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
4.아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본문 : 에베소서 5장 22절~33절
설교자 : 조 정 의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가 언약의 관계 안에서 신뢰와 책임이 따르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생육 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채우기 위해 시작됐다.
하지만 사탄은 하나님 세우신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원했고 먼 저 가정을 공격했다. 하와를 시작으로 아담이 범죄하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도 죄로 물들었으며 만물이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약 속하셨고 하나님의 때에 그 약속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그 가정의 자녀를 구원하시며 곧 만물을 탄식에서 건져내시고 영원히 새롭게 하실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에 여전히 반대하며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 구원받은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형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막는다. 여전히 사탄은 거짓으로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 1) ‘결 혼이 내 행복을 위한 것이다’, 2) ‘부부는 결국 남이다’, 3) ‘남편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 아내에게 하는 맞춤 거짓말도 있다.
1. ‘아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거짓말
남편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내는 특별히 더 ‘사랑’을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보통 남편은 그렇게까지 확인하려 하지 않지만, 아내 는 ‘나 사랑해? 얼마나 사랑해?’라고 계속 확인한다. ‘내가 사랑하 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라는 질 문에 대개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여자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사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주겠다는 서약을 신실하게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 배우자에게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생활이 힘들고 때로 극한의 위기에 봉착하는 건 전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나를 대할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나에게 무관심하고 배려가 없고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어?’ 사랑을 주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남편이 그 사랑을 주지 않을 때 약속한 대로 요구할 권리가 아내에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탄은 아내에게 속삭인다. ‘이런 대우 받고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남편 믿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사랑받지 못하는 네가 얼마나 불쌍하니?’ ‘남편이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행하는 걸 보면 절대로 너를 사랑하지 않는게 분명해, 너는 사랑을 정당히 요구할 수 있어’ 사탄의 거짓에 속으면 아내는 분노와 원망에 휩싸이거나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남편에게 육신이 원하는 대로 불화살을 쏘아댈 수도 있고 반대로 입을 닫고 남편과 정서적인 거리를 둔 채 고립된 감정의 늪에 빠져들어 간다. 공격적인 반응 혹은 수동 적인 반응 모두 ‘나에게 합당한 사랑을 내놓으라’는 시위이다.
그런데, ‘아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은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이유에서 분명한 거짓말이다.
첫째, 성경은 아내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아내들이여” 이후에 아내에게 주어진 명령은 분명하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4절). “아내도 자기 남 편을 존경하라”(33절). 사랑을 요구하라는 명령은 없다.
사랑을 많이 주는 남편만 존경하고 복종하라고 했나? 그렇지 않다. 본문엔 조건이 없고 오히려 ‘범사에 복종하라’는 일방적인 명 령이 내려졌다. 사도 베드로 역시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 종하라”고 명령하면서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이유를 제시했다(벧전 3:1). 믿지 않는 남편 곧 말 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도 아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핑계가 될 수 없다(선하고 관용하는 자 vs. 까다로운 자의 대 조, 18절). 베드로는 아내가 따를 본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예로 들었 는데,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기 목 숨을 보전하려 했던 남편이다. 아내가 보기에 얼마나 실망스러운 가? 정이 뚝 떨어질 정도로 사랑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했다(벧전 3:6). 남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아내는 “선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랑받을 권리를 주장하라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제자는 권리를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모든 제자에게 요구하셨다(마 16:24). 모든 권리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놓을 각오를 하는 아내는 결혼생활 가운데 남편에게 마땅히 내가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랑을 내놓으라고 주장할 수 없다. 본문도 그런 맥락.
셋째,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을 망치는 것이다. 결혼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정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드높이는 결혼 안에서 우리는 가장 큰 행복을 누린다. 그것이 하나님 제정하신 결혼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가? 남편과 아내가 각자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을 나타냄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에게 명령할 때 그냥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라 24절을 보면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라고 명령한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기 때문이다(23절).
그리스도인은 때로 욥처럼 삶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만난다. 그때도 우리는 세상 가운데 우리 하나님이 선하고 인자하고 사랑 많은 전능자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주권을 인정하고 선하심을 믿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이 어떠하든지 세상 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복종하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혼 안에서 아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 는 방식이다. <래디컬> 저자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카운터컬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을 존경하지 않으면 세상을 향해 교 회는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남편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에 대고 그리스도는 좋을 가치가 없는 존 재라고 외치는 꼴이다. 남편을 두고 한눈을 판다면 그리스도는 그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셈이 다”(210p).
물론 남편은 예수님처럼 완벽한 사랑을 아내에게 공급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가정 안에서 맡은 역할이 달라 지진 않는다. 아내는 남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 주신 자 기 역할에 충성하여 이 땅에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나타낼 책임이 있다. 사랑을 강요하는 방식으론 안 된다.
2. ‘아내는 존중할 책임이 있다’라는 진리
성경은 아내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자기 권리와 목숨까지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주를 따르는 아내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건 합당치 않다. 남편의 사랑이 부족하고 심지어 완악하더라도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여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 마나 사랑하는지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아내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일까?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는 제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남편의 사랑과 관계없이 신부인 교회의 신랑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일까?
첫째, 희생적으로 존경하라. 본문은 33절에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명령한다.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는 이유는 남편의 어떠함과 관계없다. 23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물론 머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남편을 존경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못난 머리도 머리 임에는 틀림없다. 기능이 떨어지는 머리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본문과 유사한 가르침을 주면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말했다 (골 3:18). 주 안에서 합당한 일. 주가 기뻐하시는 일. 주가 그렇게 요구하시고 기대하는 일이 아내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가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고 권위를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의 말, 태도, 몸짓, 행동에 합당한 존경이 담겨 있도록 하라.
둘째, 자발적으로 순종하라. 본문이 여러 번 강조하는 명령은 “순종하라”이다(22, 24절). ‘순종’과 ‘복종’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순종’은 자발적인 특성을 갖는다. 억지로, 할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진심으로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순종 이다. 그러므로 행동뿐만 아니라 태도나 자세, 감정도 따라온다.
성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라고 요구하는데, 이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예외라고 봐야 한다. 순종이라고 하여 아 내는 열등하고 의견도 낼 수 없고 무조건 굽신거리면서 복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선한 남편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리더가 되어 아내의 필요를 잘 듣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선택하고 아내가 순종하도록 기다려주고 잘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요구하지 않을 때, 내가 원 하는 것과 다른 것을 요구할 때도 아내는 주께 하듯 기쁨으로 순종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남편 위에 두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두신 하나님의 역할에 기쁨으로 순종 하기 위해서 그리해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다고 말했다(벧전 3:5). 남편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인을 세상에서 아름답게 만드는 메이크업이다.
셋째, 돕는 배필이 되어라. 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돕는 배필로 그의 아내 하와를 지어 온전하게 하신 것처럼(창 2:18),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남편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온전히 이루는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창세기 말 씀(31절)을 인용하면서 두 사람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을 큰 비 밀이라고 했다(32절). 한 육체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아내가 해야 할 일이 “자기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다(33절).
그러므로 아내는 자신의 주요 사역지가 남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똑똑하고 일 잘하고 훌륭한 인 물로 평가받아도 가정 안에서 남편을 돕는 배필로 거의 일하지 않거나 기가 세고 자기 고집이 세며 순응하기보다 반항적이라 오히려 남편이 아내 눈치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그 집의 실세는 아내라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남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주라. 남편이 자기 역할에 충성하지 못할 때라도 나머지 반쪽으로서 남편을 세워주고 가정을 돌보고 적이 아니라 한 팀으로서 돕는 배필 역할을 다하라. 모든 리더가 그렇지만 가정의 리더 자리는 외롭고 무겁고 힘든 자리다. 아내만큼은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 주고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
3. 진리를 따를 때 사랑받는다
평소에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으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남편의 부족함을 온전히 채우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이 악하게 행할 때 혹은 사랑 없는 태도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하게 할 때 그때 진리를 따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사탄은 그때를 노리고 ‘넌 이보다 더 나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어’라고 속 삭인다.
버럭 화를 내든지 눈물로 원망을 쏟아내든지 침묵하며 냉전을 선언하든지 우울감에 빠져 남편과 잠시 단절되든지 여러 가지 사탄의 거짓에 속아 육신이 원하는대로 반응할 때 아내가 원하는 참 사랑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아내가 간절히 원하는 그 사랑은 반대로 진리를 따를 때만 얻을 수 있다. 중세시대 유명한 교부 어 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해 아들 어거스틴은 이렇게 회상했 다.
“어머니는 결혼 생활에 불성실한 남편을 인내했으며, 그것 때문 에 결코 남편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초지일관 믿음 가 운데 남편을 위해 주님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도 아내인 어머니를 품위 있게 대했습니다. 아버지가 어쩌다 화를 내는 일이 있어도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았고 대항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화가 진정된 후에야 비로소 조용히 잘잘못을 가렸습니다.
온순한 남편들과 결혼한 여인들이 이따금 매를 맞아 멍이든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남편을 욕하면 어머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녀들의 잘못을 꼬집어 충고했다고 합니다. ‘결 혼 서약이 끝나는 순간부터 여자들은 스스로 남편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는 문서를 받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주인을 거스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다혈질인 남편과 살았지만 한번도 매를 맞은 적이 없 습니다. 불화로 집안이 시끄러운 적도 없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남편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남편을 싫어하 는 얼굴빛을 본적도 없습니다. 여인들이 어머니의 순탄한 가정 생활과 인내의 비결을 물으면, 어머니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은 자 신의 소신을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상담한 후 그대로 실천한 여자들은 좋은 결과를 얻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계속 고통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참회록>, 179- 180pp).
모니카의 남편은 후에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아들은 교회를 여러 이단에서 보호한 훌륭한 주님의 일꾼으로 자랐다. 아들이 회상하는 엄마의 아내로서 모습이 이와 같았고, 하나님은 모니카와 그녀의 조언대로 성경적인 아내의 역할에 충성한 이들의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셨다. 참 사랑을 받게 하셨고 구원의 역사가 남편과 자녀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하셨다.
참 사랑은 죄 많은 남편이 결코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참 신랑이신 예수님만이 보장하신다. 그분은 이미 당신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고 당신의 모든 연약함, 부족함을 거룩하게 씻어 영광스럽게 하실 때까지 신실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 주님 사랑이 당신이 남편을 사랑 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이자 끝없는 원동력이다. 그 영혼에 주님의 사랑이 불타오르지 않는 사람은 남편을 희생적으로 존경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면서 돕는 배필로 사랑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사랑으로 온전히 만족하라. 영원한 당신의 신랑의 사랑으로 항상 당신의 마음을 채우라. 그리고 남편에게 그런 사랑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말라. 남편 사랑을 조건으로 걸고 당신의 역할을 할지 말지 결정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족하여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남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에게 존경과 사랑과 순종으로 신실하게 대하라. 그런 아내에게 하나님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사랑을 부어주시고 육신의 남편을 통해서도 사랑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결혼을 위해 기도하는 형제들은 외모나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부를 신부로 맞아라.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지혜로운 신부는 진주보다 귀하다(잠 31:10). 현숙한 아내를 얻는 것은 여호와의 은총과 복을 얻는 것이다(잠 18:22). 미혼 자매들은 그런 아내가 될 준비를 하고, 홀로 된 자매들은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부인 교회로서 성도를 사랑하며 하늘나라 혼인 잔치를 예비하자.
가정에 관한 이 시리즈 말씀을 “사탄의 거짓말”이란 주제로 묶은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이 제정하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풍성히 누리는 기독교 가정이 드물기 때문이다. 마귀는 때론 위력이 조금도 없는 상상 속 원수 같지만 그리스도인 가정마다 갈등과 전쟁과 불만족이 쉬지 않고 일어나 상처와 쓴 뿌리로 곪아 터지는 걸 보면 사탄이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며 발악하는 것이 분명하다. 거짓에 속지 말자. 진리로 무장하자. 성령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당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시고 넉넉히 사탄을 이기고 물리치게 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