼개놓고 하나님의 영이 왔다갔다 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그는 자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땅’과 ‘자손’과 ‘복’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조금씩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성취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온전히 차지한 적도 없습니다. 그것은 메시야가 왔을 때 성취될 약속들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기억하셨고 그것을 성취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은 ‘구원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역사는 다시 말하면 ‘긍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74-7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저 한 곳에 모여서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예배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구약의 경건한 성도들의 기도를 보면, 현재의 어려움에서 구해달라는 간절한 외침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마음의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섬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신이 노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말입니다. 기우제와 같은 것들도 신을 달래주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가랴는 구약을 연구하고 그것을 가르치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고 교만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가랴 당시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과 가까웠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껍데기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던 사가랴가 이러한 예배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모습을 사가랴는 감격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가 잉태되었고, 그의 선구자가 자신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새언약,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76-79)

75절까지는 과거형으로 기록되었지만 이제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기록합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선구자였습니다. 그가 주 앞에서 그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정치적인 구원과 사회적인, 군사적인 구원에 앞서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백성들과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그들의 죄 문제였는데,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거절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죄사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고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거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지금껏 누구에게도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말했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죄의 문제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유대인이 언약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하라’, ‘죄 사함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잔을 드시고 이것이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체결한 새언약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이것은 죄 사함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을 다루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법,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새로워져야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새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이 했던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 죄 사함을 받아 진정한 그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구원의 길을 준비했고,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78-79). 이 말씀에는 해가 비추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가 예언한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이 “공의로운 해”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둠”은 무지이고 “죽음”은 죄악입니다. 무지와 죄악 중에 있던 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참된 지식을 주셨고 거룩하게 하시며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그 해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뤄진 일입니다. 스스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없었던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임하셨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사가랴는 모든 구약의 약속들이 실행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거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메시아를 거절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가 착각한 것일까요? 물론 사가랴는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 역사의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비밀’이라고 했던 것,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계획,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엡 3:4-5).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계획, 감춰진 교회의 비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영원한 나라에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으로서 교회가 함께 누리고 다스릴 것입니다.

사가랴가 드렸던 감사의 찬양을 우리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속량하신 하나님, 구원하시고 일으키신 하나님, 옛적에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언약을 정확하게 이루신 하나님, 긍휼하심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중에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신 하나님,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빛의 나라로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