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 – 9절
설교자: 조정의
축구와 같은 팀 스포츠에서 개인 기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팀워크다. 그래서 종종 팀 전체 연봉이 상대 팀 스타 플레이어 한 사람 연봉에 못 미치는데도 두 팀이 경기해서 상식을 벗어나는 결과를 낼 때가 있다.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상식은 같은 팀 안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동역이기 때문이다. 교회 사역을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개인 경기가 아니라 분명 팀 경기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성도가 무엇으로 섬기든 서로 경쟁하려고 하면 안 되고 동역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육신적인 성도는 주님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관점으로 시기와 분쟁을 일으킨다. 신령한 성도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동역을 위해 힘쓴다.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려면 개인의 활약이 아니라 팀워크가 뛰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의 사역이나 사역을 담당하는 일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관점이 무척 중요하다. 육신의 관점을 가지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시기와 분쟁을 일으킬 것이고, 영적인 관점을 가지면 함께 기쁨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영적인 관점을 가진 자가 되어 무슨 일을 하든지 원망과 시비 없이, 함께 동역하는 자로서 교회를 세워 가도록 하자.
1. 육의 사람이 하는 일: 분쟁(1-4절)
다시 고린도 교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바울은 “형제들아”라는 친밀한 표현으로 성도들을 불렀다. 날마다 바울 속에 눌리는 염려를 끼치고 있는 교회라고 해도(고후 11:28),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셔서 자기 피로 사신 형제자매들이 아닌가! 사랑해서 애타는 마음으로 바울은 그들을 책망했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1절). 앞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로 생각/판단하고 살아가는 자를 가리켜 신령한 자라고 했고, 영적인 관점으로 분별할 줄 아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2:15). 하지만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는 육신에 속한 자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고 있었다. 세상의 지혜와 세상에 속한 가치관으로 분별했다. 바울은 여기서 신중하게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이라는 ‘성령이 거하지 않는 죄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2:14; 롬 8:9),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스) 즉 구원은 받았으나(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 같은 성도의 상태를 지적한다. 그들은 젖먹이 어린 아이들 같았고, 그래서 바울의 판단을 받아 마땅했다.
부모가 보기에 젖먹이 어린 아이가 얼마나 더디 자라는 것 같은가?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아이가 달라 보일 정도로 성장한 것을 보고 놀란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서 만난 아이가 거의 성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픈가? 수년 뒤 고린도 교회 소식을 들은 바울도 그랬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2절).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심었을 때 고린도 교회는 태어났다. 바울은 어머니가 자기가 배아파 낳은 아이를 가슴에 밀착시켜 사랑과 정성으로 수고하여 때마다 먹이듯 갓 태어난 그들을 먹였다(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그때 그들을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다고 말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과 지혜의 수준을 나누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 바울은 그들 가운데 있었을 때나 지금도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만 알기로 굳게 작정했다.
젖과 밥의 차이는 주는 자가 무얼 주느냐가 아니라 받아 먹는 자가 얼마나 잘 받고 소화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2-14).
밥처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의 특징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연단된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안다는 데 있다(우리말 성경). 복음이 그들 삶에 실질적인 가치 기준이 되고 분별의 능력을 제공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바르게 판단하고 적용하는 자다. 반대로 어린아이는 복음을 믿어 거듭나긴 했지만, 그 복음의 말씀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자다. 고린도 교회가 갓 태어났을 때 바로 그런 상태였는데, 수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도 못하리라(2절).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질책했다(3절).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 곧 영적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은 태도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각각 교회의 인도자들 곧 바울과 아볼로를 앞세워 파벌싸움을 벌이는 것이었고, 이는 신령한 자가 아니라 분명 육의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4절). 고린도 교회는 분명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지만(1:7), 은사의 풍부함과 영적 성숙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설교자도 헌신적인 봉사자도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 수 있다!
시기는 아주 지독한 이기심을 가리킨다. 어린아이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도 교회 안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에서 무엇으로 섬기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성도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드러나고 인정받기를 (은근히) 원한다. 일과 사람을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차등하여 평가한다. 나 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꾼)이 하는 일은 더 중요하고 가치 있고 유익하다. 상대적으로 덜 선호하는 사람(일꾼)이나 일은 덜 중요하고 가치나 유익 면에 있어서도 떨어진다고 본다. 그렇게 육신적인 관점으로 섬기면, 반드시 교회 가운데 분쟁이 생긴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 많은 섬김이 있어도 교회는 세워지지 않는다.
2. 신령한 자가 하는 일: 동역(5-9절)
이제 바울은 신령한 자의 관점으로 사역을 바라보게 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절). 먼저,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역자가 단순히 주님께서 각각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디아코노스: 식탁봉사). 고린도 교회가 주님을 믿게 하는 일에 바울과 아볼로는 각각 맡겨진 일이(주신 대로) 있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6절). 둘다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심지 않고 물을 주거나, 심었지만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은 자라기 매우 힘들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하신 일을 농사에 비유하고 있다. 9절에서 밝힌 것처럼 이 농사의 비유에서 너희 곧 고린도 교회는 경작 중인 하나님의 밭이고, 우리 즉 바울과 아볼로처럼 그들 가운데 복음 사역을 맡은 일꾼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기 때문에 동역자로 불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 곧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고귀한 일을 맡아 충성하는 종이라서 동역자로 불린 것이다(질그릇 가운데 보배, 고후 4:7). 그중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고(심는 일), 아볼로는 그 결실로 태어난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을 했다(물을 주는 일).
신령한 자는 주께서 맡기신 모든 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사소한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일에 함께하는 동역자가 아닌가!(“과자를 굽는 것”, 대상 23:29). 하지만 신령한 자는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자와 하나님의 자리를 절대 혼동하지 않는다. 누군가(혹은 자신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일을 해도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종에 불과하다. 모든 영광은 실제 역사를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바울과 아볼로 모두 탁월한 전도자와 교사였고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오직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6절). 바울은 다시 한번 이 분명한 원리를 강조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7절).
신령한 자로서 동역하는 본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 자신이다. 그는 로마 감옥에 매였을 때,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다수의 형제들 소식을 들었다. 순수하지 못하게 시기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역겨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반응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이것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가 갖는 자세다. 자기 이름이 드러나거나 자신이 한 일이 인정받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다른 성도가 나를 시기 나게 하려는 잘못된 의도로 일하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셔서 열매를 거두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다. 나는 다만 내게 맡기신 일에 충성할 따름이다.
신령한 자는 또한 세속적인 관점으로 사역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8절). 각각 맡기신 일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점에서 같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은 하찮은 것이 없다. 모두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령한 자는 다른 성도와 경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8절). 우리는 하나의 상을 누가 받을 것인지 경쟁하기 위해 각각 교회에서 맡은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팀으로 동역하면서, 각각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하여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 그분이 맡기신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여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고 은혜로운 상으로 그분께 영광 돌리면 된다.
구약 시대 성전에서 섬기는 일이 참 다양하고 많았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에서 섬기는 일도 그렇다. 목사, 집사와 같은 직분이나 교사와 악기 연주자 등 눈에 잘 띄는 은사도 있지만, 섬기는 일, 봉사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위로하는 일 등도 교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꼭 필요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물론 과자 굽는 일과 밥 짓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설거지도). 은사를 받지 않은 성도는 없다. 주님은 모든 성도에게 일을 주셨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밭에서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일에 충성하라. 만일 당신이 무슨 일이든 맡아서 하고 있다면, 육의 사람이 하듯 하지 말고 신령한 자처럼 일하라. 구체적인 체크 리스트로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일하는지 점검해 보라.
-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고귀하게 여기며 일하고 있는가?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보시기 때문에, 성도를 위해 하는 모든 봉사가 주님을 위한 것이다. 주님을 위한 모든 일은 다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냉수 한 그릇). 또한 주님을 위한 모든 일은 자발적인 기쁨에서 우러난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 영원토록 사모하는 분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주님을 위한 일은 의무인가 아니면 특권인가?
- 당신은 무엇을 하든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가? 진정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성도가 유익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가?
- 당신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불평하고 실망하는가? 아니면 주가 아시고 보상하실 것을 믿으며 기뻐하는가?
- 당신은 다른 성도가 인정받을 때, 시기하는가 아니면 그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성도가 유익을 얻는 것으로 기뻐하고 또 감사하는가?
- 당신은 다른 성도가 하고 있는 일에 충분히 감사하는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성도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가? 혹은 반대로 당신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며 억지로 불만에 차서 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경고한다(갈 5:15). 시기와 다툼으로 일하는 교회는 아무리 탁월한 은사, 풍족한 사역이 있어도 자멸하는 교회다.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성도가 없어도, 플레이가 화려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으로 동역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신령한 자들의 모임, 참 교회다. 함께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신령한 자가 되어 함께 지어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