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시편강해

기억해야 할 때(시 137편)

최종혁 · 2026.10.14 · 시편 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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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지만, 그 인자하심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인자하심의 모습이 달라서 우리가 잘 알아채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그 인자하심에서 멀어져서 그럴 때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포로기가 바로 그런 때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기 가운데 있었다.

이 시편의 배경이 바로 그런 때다. 이 시편의 저자는 바벨론에 있던 때를 과거로 언급하지만 여전히 그 과거의 감정이 남아있다. 여전히 그 슬픔과 치욕을 느끼고 있다. 아직은 그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 고통 중에서 시편 기자는 그가 떠나온 시온을 기억한다. 그곳의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교훈을 얻고 이 노래를 기록했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는 것이 좋을 수 있지만, 그러지 말아야할 것도 있다. 기억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럴 때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 잊어야할 것이 오히려 뇌리에 강하게 남아서 자꾸 기억이 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든 잊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기억해야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들도 있다. 특별히 시편 137편은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통해 기억해야 할 3가지를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통해서 그 3가지를 기억해야했고, 이는 삶에서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교훈을 준다.

치욕(1-4절)

먼저 그들은 그들의 경험이 ‘치욕’임을 기억해야했다.

시 137:1–2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바벨론은 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유명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있었고, 에스겔에는 그발 강이 몇 차례 언급되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운하도 매우 발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1절에서 말하는 “여러 강변”이 어디를 말하는지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강변에 앉아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로 특정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이런 강이 있는 땅이 아니었다. 그나마 요단강 정도가 있지만, 유프라테스 강에 비하면 시내 정도다. 그런 큰 강변에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노래하며 쉬려고 그곳에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은 강을 정돈하거나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서 강제로 동원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3절, “우리를 사로잡은 자”,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 공사 중에 잠깐 쉬기 위해 나무 아래 앉았던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었든, 이들이 그곳에 앉아서 했던 일은 “시온”, 즉 자신들이 떠나온 약속의 땅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우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수금”이 있었다. 수금은 성경에서 거의 항상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되었던 악기다. 그런데, 그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다. 찬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이들은 찬양하지 못하고 앉아서 울기만 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이들이 왜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있는지에 대해 먼저 답해야 한다. 이들은 왜 바벨론에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왜 그 때 약속의 땅이 아닌 바벨론에 있었는가? 한 글자로 답할 수 있다. ‘죄’ 때문이었다. 그들이 인자하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던 죄의 결과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는 것이 이 시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니 조금 자세하게 살펴보자.

느헤미야 9장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이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

느 9:23–36 23주께서 그들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들의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24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 주께서 그 땅 가나안 주민들이 그들 앞에 복종하게 하실 때에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과 본토 여러 족속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임의로 행하게 하시매 25그들이 견고한 성읍들과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과 판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26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 27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28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2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33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34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35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36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그 백성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오래참으셨고 기다리셨다. 계속해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게 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고, 다른 나라를 통해서 징계 하심으로써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셨던 것이다.

남북으로 나뉘어졌던 두 왕국 중 더 빠르게 영적으로 타락했던 곳은 10지파가 속해있던 북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남 유다의 사람들은 경고를 받지 못했다. 결국은 그들도 북 이스라엘과 같은 길을 갔고 마침내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게 되었다.

그럼 이것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은 파기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조차도 언약 안에 이미 언급되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하고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에 기초해서 그렇게 하셨다.

신 11:26–28 26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 복과 저주에 대해서는 신명기 28장이 자세히 기록했다.

신 28:32–33 32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33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신 28:36–37 36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신 28:41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너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며

신 28:49–50 49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신 28:53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비슷한 말씀이 레위기 26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고 있는 바로 이 일이다. 그들은 힘이 없어서 강대국에게 침략을 당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저주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예루살렘 멸망이 가장 처절하게 묘사된 말씀은 예레미야 애가일 것이다. 특히 4-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이 일들을 그들이 그대로 경험한 것을 볼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많이 죽어 여자들은 과부가 되었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다. 부녀와 처녀들은 전쟁 범죄에 희생되었다. 지도자들도 아무런 힘이 없었고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은 노예처럼 착취 당했다.

먹을 것이 없었다. 평소에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물과 나무는 돈을 주고서야 살 수 있었다.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써야했다. 당연히 굶주림과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어린 아이에게 줄 물 한 방울, 떡 한 조각이 귀했다. 먹지 못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자녀를 삶아 먹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이 고통은 계속되었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뻐하지 않았다. 노래하고 춤출 수 없었다. 상실로 인한 슬픔에 울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 시온이 들짐승의 거처가 되었다. 지금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언약에 신실하신 사랑은 이들에 대한 징계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씀에 따라 그들은 지금 바벨론에 와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고, 그곳에 자기 백성을 두시고, 영광을 나타내셨다. 시온은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곳에 갈 수 없다. 그러니 슬퍼할 수 밖에 없었다. 울 수 밖에 없었다. 노래할 수 없었다.

이 슬픔이 정말 크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이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고 노래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고 있다는 슬픔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시 137:3–4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이들이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두고 노래하기를 거절했던 이유는 단지 노래를 부르고 싶은 감정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조롱을 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에게 노래를 청했다. 특별히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부르라고 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래를 듣고 싶어서 청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했다.

시온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그래서 시온의 노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보호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다.

시 46:1–7 1[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48:1–3 1[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2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3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시 84:1–4 1[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시 132:13–18 13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5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16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17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8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뭐라고 했겠는가?

애 2:15–16 15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단순히 예루살렘에 대한 조롱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예루살렘을 보호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너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며, 그런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신이 더 위대하다고 찬양했을 것이다. 그러니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높이는만큼, 사람들은 더 하나님을 조롱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노래를 멈췄고, 울었다. 최소한 이들은 지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고통의 순간에 나의 고통과 나의 슬픔에 매몰될 때가 있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어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나만 불쌍히 여길 때가 있다. 이 순간 내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명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지, 아니면 조롱을 받으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똑같네’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도 똑같네’라는 하나님에 대한 조롱이기도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치욕을 통해 배워야했다. 왜 그들이 이런 치욕을 당했는지를 기억해야 했다. 그 치욕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계속 슬픔 가운데 머물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다시는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을 기억할 때, 단순히 나의 슬픔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헌신(5-6절)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것은 헌신이다.

시 137:5–6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헌신(충성)을 맹세한다. 이 헌신은 “예루살렘”을 향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을 잊는다는 것은 기억상실증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없다. 1절에서 시온을 기억하는 것이 단순히 시온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시온을 마음에 두는 것이었다면, 여기서 말하는 잊는 것은 마음에서 지우는 것이다.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참 신기해서, 어떤 것은 빨리 잊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고, 반대로 어떤 것은 절대 잊고 싶지 않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희미해 진다. 여기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한다(5절).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자신의 최고의 기쁨으로 두겠다고 말한다(6절). 지금 그는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그의 손으로 수금을 연주하고 그의 입으로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한다.

5-6절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라. 시편 기자는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아니면 자신의 오른손과 자신의 입이 기능을 잃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차라리 노래하지 못하는 것이 낫고, 차라리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헌신을 잊은 것이 이들이 예루살렘이 아닌 바벨론에 있는 이유였다. 그들은 그들의 손과 입으로 다른 우상을 찬양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을 잊었다. 그들의 기쁨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짐처럼 여겼다. 그렇게 드려지는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다(사 1:11). 그들이 지키는 절기도 싫어하셨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무거운 짐”이라고 표현하실 정도였다(사 1:14).

그들에게 하나님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까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 땅의 신을 섬기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고, 우상을 하나님보다 더 즐거워했을 때, 이 모든 고통스러운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다. 

최소한 이 시편을 기록한 사람은 그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4절까지는 “우리”라고 했던 것이 5-6절에는 “나”로 바뀌었다. 물론 이 시편 기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은 모두의 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헌신의 고백에 한 가지 전제되어 있는 사실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다. 시온의 노래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누구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것이 예루살렘의 끝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끝이 아님을 믿고 있다. 하나님이 끝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지를 확실히 했다. 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신 시온성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예배다. 하나님께서 그 치욕을 씻으시고 다시 영광 받으실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 자신을 헌신해야 함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면 그 어떤 예배도 하지 않겠다는 헌신이다.

이 헌신의 고백은 신약의 이 고백과도 이어진다.

빌 1:20–21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자신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해야할 것은 이것이었다.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시편 기자가 자기 오른손과 입으로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어떤 상황에 있든 이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은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우리의 헌신도 그러해야 한다.

이런 헌식의 고백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보응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보응(7-9절)

시 137:7–9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시편에서 없었으면 하는 구절이다. 특히 9절은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어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자녀를 바위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겸손하게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은 ‘저주의 시편’이라고 불리는 시편들의 내용과 같다. 저주의 시편을 읽을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3가지가 있다(시편 35편 설교). 첫째, 저주의 시편의 동기는 개인의 복수심이 아니라 죄에 대한 공적인 분노다. 둘째, 저주의 시편의 방법은 내가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이다. 셋째, 저주의 시편의 목적은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저주의 시편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구하는 기도다. 요한계시록의 순교자들의 기도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여기 시편 기자의 기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기도한 것도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이다(7절). 예루살렘의 멸망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들의 죄의 결과다. 하지만 하나님은 직접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인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심판한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저 그들이 하던 일을 했던 것 뿐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죄악을 행했다. 이스라엘의 멸망 자체는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기 언급된 에돔과 바벨론의 죄도 있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구한다고 볼 수 있다.

7절에 언급된 “에돔 자손”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과는 형제와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바댜 말씀에 따르면(옵 1:10-14), 에돔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오히려 기뻐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될 것을 말씀하셨다. 시편기자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에돔 자손을 치시기를 구한다.

8-9절은 예루살렘 멸망의 주체였던 “바벨론”에 대한 저주다. 앞서 읽었던 예레미야애가의 말씀처럼 이들은 예루살렘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을 말씀하셨다. 특히 이 말씀을 보라.

사 13:16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목전에서 메어침을 당하겠고 그들의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들의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통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시편 기자의 마음은 슬픔에서 분노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그는 죄악된 방법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기를 기도했다. 이 기도도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에 기초한 기도다. 

때로 우리는 고통 중에 슬픔과 분노에 잠식되어 죄악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내가 이렇게 슬프고, 상처 받았고, 화가 치미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냐며 그 죄악된 행동을 정당화 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사람 옆에서 “그래도 그렇게 하시면 안되요”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로운 방법을 제시해주셨다. 맡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누구에게 맡겨본 적이 있는가? 짐은 맡기는 순간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여기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한다. 다윗도 사울에게 그렇게 했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보응을 맡길 수 있다. 이것이 세번째로 기억해야할 사실이다.

도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어둠 가운데 있을 때,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고 우리의 생각도 좁아진다. 왜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모르겠는 때다. 그럴 때가 바로 오늘 시편의 교훈을 기억해야 할 때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공의로우심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땅의 이방인으로 사는 우리는 계속해서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때마다 내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음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 지금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 지금 내가 하나님께 맡기는 선택을 하고 잇는지, 점검해 보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복있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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