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결혼 언약을 지키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14절

설교자 : 최종혁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이라고 불리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손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고통 당하는 그들을 구원하심으로서 그 사실을 증명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알게 하셨다.

출 6:6-7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이렇게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으로 이끄시고 그곳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그들과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셨다. 언약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식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첫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였다(출 20:3). 이 언약은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사랑의 관계에 다른 무엇이 끼어들어서는 안되었다. 이어지는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는데(출 20:4), 이는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만들어서 사랑하면 안된다는 의미다. 즉, 1, 2계명은 하나님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섬길 것을 분명히 한다.

3계명에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였다(출 20:7).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따라서 하나님 자체를 의미한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아무 것도 아닌 분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 이 명령의 의미다. 하나님으 백성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드러낸다. 따라서 말에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이것이 3계명의 의미다.

그리고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였다(출 20:8). 이 명령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참된 쉼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의미였다.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다가 하루만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다.

이렇게 4계명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개인 간의 수직적인 관계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5계명부터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해야하는지를 계명으로 주셨다.

십계명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계명 같은 느낌이 든다면, 아마 5계명부터는 보편적인 도덕 규범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마치 전혀 관계가 없는 명령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기초 위에 놓여 있는 계명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 그저 보편적인 도덕 규범 같아 보이는 계명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빼면 이런 보편적인 도덕 규범은 의미가 없어진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해야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는 뭘까? 사실 과거에는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질문도 잘 하지 않던 이런 부분에 대해, 점점 하나님 없는 사회를 발전시켜 가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각각 다른 답을 찾고 있다. 그래서 점점 보편적인 도덕 규범, 다르게 말해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라는 것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사회적 합의’ 혹은 ‘공감대’만 생기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 사회가 과거에 비해 도덕적으로 더 나아진 면도 분명히 있다. 그런 면에 있어 우리는 감사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 모순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인권을 말하면서 낙태나 자살을 지지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이 땅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그냥 착하고 좋은 시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5계명부터 나머지 십계명이 바로 그런 삶에 대해서 말한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삶을 살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하셔서 세상 가운에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보여주신다.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다(출 20:12). 하나님은 사람이 처음 만나는 이웃인 부모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 공경하기를 배울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하나님은 5계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어떠냐에 관계없이 우리는 5계명에 순종해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다.

그리고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였다(출 20:12). 이 명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의미였다. 사람의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그가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서 생명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장애가 있든 없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나이이든,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든 이제 무덤에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이 6계명의 근본적인 의미였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존중할 자를 존중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할 도덕률이나 법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에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도덕 규범이고 우리가 따라야할 명령이다. 특히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야했듯이, 오늘날 새언약의 백성인 교회는 더욱 이런 명령에 순종하여 세상 가운데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선포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와 똑같은 논리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제 7계명에도 적용된다.

“간음하지 말라”(출 20:14)

 

명령의 의미

성경은 여러 종류의 성적인 부도덕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이슈가 되는 동성애나, 매춘, 근친상간, 수간 등의 성적인 부도덕은 율법에서도 명백하게 금지한다. 그런데 십계명의 제 7계명은 그 중에서 정확하게는 “간통”을 금한다. 우리말의 “간음”도 주로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간통”을 의미하지만 간통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간음하지 말라”보다는 “간통하지 말라”가 더 정확한 번역이고 명령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더 와닿는 표현은 “바람 피지 말라”나 “불륜을 저지르지 말라”일 것이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명령이 간통 외의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명령은 일차적으로 결혼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먼저 성경이 결혼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혼의 정의

결혼에 대해서 많은 낭만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되고 힘든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해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결혼은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제정하신 제도라는 것이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은 아닐 테니, 남자만 창조되었던 때는 아직 하나님의 사람 창조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였다. 다만 하나님은 그 둘을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셨고 일부러 시간차를 두시고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창조하셨고 그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함을 아셨다. 그런데, 바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흙으로 지은 동물들을 그 앞으로 이끌어 오셨다.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남자는 그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주권자로서의 특권에 해당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어떤 동물도 남자의 돕는 배필, 즉 짝은 아니었음을 남자는 알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남자를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그를 남자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그가 여느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시를 지어 노래하면서,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짝임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결혼이며 결혼의 원리가 그 안에 있음을 성경은 말한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즉, 두 사람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결혼이다.

사람에 남녀가 있는 것은 동물에 암컷과 수컷이 있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그저 자손만 낳게 하신 것이 아니라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 만약 어떻게든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한 사람씩만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 두 사람을 굳이 한 몸이 되게 하실 필요도 없었다. 인간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자식이 중요한 경우 일대일의 부부관계보다는 일부다처제가 용인되고 선호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을 돕는 배필은 하나로 정하셨고 그 둘이 평생의 짝이 되게 하셨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일부다처제가 용인되었음을 볼 수 있지만, 단한번도 성경은 그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그리고 유일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제한되는 사랑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로맨틱한 감정의 관계나, 서로 자기 유익을 얻으려는 계약의 관계가 아니라, 언약의 관계다.

여기서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이는 영구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파기될 수 없는 것이다. 물리적인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인 결합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9:6). 깨지지 않는 관계이고 그 기초에는 서로에 대한 약속, 언약이 있다.

말 2: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무슨 언약일까? 간단히 말하면 상대방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이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됨을 위하여 노력하고 결혼 관계 안에서 자기 역할에 충성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최근 참석했던 어떤 결혼식에서 들었던 혼인 서약의 내용이 이와 달라서 개인적으로 놀랐던 적이 있는데, 언약보다는 계약 같은 느낌이 더 들어서 그랬다. 상대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바라는 것이나,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할게라는 것은 제대로된 결혼 언약이라고 할 수 없다. 스스로 기꺼이 배우자만을 사랑하겠다고 자신을 묶어두는 것, 구속하는 것이 결혼 언약이다. 그리고 그것을 승인하고 보증하는 것이 바로 두 사람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성적인 결합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모습이다.

결혼의 목적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결혼을 이렇게 제정하셨을까? 그 의도는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결혼을 그렇게 제정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만드셨는데, 똑같은 사람을 한 명 더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드시고 둘이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게 하셨다. 그렇게 남과 여가 하나가 되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즐거움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게 하신 것이다. 물론 신약에서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독신으로 살도록 하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으로 보는 것이 맞다. 보편적으로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과 행복의 연관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결혼의 가이드라인에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 따뜻한 커피와 빵을 준비해주는 상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정상이다. 서로가 해주기만 바라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니 기대가 충족될 수 없고 당연히 결혼이라는 것은 자유와 행복은 없고 책임과 의무만 남는 일이 된다. 결혼이 언약의 관계라는 것은 사랑 받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럴 때 우리는 서로 진정한 사랑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남녀가 결혼 관계 안에서 그렇게 독점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결혼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언약의 관계인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혼인 서약과 같다. 언약이나 율법 같은 단어를 들으면 뭔가 감정은 완전히 배재가 된 순전히 비즈니스적인 계약 관계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로 공식적으로 엄중하게 언약한 관계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간음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렘 3:1-10; 호 1-3장; 말 2:10-16 등). 특히 호세아의 경우 하나님은 이 연관 관계를 선명하고 극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을 주시기까지 했다.

신약에 와서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에 대해 말하면서 계속해서 둘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읽다보면, 바울이 지금 원래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건지 아니면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건지가 헤깔릴 정도다.

엡 5:31-32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랑의 언약의 관계 위에 부부가 하나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즉, 여러분이 여러분을 잘 아는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지에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여러분 제가 제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아시죠? 예수님은 그보다 더 놀라운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결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결혼을 제정하셨다.

제 7계명의 의미

결혼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십계명의 제 7계명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간음하지 말라” 혹은 “간통하지 말라”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결혼의 근간이 되는 결혼 언약을 지키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죽음을 제외하고 예수님은 아내를 버릴 수 있는, 다르게 말하면 결혼 언약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사유로서 음행을 언급하셨다. 왜일까? 음행이 다른 죄보다 더 끔찍하고 심각한 죄이기 때문일까? 물론 실제로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음행 자체가 결혼 언약을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혼의 사유가 되는 것이다. 한 사람에 의해 언약이 깨졌다면 다른 한 사람에게 그 언약을 지켜야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언약이 깨지지 않았는데 이혼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혼이 아니다. 그 둘의 결혼 언약은 여전히 유효한 언약이어서 그 상태로 재혼을 하는 것은 간음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만큼 결혼 언약은 중요하고 철회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법에 따라 어떻게 서류를 처리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

결혼 언약이라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자발적인 언약이고 절대 철회될 수 없는 구속력이 있는 언약이다. 따라서 성격 차이라던가 경제적인 이유라던가하는 이유로 이 언약을 파기할 수 없다. 아무리 서로 합의를 보더라도 안된다. 간음이라는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로 인해 언약이 이미 파기되었을 때만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하셨다.

따라서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유일한 이혼의 사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이고,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결혼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명령이다.

캐빈 드영, “이 계명의 목적은 결혼이라는 선물을 안전하게 지켜 주고, 가정의 번영을 돕는 데 있다.”

필립 라이큰, “간략히 말해, 제 7계명은 결혼언약을 침해하는 어떤 성적인 활동도 금한다. 이상 끝! 예외도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명령의 적용

일반적인 적용

그럼 어떤 행위들이 금지될까?

당연히 가장 직접적으로 언약을 깨는 행위인 간통이 금지된다. 배우자와 공유할 수 있는 성적인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누리는 것이 금지된다.

또 더 나아가서 결혼을 했든 안했든, 결혼 언약의 관계 안에서 누려야할 복을 밖에서 누리려는 모든 행위가 금지 된다. 같은 의도의 같은 행위라고 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는 복된 것이 밖으로 나가면 저주받을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결혼 언약 안에 있지 않은 남녀가 마치 결혼 언약 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제 7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특히, 결혼 전에 데이트를 하는 남녀는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한다. 결혼 전에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해요라는 질문은 순수한 지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어디까지 즐길 수 있는가”라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있다. 그런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 자체가 제 7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결혼 언약을 소중히 지키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와 상대방의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결혼 안에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성적인 부도덕함이 이 계명을 범한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관계인 결혼을 무시한채로 개인의 쾌락을 위해 자행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언약과 쾌락을 분리하여 쾌락만 얻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세상이 이런 면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혼전 순결이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던 때가 있었다. 불륜은 말 그대로 불륜이었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둘이 정말 사랑하면” 괜찮은 것으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둘이 정말 사랑하면, 결혼을 하지 않았어도 혹은 결혼을 했어도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괜찮다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경우는 더욱 빠르게 인식이 변했고, 결혼한 경우에도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불륜이 미화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점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오히려 “사랑하지만 않는다면”으로 조건이 바뀌었다. 쿨하지 못하게 사랑 같은 얘기 하지 말고 그냥 즐기기만 하자는 훅업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만연하다. 겉으로 대놓고 얘기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서로 가지고 싶은 것만 갖고 책임은 지지 말자는 합의만 있으면 된다. 언약과 쾌락이 완전히 분리가 된 것이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하나님 없이 발전되어 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이런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져가고 있다. 말하자면 정말 몇 시간을 해도 부족할 정도로 세상은 특히 성적인 타락의 끝을 향해 하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을 기억하고 순종하여 세상 가운데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선포해야 한다.

구체적인 적용

그럼, 이제 실제로 우리가 이 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떻게 결혼 언약을 지킬 수 있을까? 지금까지 들었던 말씀을 통해 개인적으로 충분히 적용할 점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세 가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 말하겠다.

첫째로,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를 유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내 집에 사는 다른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아내나 남편을 동거인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혼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결혼 생활을 한다면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다.

웨인 맥, “결혼은 죽을 때까지 상대방에게 자신의 전인격을 전적으로 헌신(위탁)하는 것이며 상대방과 자신의 전인격을 전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결혼은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으로 배우자와 하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자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짝이다. 결혼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 가운데 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처럼, 배우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한다. 생각을 나누고 감정을 나눠야 한다. 관계적으로도 그렇다. 각자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명해줘도 넌 몰라라는 식의 태도는 버리고 최대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공유해야 한다. 특히 영적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갖고 함께 실천하며 영적으로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의 필요와 관심에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서 서로 피해만 주지 않는 것이 부부가 아니다. 아내나 남편에 대한 일을 남을 통해 듣게 되지 않도록 내가 먼저 하나되기 위해 노력하고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배우자를 유기하지 말라.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 결혼 언약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그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앞서 말한 것처럼 결혼 관계 안에서 누려야할 즐거움을 지금 어떻게든 누려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꼭 육체적인 부분 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성하고만 친하게 지내고 계속해서 따로 만나고 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나의 원함을 채우려는 행동일 수 있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언약과 쾌락을 분리해서 결혼 언약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결혼 한 사람들의 경우도 이 부분에 있어 조심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남에게 질타받을 간음은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 그럴 뿐 실제로는 제 7계명을 어기는 일들을 계속해서 할 수도 있다.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종종 발생하는 일 중에 하나가 상담을 받다가 상담 해주는 이성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는 일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약해진 상태에서 정서적, 관계적 도움이 필요할 때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댔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상담 과정이 아니더라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발생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나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위험이 존재함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 그것을 충족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같은 맥락에서 경건한 아내들이 남편에게서 영적으로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때도 위험성이 커진다. 그럴 때 경건한 아내들이 다른 공급원을 찾다가 유혹에 빠지는 경우들이 많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남편들은 이런 것을 알고 모든 면에서 공급자가 되어야 한다. 영적인 필요의 공급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두지 말고, 함께 채워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한다. 함께 성경을 읽고 신앙 서적을 읽고 배운 것들을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는 않을 수도 있지만, 드라마나 로맨스 소설을 많이 보는 경우, 어쩌면 그런 감정적인 만족을 거기서 찾고 있어서 그럴 수 있다. 그런 것이 누적되면 그런 만족을 주지 못하는 배우자에게서 마음이 멀어진다. 결국 그것이 무엇이든 결혼 관계 안에서 누려야 할 것을 그 밖에서 누리려고 해서는 안되며 또한 배우자가 그런 유혹에 빠지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역할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해당되는 적용인데, 결혼 언약을 지키지 않으려는 모든 쉽고 가볍다고 생각되는 유혹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 십계명의 제 7계명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5:27-28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 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것은 가능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때나 생각할 수 있고 누구에게 들킬 일도 없다. 하나님만 모르신다면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간음하는 것은 어떨까? 훨씬 어려운 일이다. 간음을 하는 것도 어렵고 뒷감당도 어렵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실제로 간음은 하지 않지만 음욕은 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만약 간음하는 것이 음욕을 품는 것만큼 쉬운 일이 된다면 간음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과거에 음란물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을 빌린다던가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서 다른 사람 몰래 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선물 같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든 그런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일부 대담한 사람들만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은 아무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예는 또 있다. 사업차 출장을 간 사람들이 그곳에서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꽤 많다. 환경이 달라지면서 죄의 유혹이 쉽고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왔으니 이곳에서 하는 일이 자기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버려야 한다. 그것은 결국 상황만 괜찮으면 간음도 괜찮다는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잠 6: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쉽고 가벼운 죄는 없다.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죄는 없다. 특히나 성적인 죄는 더욱 그러하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결혼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도전

앞서 읽은 예수님은 십계명 7계명에 대한 말씀의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이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시는지를 알 수 있다.

마 5:27-30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실제로 눈을 빼거나 손을 자르면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심각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시대가 변했고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도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결혼 언약을 지키는 일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중 누구도 제 7계명의 정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누구도 제 7계명의 정죄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자유롭다. 하지만 그 정죄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다시 그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죄인들로서 다시 그 죄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너무 오래전에 해서 기억이 않나든, 결혼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라.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과 싸우라. 그 안에 우리의 행복이 있고, 그럴 때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이 세상에 바르게 선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