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구원에 이르는 지식 PART I
본문 : 베드로전서 1:18-21
설교자 : 조정의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21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처음 구원받았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순간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아마도 마음에 큰 기쁨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 죽어도 하늘나라에 간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합당한 반응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구원에 합당한 삶’이라는 주제 설교) 온전한 은혜를 바라고 거룩한 자가 되며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날의 기쁨을 잃어갑니다. 소망이 흔들리며 믿음이 불확실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의 영향력이 남아있어 우리의 삶에 반복되는 죄로 인해 지치는 것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런 나인데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실까’, ‘나의 이런 죄까지 과연 용서해주실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고 소망과 믿음까지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어떻게 속해졌는지(대속)에 대해, 어떻게 죄값이 치러졌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가 씻겼는지, 그 대속의 주체가 누구이고, 대속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소망과 기쁨을 되찾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10억의 빚이 있고 그 이자가 매일 더 늘어간다고 생각해봅시다. 누군가가 와서 자신에게 황금이 있으니 그것으로 그 빚을 모두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기쁘고 감사가 됩니다. 그런데 매일 불어나는 이자를 보면서 이런 의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가 과연 내 빚을 갚아줄 수 있을까?’. 우리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대속의 방법’은 그런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죄가 씻겨진 것이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8,19절)고 말합니다. 그 모든 죄를 씻고도 남을 값진 보혈로 대속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부터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큰 죄까지, 보혈은 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도, 간음 중에 잡힌 여인도, 생애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였던 사도 바울도 이 보혈로 씻김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죄를 지을 때, 나의 이 죄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들 때, 그리스도의 보혈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대속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라고 말합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20절). 여기서 “그”가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알린 바” 되시고 “나타내신 바” 되신 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21절에서 밝힌 대로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속물을 통해 우리의 죄를 씻으신 ‘대속의 주체’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 구원을 계획하셨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말세에 나타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며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할까요? 다시 빚을 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큰 빚을 갚아준다고 말하고 갔을 때 여러분은 확신이 드시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누군지를 잘 알아야 확신이 설 것입니다. 그가 아는 사람일지라도 ‘과연 그가 그 빚을 모두 갚을 능력이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 것입니다. ‘혹 생각이나 계획이 바뀌지 않을까’ 싶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값을 치러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는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용서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확실한 믿음과 소망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 전에 계획하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급하게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나의 이런 반복적인 죄까지 용서하실까’라는 의심이 들 때, 대속자가 우리의 대속을 창세 전에 계획하셨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20절). 누군가 빚을 갚아줄 능력과 계획이 있더라도 그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대속물을 계획하셨고, 실제 역사 속으로 인간의 육체를 입은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대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실제로 오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만 이뤄진 사실입니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를 치러주실 대속자가 이미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했다는 것입니다. 구속 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태초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을 이 땅에서 실제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21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할까요? 그분이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기에 다시 살아나시고 새생명을 얻으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고 그것으로 끝났다면 주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는지 인류의 죄 때문에 죽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가 완벽하게 치러졌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영광을 주신 하나님”(21절).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게 하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이 모든 영광에 우리가 참여할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고 기도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한한 영광을 함께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신 이 모든 대속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계획하시고 실현하고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시며 구원을 성취하시고 미래에 그것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계획 안에 우리의 무엇이 더해졌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계획하시고 실현하시고 성취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매일의 삶에서 죄가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믿음과 소망을 흔들 때 기억하십시오. 태초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씻으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분은 후회하지 않으시고 번복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대속으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마음으로 짓는 죄들, 내일 지을 죄들을 보시면서 놀라지 않으십니다. 이미 다 알고 계셨고 그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그것으로 슬피 울거나 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행위로 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이미 완벽하게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믿는 자는 구원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입니다. 구원열차는 ‘칭의’에서 시작해서 ‘성화’를 거쳐 ‘영화’라는 종착역에 이르게 됩니다. 이 열차는 절대 탈선하지 않습니다. 이 열차를 운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가 강하든지 약하든지 상관없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든지 실패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구원열차에 탄 이상 종착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여러분은 확실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고 자신의 구원을 심각하게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대속의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21절).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공할 때 있다가, 실패할 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우리를 대속하시고 이루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소망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해 대속하신 하나님, 그분 위에 세워진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순종을 해서 더 거룩해지거나 구원이 더 확실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대속을 통해 바라볼 은혜가 생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대속 계획을 통해 이미 거룩한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순종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거룩함을 더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사랑에 감격할 때 순종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로 구원의 확실성을 점검한다면 분명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구원까지 흔들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우리를 대속하신 대속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고도 남는 대속물이시라는 것, 그리고 대속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구원을 계획하셨고 이루시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속의 목적이, 우리로 하나님 안에 믿음과 소망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아무것도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이 여러분에게 소망으로 다가오신다면 그것에 순종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