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율법 사용 설명서

본문: 갈라디아서 3장 15절-25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고 활용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단순해서 배우지 않아도 그냥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단순하지 않아서 배우지 않으면 사용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용설명서인데 요즘은 ‘사용설명서’라는 말을 다양하게 활용하기도 합니다.

몸에 대해서 잘 알아야 건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내몸 사용설명서’라는 것도 있고, ‘주말 사용설명서’, ‘남자 사용설명서’라는 것도 있습니다. 17년 위드바이블 캠프의 주제는 ‘내삶 사용설명서’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들 중에 어떤 것은 잘 몰라서 엉뚱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원래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유익을 다 얻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법을 잘 알고 제대로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어서는 바로 “율법”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오해했고 쉽게 말해 율법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를 따라 의에 이르려는 다른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정말 율법 사용설명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설명하는데 율법과 믿음을 대조하면서 믿음을 먼저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면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이 아닌 믿음을 말씀하셨다고 구약의 말씀, 아브라함을 통해서 논증합니다. 율법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셨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율법 이전에 믿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설명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법, 율법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쉽게 말해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말씀하셨지만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말씀하셨으니 율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법이 개정되면 개정된 법을 따르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율법과 약속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좀 전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라고 책망했는데, 여기서는 한결 부드러워진 말로 다시 그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에 주목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 계속 강하게 책망의 말을 하는 것보다 강약을 조절하고 또 다독여 주는 말도 함께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그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방식으로, 당시 일상적인 관례에 따라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종종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데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생각해보라는 의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사람끼리 맺은 언약이라도 언약을 맺은 후에는 이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언약”이라는 말은 ‘계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 사이에 서로 계약을 맺으면 계약은 그대로 효력이 있습니다. 그 계약을 임의로 바꾸거나 뭔가를 추가하거나 무효로 만들 수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 “언약”이라는 말은 법률적인 유언을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 한 사람이 유언을 남기면 그 유언은 다른 누군가가 바꾸거나 추가하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사람사이의 언약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마치 사람 사이에 맺어진 유언과도 같습니다. 이것을 마음대로 취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려고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하신 언약을 누가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약속이 아니라 율법이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처음과 다르게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은 처음과 다르게 말을 바꾸신 것이 됩니다. ‘믿음으로 약속된 복을 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율법이 더 나은 것 같아! 약속에서 율법으로 변경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확정된 유언을 변경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후에 생긴 율법이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보다 약속은 우선됩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보다 약속이 더 우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의 행위가 따라와야 하지만 약속은 사람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는 불안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안전하고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반대로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창세기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실수가 많았고 그의 삶은 온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셔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백세 된 아브라함에게 아기를 허락하셨고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의 태를 여셔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합니다. 율법은 완전할 수 없지만 약속은 완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후에 생긴 율법이 이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이 지키려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얻으려고 하면 어떨까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약속을 통해 또다시 율법의 한계를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의 설명을 들어보면 율법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율법을 좋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면 바울이 보여준 율법에 대한 태도는 더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든다면 한글을 생각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한국 사람은 한글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에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성과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한글은 한국 사람에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 사람이 한글에 대해서 공격을 하면서 한글의 한계와 단점을 계속 언급하면서 한글의 무익함을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우리가 한글에 대해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유대인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들에게서 뗄 수 없는 것이며 유대인을 유대인 되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율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약속을 말하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율법을 더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강하게 저주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을 이해한다면 필연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물을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은 그러면 율법을 왜 주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분명한 것이라면, 약속으로 유업을 누리게 되고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주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율법을 왜 주셨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답을 할 수 있겠지만,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그 범위를 한정지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 율법의 정의에 관한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21) 율법의 역할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럼 먼저 율법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

율법에 대해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첫째, 율법은 범법하므로, 죄 때문에, 죄를 위해 더해진 것입니다. 율법은 의로움에 이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다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둘째,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이 천사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말씀은 없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이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설교할 때에도 “천사가 전한 율법”(행7:53)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율법은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모세를 거쳐서 백성에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직접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셋째,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임시적인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한시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약속하신 자손,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그 목적대로 주어졌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이 다른 복음으로 인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원래 그 자리에 가도록, 원래 목적대로 율법이 자신의 위치에 가도록 진리의 복음으로 율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약속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고 율법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율법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바울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 바울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칫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율법과 약속이 서로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약속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율법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약속, 둘을 두고 어느 것이 더 좋으냐?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능히 살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능히 살게 한다는 말은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율법이 생명을 준다면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를 수 있고, 그렇다면 율법은 약속을 반대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다릅니다.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율법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때 약속으로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약속으로, 믿음으로, 복음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간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사입니다. 먼저 율법의 역할은 간접적으로 간수에 비유됩니다.“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2-23) 성경이 다시 말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합니다. 율법은 마치 감옥을 맡고 있는 간수와 같습니다. 율법에 의해 우리는 감옥에 갇힌 상태가 됩니다.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포로가 되어서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더 노력해봐! 조금 더 수고해봐! 조금만 더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 거야! 조금 더 노력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이건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절대로 율법으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갇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의롭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갇힌 상태인 것을 알도록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율법의 역할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가두고 우리가 갇힌 것을 깨닫도록 하지만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는 없습니다.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의 역할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이러한 역할은 교사로 비유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 여기 나오는 “초등교사”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성경에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면 이 말을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후견인, 개인교사, 훈육선생, 가정교사”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당시에 주로 교육받은 노예들이 했던 역할인데, 주인의 자녀들을 맡아서 통제하고 보호하는 일을 했던 가정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초등교사는 아이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하도록 살펴야했고 바르게 양육해야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엄한 훈육을 하기도 했습니다.

율법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초등교사가 아이가 클 때까지 한정된 기간 안에서 그 역할을 했던 것처럼 율법도 믿음이 오기까지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이 이루어지고 믿음이 왔을 때 율법은 그 역할에 따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인도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에 따라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초등교사에게 배운 가르침들이 커서는 필요가 없어질까요? 가령 어릴 적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초록 불이 되었을 때 좌우를 살핀 후에 손을 들고 건너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 커서는 이 가르침을 버려도 될까요? 아닙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는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리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순종합니다.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으셨습니까? 그 가운데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율법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존스토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율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의무를 담당해야 한다. 우리 시대 교회들이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는 죄와 심판을 덜 강조하는 경향이다. 율법을 우회해서 복음으로 직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경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충돌을 일으킨다. 율법이 먼저 계시되기도 전에 복음에 감사할 인간은 없다. 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때는 밤하늘이 먹물처럼 어두울 때이다. 죄와 심판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할 때에 비로소 복음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여러분 율법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여줍니다. 먹물 같았던 우리의 삶을, 죄와 심판으로 깜깜했던 우리의 인생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율법으로 우리 자신을 살핀다면 우리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도저히 하나님 기준에 이를 수 없는 참담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모두 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순종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구약의 수많은 율법들을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시고 이제 약속을 가진 자로서 기꺼이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