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결혼, 질서를 회복하여 비밀을 드러내라 

본문: 에베소서 5장 22~33절

설교자: 최종혁

 

과거에 결혼은 ‘당연히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결혼은 ‘원하면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원한다면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것 혹은 반대로 법적으로 결혼은 하더라도 각자 따로 사는 것도 괜찮다. 결혼 관계 안에서의 남녀 역할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하여 가정의 경제적 필요를 공급하고 여자는 가정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바깥사람(양반), 안사람 같은 표현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역시 원하는대로 상황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두 사람이 모두 일을 하는 경우도 많고, 한 사람만 일을 할 경우에는 경제력이 더 있는 사람이 일을 하는 것으로 선택한다. 과거의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결혼은 남녀가 아니더라도 부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자녀를 가지는 것도 전적으로 두 사람의 선택이 되었다.

뭐가 맞을까? 결혼의 본질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잘못된 가치관이 이제야 바로잡혀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어르신들께 한다면 많은 분들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답할 것이고, 젊은이들에게 한다면 반대로 바로잡혀 가고 있다는 대답이 많을 것이다. 정답은 뭘까?

오늘날의 세상은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정해진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절대적인 기준(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고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이 걸려있는 문제의 경우 당사자들간의 동의(합의)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 그 기초에 있다. 아직은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진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지만, 결국 시간 문제다. 사회적 합의라는 명분아래 결혼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대체될 것이다.

이런 변화가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에 더 급격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앞서 말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고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중요하다’는 사상(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 이제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많은 사람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아닌 것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니가 그렇다면, 니가 좋다면, 남에게 피해주는게 아니면, 괜찮지 뭐’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개인주의나 상대주의가 과거에는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한마디로 개인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 같은 이런 가치관이 사실은 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다. 하나님이 아닌 ‘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죄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죄의 풍성한 열매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사회 곳곳에서 그 열매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고 겉보기에 일시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들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바탕에 있는 사상도 괜찮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진리로 거짓을 포장하는 사탄의 오래된 그리고 매우 효과적인 계략이기 때문이다. 죄는 항상 당장에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결혼의 본질에 대한 정답이 있을까? ‘나’가 가장 중요한 지금은 그에 대한 정답은 당연히 없다. 각자가 자신의 답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살면 그뿐이다. 누구도 그것을 뭐라할 수 없다.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쿨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결혼이 과거 우리 조상들의 생존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일 뿐이라면, 상황이 달라진 지금 결혼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즉 세상의 기준에서는 더 이상 결혼의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가진 우리는 어떻느냐는 말이다. 우리도 결혼에 대한 세상의 이런 관점과 논리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까? 우리도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대로 결혼을 재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결혼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만드신 것이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과거의 생각이든 지금의 생각이든 마찬가지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결혼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한 말씀을 주셨다. 그것이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결혼의 본질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있다. 결혼의 과거의 모습이든 현재의 모습이든, 결국 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옛날이 좋았어라고 말하거나 지금이 훨씬 낫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22-33절이다. 하지만 그 전에 시작의 책인 창세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는 신약에 와서 처음 드러난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창조될 때부터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앞선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깨어진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질서와 타락

창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나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다. 따라서 남자나 혹은 여자가 다른 성별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은 창조의 질서를 깨는 생각이다.

전통적인 남녀관과 결혼관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주로 여기에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마치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처럼 여겨진 것이다. 여자의 생각은 쉽게 무시되었고 쾌락이나 출산의 도구와 같은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위 말씀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칭하시면서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인 ‘아담’을 사용하셨다. 즉,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단어로서 ‘남자’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말 번역에서처럼 ‘사람’이라는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의도는 창세기 2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말씀만 보면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음은 2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고 그에게 창조의 목적에 맞는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하셨다. 바로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기 직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

여기서 하나님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먼저 여자의 필요를 본 것은 하나님이셨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다보니 자기만 짝이 없는 것을 알고 외로워 하면서 하나님께 나와서 “저에게도 맞는 짝을 주세요”라고 구한 것이 아닌 것이다. 여자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다.

또한 하나님은 여자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고 칭하셨다. 즉, 남자를 돕는 일에 적합한 존재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서상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를 나중에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대표하는 표현으로서 남자를 지칭하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로서 함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길 원하셨지만, 각자에게는 다른 역할을 주셨던 것이다. 남자는 권위와 책임을 가진 인도자(리더)로 창조하셨고 여자는 돕는자(헬퍼)로 창조하셨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우신 창조의 질서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남녀관과 결혼관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주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인 역할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정해진’ 역할이라는 것은 없고 각자가 역할을 ‘정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모습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역할에 차이가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고 죄의 문제다.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동등하지만 역할에서는 차이가 있는 두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은 결혼이라고 선포하셨다(창 2:24; 마 19:4-6). 이것이 결혼의 본질이고 질서다. 그리고 이것을 무너뜨린 것이 죄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남편을 원한다’는 말은 결혼해서 남편을 가지기 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창세기 4장 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동일한 단어와 문법이 사용되었다. 죄가 가인을 원한다는 것은 죄가 가인을 지배하기 원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편을 원한다는 것도 여자가 창조의 질서를 떠나 남자를 지배하기 원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본래 다스리는 역할, 즉 리더의 역할을 부여받은 남자는 자신의 권위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여자를 지배하는데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든 죄가 가져온 결과다.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리더와 헬퍼라는 다른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남자와 여자는 이제 역할의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거나 우열로 인식하여 다투고 싸우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결혼관이든 오늘날의 결혼관이든 그 안에는 회복되어야 할 창조의 질서가 있는 것이다.

이제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창조의 질서를 회복 해야하는지를 살펴보자. 먼저는 아내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아내 : 남편에게 복종하라(22-24절)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지금까지의 맥락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명령이 주어졌다. 죄의 결과로 생긴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준에서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명령이다. ‘복종’이라는 말은 특수 집단인 군대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지, 일반적으로는 사용할 일이 없는 말이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말을 부부 사이에서 사용하다니, 낡아도 너무 낡은 구시대적이고 가부장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게다가 권유나 조언도 아니고 명령이다. 실제로 어떤 결혼식에서 목사님이 이 말씀으로 신부에게 주례하는 것을 듣고 다른 교회로 옮겼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도 있고 비슷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도 있다. 만약에 전도를 위해 친구나 친척을 교회에 데려왔는데, 이런 말씀이 전해지면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오늘처럼…). 그만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날의 보편적인 생각(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만큼 우리가 창조의 질서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복종하라’는 명령 자체가 오늘날 너무나 부정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많은 (복음적인) 설교자나 학자들이 ‘복종’의 의미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일단은 대부분 이것이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님을 강조한다. 당연히 맞는 얘기다. 남편이 아내에게 죄를 지으라고 하면 아내가 죄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복종(순종)에 대한 명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맥락 안에서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종이 굴종이 아님도 강조한다. 힘의 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도 맞는 얘기다.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견도 제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강조한다. 당연히 맞는 얘기다. ‘돕는자’인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도울 수 없다.

21절과의 관계를 통해 이것이 ‘아내’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는 부분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22절에는 본래 ‘복종’에 해당되는 동사가 없다. ‘복종하라’는 동사는 21절과 24절의 맥락에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21절의 명령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니, 22절의 명령도 그렇게 상호 복종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5:13에서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복종이 나의 권리를 남을 위해 내려놓는 것이라면, 이는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내들에게 주어진 ‘복종하라’는 명령이나 남편들에게 주어진 ‘사랑하라’는 명령이나 크게 보면 비슷한 명령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주장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들이 모두 맞는 말들이고 실제로 이 명령을 적용할 때 고려해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22-24절에 아내에게 주어진 명령의 핵심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명령은 아내들이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누구나 복종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어떤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복종’과 ‘사랑’은 넓은 의미에서 ‘피차 복종’하는 것은 맞지만, 복종이 아내에게만 사용된데는 이유가 있다. 분명한 역할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아내에게 주어진 말씀은 복종하라는 명령과 그 당위성에 대한 강조다. 그러니 우리도 이 말씀을 그렇게 읽고 적용해야 한다. ‘이게 이런 의미는 아니지. 이럴 때는 복종하지 않을 수 있지.’와 같은 생각으로 명령의 강도를 일단 약화시키고 본문을 읽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의 명령은 오해할 수 없게 분명하게 주어졌다. 어떤 아내든 남편이 어떻듯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는 것이다. 강조점은 여기에 있다. 믿고 구원 받은 자라면 주님께 복종하려는 태도는 당연하다. 어떤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으면 주님께 복종하겠다는 것은 믿는 자의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정말 기쁨으로 할 수 있어야 복종하겠다는 생각도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과 나의 관계, 여기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나의 위치로 인해서 복종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가져야할 태도다.

여자라고 다 같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가 아니다. 리더십이 좋은 여자가 있고 가정 일을 잘 하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다. 하나님은 남자를 리더로 세우셨다.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바로 이 창조의 질서에 기초해 있는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23절은 이 질서를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라고 표현한다. ‘리더’라는 표현보다 ‘머리됨’이라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다.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권위)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머리는 분명 우리 몸에서 특별한 지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명령을 내리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령을 받는 몸보다 머리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몸이 없이 머리만 살 수 없고 머리 없이 몸만 살 수도 없다. 머리와 몸은 다른 역할을 하지만 하나된 몸을 이룬다. 이것이 부부가 된 남자와 여자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머리의 명령을 몸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완벽한 모델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제시하며 다시금 아내들에게 모든 일에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강조한다.

엡 5:23–24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관계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에 복종할지 말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복종할지다.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복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물어보라. 그것이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질서를 부부 관계 안에 세우셨다. 남자를 더 높이고 여자를 억압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질서를 무시했을 때 타락하게 되었고, 그후 부부는 주도권 싸움을 하며 하나되기보다 어떻게든 내가 손해보지 않는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관계가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이 질서를 기억하고 나의 위치와 그에 따른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 우리의 참된 행복이 있다.

남편 : 아내를 사랑하라(25-31절)

질서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내의 복종에 이어지는 남편에 대한 명령은 ‘다스림’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편에게 주어진 명령은 “사랑하라”다. 바울은 25절과 28절에서 같은 명령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바울은 아내의 복종에 대해서보다 남편의 사랑에 대해서 더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내의 복종이 더 충격적이지만 당시에는 남편의 사랑이 더 충격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 많은 분량을 할애 했을 듯 하다. 아내의 복종은 당연시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 특히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이런 사랑에 대해서 당시의 남편들은 아마 “내가 왜?”라고 쉽게 답했을 것이다. 한 주석가는 “신약 외의 가정 규약에서는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절대 권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아놀드, ZECNT, 390). 그만큼 사랑의 리더십은 바울 당시의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바울이 가부장적인 사람이어서 아내들에게 ‘복종’을 명했다면 남편들에게 ‘사랑’을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그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른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는 말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해야할 사랑의 모습은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법’을 크게 두 개로 말한다. 하나는 희생이고 하나는 돌봄이다.

먼저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26-27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이유가 아니라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아무 흠과 티가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신 것이 아니다. 교회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주셨다.

롬 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였다. 당연히 하나님을 먼저 찾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사랑할만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해서 자신을 주셨다.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은 남편들이 이런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길 원하신다. 아내를 위해 다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아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내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 아내가 어떠하든지 상관없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어떠함에 달려있지 않았던 것처럼, 남편들의 사랑도 아내의 어떠함에 달려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사랑은 조금도 다른 사람들이 누구냐에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냐에 달렸다.”(맥아더, 450).

다들 사랑스러운 아내와 결혼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움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다. 외모가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진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던 아내가 전적으로 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아내를 바꿔야할까? 그렇게 했던 남편들이 있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간음이나 이혼이 그런 행위들이다. 하지만, 아내가 어떤 사람이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심도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엡 5:28–31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말씀은 뭔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들리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내를 재산취급하던 당시의 남편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아내도 결혼으로 나와 하나된 나의 일부이니 내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양육하고 보호하신다.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다. 그들에게 해가 되는 것은 제하신다. 정확히 우리가 우리 몸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몸에 직접적으로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몸을 돌본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돌보신다.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돌보는 것으로 사랑해야 한다. 물질적인 필요 뿐 아니라, 정서적 필요, 감정적 필요, 영적인 필요 등에도 민감해야 한다.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해서 아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관심을 가지고 그 필요를 채우는 것이 남편이 할 일이다. 남편이 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내는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서 그런 필요를 채우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아내를 위험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한 몸된 남편의 책임인 것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 강한 시대에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남편들은 ‘그래 내가 좀 더 강하게 권위를 세워야 해’라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주님의 본은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권위를 모두 내려놓았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 중에 섬기는 자로 계셨다.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델로 삼아 내 필요나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아내를 먼저 돌보는 것, 희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주신 명령이고 그것이 남편들이 지켜야할 결혼 안에 있는 창조의 질서다.

정리 : 복종과 사랑으로 비밀을 드러내라(32-33절)

끝으로 바울은 이 단락을 이렇게 정리한다.

엡 5:32–33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신약에서 ‘비밀’이라 함은 구약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신약에서 드러난 진리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진리가 그렇다. 여기서 바울은 회복해야 할 창조의 질서 중 부부와 결혼에 대한 부분을 말했는데,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관계에 대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역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어떤 것인지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 가운데 이 놀라운 비밀을 드러낼 수 있다.

아내의 복종이 쉬울까, 남편의 사랑이 쉬울까? 반발심은 복종이라는 단어에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이 결코 쉽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결국 둘 다 어려운 일이다. 아직 옛 세상에 살고 있고 옛 성품도 남아있는 우리는 복종하기도 어렵고 사랑하기도 힘들다. 둘 다 ‘나’를 부인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는 ‘상호’의 원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복종하기 쉽다. 반대로 복종하는 아내를 남편은 사랑하기 쉽다. 상대가 한발을 먼저 움직여주기 원하면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움직인다면 선순환이 시작된다.

남편이든 아내든, 둘은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된 사람임을 기억하라. 내가 더 사랑한다고 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인다고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적군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기고 지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종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자. 그것이 우리의 결혼이다.

도전

이 말씀을 듣는 대부분은 성경의 결혼에 대한 원리에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져야할 질문은 좀 더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한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의도하신 결혼의 질서를 회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놀라운 연합의 비밀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과 싸워야한다. 하지만 세상에 대하여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설득력 있는 우리의 삶일 것이다. 교회나 세상이나 결혼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우리의 말, 즉 우리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진리는 힘을 잃고 만다.

결혼을 생각하는 청년들이 세상과 똑같은 기준에 더하여 믿음을 가졌는지만 본다면 어떨까? 세상과 교회 안의 부부의 이혼율에 별반 다르지 않다면 어떨까? 크리스천 부부들이 똑같이 독박 육아를 말하고 세상적 커리어의 성공만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세상의 부부들보다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세상이 우리가 옳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최소한 우리가 다르다고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무엇이 좋은지 그리고 옳은지를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세상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당신의 결혼 혹은 당신이 꿈꾸는 결혼은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기 원하는가? 우리도 알콩달콩 재밌게 산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스러운 연합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우리의 결혼 안에서 먼저 바로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