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 누가복음 18장 18~30절
설교자: 조정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문경에서 열린 전국 장로 수양회에 잘 다녀왔습니다. 각 교회의 장로와 그 아내가 약 297명 참석했습니다. 이번 집회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도 참석했는데, “홀사모”라고 불리는 자매님들이었습니다. 홀사모는 “홀로 사는 사역자의 아내들 모임”으로 장로일 하던 남편을 먼저 주님께 보낸 분들입니다. 그중 어떤 분은 37세에 남편이 소천하여 50년 이상 홀로 삶을 살아온 분도 있었습니다.

홀사모 자매님들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삶을 바친 남편을 하나님이 데려 가셨을 때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극심했을까? 주 안에 소망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 슬픔을 이렇게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 겪는 모든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떤 소망을 품을 수 있을까?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 영혼을 무엇으로 채울까?

홀사모 자매님들 소개가 끝나고 사회를 본 형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을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것도 애굽의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은 그를 보며, 얼마나 놀라고 기뻤을까요? 주 안에 영생의 소망을 가진 홀사모 자매님들도 그날에 먼저 간 형제님들을 다시 만날 때 주님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힌 남편들을 다시 만나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가진 자의 기쁨이며 소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영생을 가진 자, 그는 부활을 소망합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 속에서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능력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영원히 솟아나 현세뿐 아니라 내세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생을 여러분도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기 원한 “어떤 관리”를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절)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은 질문을 하기 원합니다. 영생이 없는 삶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없는 삶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춰볼 때 헛되고 헛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그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얻으시기 원합니다. 이미 영생을 얻으신 분들도 이 영생을 확실히 붙잡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1. 질문(18절)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은 청년이었습니다(마 19:20). 그는 재물이 많은 큰 부자였습니다(눅 18:23). 그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 중 하나로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를 “관리”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은 좀 전에 누가가 기록한 대상인 “어린 아기”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기는 돈도 없고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는데 지금 예수님 가까이 나온 이 관리는 부하고 능력 있고 사회적 영향력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비꼬아 놀리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예수님을 비꼬았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10장 17절에 따르면 이 젊은 관리는 예수님이 길에 나가실 때 달려와서 무릎을 꿇어앉아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예의 있게 높여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예수님이 알려주실 수 있을까 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2.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19-20절)

예수님은 부자 관리가 예의상 높여 부른 그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절)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의 있게 예수님을 높여 부른 부자 관리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질문입니다. 마치 누군가 제게 “착한 목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는데, 제가 “착하다니요, 착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안하겠죠?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바르게 알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하고 선한 선생이 아니라 홀로 선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영생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가르치셨을 때, 많은 제자들과 군중이 그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걸림이 되어 도저히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예수님은 지금 부자 관리에게 같은 반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가 대화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고 있는지, 그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관리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관리의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였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얼 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얼 해야 하는지 설명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절)

예수님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계명의 후반부인 5번에서 9번까지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전반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예수님이 지금 인용하신 후반부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된 법입니다. 여러분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것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특히 어려서부터 교회 나와 계명을 배웠던 학생들, 청년들 어떻습니까?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증언, 부모 공경, 어려서부터 잘 지켜온 것 아닌가요?

3. 관리의 대답(21절)

부자 관리에게도 십계명은 어려서부터 익숙한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보통 어렸을 때부터 구약성경으로 교육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지도자급에 있었습니다. 계명을 잘 따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본이 될 정도였습니다. “늘 해왔던 그것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라면 저는 충분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관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절)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

부자 관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미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영생, 즉 새롭고, 신선하고, 타락, 부패, 슬픔, 고통, 두려움, 죽음에서 자유로운 삶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톰 라이트, 308-9).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이죠. 하나님의 능력이 영원히 함께 하는 삶, 이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했지만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4. 예수님의 처방(22절)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2절)

부자 관리가 영생을 얻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가지를 채우면 영생을 얻는 데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하면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부자 관리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사실 그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십계명의 일부를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말하는 것 자체도 교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다(요일 3:15). 간음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죄다(마 5:28). 이런 식으로 그 높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 그가 사실 철저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기보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있어 이는 치명적인 장애물입니다.

영생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얼마나 잘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그 하나님을 믿고 겸손히 따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 관리가 섬기는 신이 재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의 시간과 생각, 정력과 헌신을 바치는 대상인 재물, 그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바클레이, 313).

예수님은 단지 재물을 다 팔아 구제활동을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22절을 자세히 보시면 뒤이어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부자 관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재물에 끌려다니는 삶에서 해방되어 영생의 말씀인 주를 따르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네가 섬기는 신, 재물을 네 삶에서 몰아내고, 나를 섬기라. 그러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영생과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내가 주리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섬기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그 발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생명 되신 그분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5. 부자의 반응(23절)

부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많은 재물이 그를 망설이게 했습니다. 마가는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말합니다(막 10:22). 그는 간절히 영생을 얻고 싶었지만, 그것을 위해 자기 재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6. 예수님의 교훈(24~2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러 보셨습니다(막 10:23).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절)

당시 유대인들에게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부유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늘귀가 예루살렘에 있던 작은 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선박을 묶는 밧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낙타가 바늘을 통과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가진 재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립니다. 그의 부가 그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순전히 믿고 겸손히 그분 앞에 나오는 일에 재물은 아주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26절). 마가는 그들이 서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재물을 받은 자도 구원을 받기 이렇게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이것은 진리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어도 그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재물이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자식사랑이 내 마음 중심을 차지하여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내 안락과 평안함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을 자리에서 몰아냅니다. 권력과 지위가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되어 나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마땅히 믿음과 겸손을 갖추어야 하지만 재물, 자식, 부모, 권력, 지위 등을 통해 교만과 불신이 내 마음을 딱딱하게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교만을 낮추시고, 불신을 제거하십니다. 부드러운 마음, 낮아진 마음,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을 우리 안에 넣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또 다른 부자 관리가 밤에 몰래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였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께서 더러운 영혼을 물로 씻듯 깨끗이 씻으시고 그 능력의 영인 성령을 주신 자,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요 3:16).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요 3:15).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만 믿는 자입니다. 재물이 그 자리에 함께 올 수 없습니다. 건강이 예수와 함께 올 수 없습니다. 지위와 권력을 함께 움켜쥘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는 자, 그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주저합니다. 예수를 온전히 얻기 위해 다른 것에서 손을 놓으면 왠지 손해 볼 것 같습니다. 미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땅에서 손해보고 죽고 나도 아무 것도 없는 망한 삶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열두 제자와 우리를 대신하여 이렇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7.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28-30절)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절)

마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추가로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고(마 4:22), 베드로 역시 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눅 5:11). 마태는 세리 일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떠나 예수를 따랐습니다(마 9:9).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눅 14:26).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연을 끊고 자식을 호적에서 파고 재물을 다 팔고 자살해야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귀히 여기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는 자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마태 등 주의 열한 제자가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이 진정한 보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강조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29-30절)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을 희생하고, 가족이 당하는 어려움을 참아내고, 희생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여러 배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가는 현세에 백배의 보상을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말합니다(막 10:30).

가장 귀한 주를 따르기 위해 덜 귀한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자, 그에게 고난이 있겠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축복과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가운데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분이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영생을 얻기 위해 여러분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마음을 독차지 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것을 하나님께 제거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여러분의 중심을 차지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부자 관리처럼 예수보다 귀하게 여기는 다른 어떤 이유로 근심하며 슬퍼하고 이 자리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우리가 그 증인입니다. 예수보다 귀한 분이 없습니다.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셨을 때부터 참된 삶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십시오. 절대 후회가 없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 가운에 이미 영생을 얻으신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주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감히 그것을 버리십시오. 그것이 가족이든, 개인의 바람이나 목표든, 사소한 취미든, 그 무엇이든지 주를 따르는 일에 버리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이라면 과감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축복을 여러분 삶에 가득 채우기 위해 그 안에 담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내보내시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전 “홀로 사는 사역자의 아내”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엘리엇입니다. 그녀의 남편인 짐 엘리엇은 남미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 발레리가 생후 10개월 되던 날이었습니다.

예수를 섬기다가 자기 목숨을 잃은 남편, 예수를 믿고 따르다가 남편을 잃은 아내…아버지를 잃은 딸… 무슨 유익이 있다고 예수를 더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저 내 공범 수준이라면, 그분은 날 배신하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날 자유롭게 해주셨다.

하나님이 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돕는 보조자 역할이라면 남편의 죽음은 정말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셔서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시는 분이라면 남편의 죽음조차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은혜로운 일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1년간 간호사 훈련을 받고 다시 에콰도르 동부 아우카족 땅에 들어가 남편을 죽인 부족 속에서 살며 선교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녀의 딸 역시 부족과 함게 살았습니다. 여러 해 그녀의 삶을 통해 그곳에 많은 성도가 생겼고 마을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사람이 부족의 첫 목사가 되었고, 남편이 죽은 강에서 그 목사의 손으로 자기 자녀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남편 짐 엘리엇이 죽었을 때 많은 기자들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입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배우고, 훈련하고, 헌신하였지만 가자마자 죽임을 당하다니요…

20대 초반이었던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낭비라니요,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 뿐입니다.”

나중에 발견된 짐 엘리엇의 일기장에는 19살때 그가 쓴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께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이것이 영생의 삶 아닙니까? 완전하고 풍성한 삶, 주님을 닮은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

여러분 모두 영생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자로서 나를 위해 삶을 불태우신 주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 주님과 같이 사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