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을 때 본문의 주제를 놓칠 때도 있지만, 시편 136편만큼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이 시편은 매 절에서 주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니, 하나님께 감사하라’가 이 시편의 주제다. 시편 기자는 매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언급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상기시키면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을 명령한다. 이것이 시편 136편의 모든 내용이다.
시편 136편은 구조적으로 시편 135편과 같이 앞뒤로 “감사하라”는 명령이 자리하고, 중간에 그 이유가 나열된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또한 중간에 이유로서 언급된 역사들도 유사한 면이 많다. 다만 강조하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135편은 하나님이 그렇게 ‘다르시다’는 면이 강조되었다면, 136편은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강조한다. 135편이 좀 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의 이유로 제시했다면, 136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의 이유로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감사하라”(1-3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는 “감사하라”가 매절 반복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그렇지 않다. “감사하라”는 명령은 1-3절에 반복되어 있고, 마지막 26절에 한번 더 나온다. 그리고 4-25절은 하나님의 하신 일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반복되는 후렴구(주제)만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시편의 최종 결론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명령이고, 본론을 통해서 그 이유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시 136:1–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반복되는 “감사하라”는 명령과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이유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는 것이다.
먼저 “감사하라”는 반복되는 명령은 기본적으로 “고백하다”, “인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명령은 단순히 고마운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공적으로 고백하여 인정하라는 의미다. “간증하라” 혹은 “증언하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명령에 순종하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그저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그 감사함의 이유를 찾고 묵상하고 표현해야 한다.
여기서도 135편의 “찬송하라”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공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로마서 1:21이 말하는 죄인의 특징에 대한 표현이 더 흥미롭게 들린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 죄인의 특징이 아니다. 알지만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 즉 예배하지 않는 것이 죄인의 특징이다. 반대로, 예배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는데(요 4:23), 예배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는 삶의 여러 모습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자 물동이를 버려 두고 사람들에게 가서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며(요 4:29), 예수님에 대해서 간증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예배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공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증언했던 것이다. 이것도 시편 136편의 “감사하라”는 명령에 순종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모여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이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편의 구성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이 시편은 각 절의 앞 부분을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부르면, 뒷부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회중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은 한 두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모두의 경험이며, 따라서 모두의 입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구원 받은 자들은 함께 모여서 그렇게 하는 특권과 책임을 받았다.
이 사실은 신약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교회가 했던 일이 바로 그 일이었다. 그들은 모였고, 모여서 예배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그들의 말과 삶으로 고백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3-47).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감사의 고백으로 이어졌고, 그런 교회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사할 일들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신 예배자들의 삶이었다.
당연히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1절은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135:4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스스로 언약의 관계에 자신을 묶어 두신 것이다. 이것은 지난 주에 살펴봤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1절에서도 특별히 “그는 선하시며”라고 하나님의 속성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선하신 분으로서 감사의 대상이 된다.
2절은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문자적으로는 “신 중의 신”이라는 표현으로서 최상급을 지칭한다. 실제로 많은 신이 있고 그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뛰어난 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135:15-17의 결론이 바로 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지만, 모두가 거짓 신이고 헛된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참된 신으로서 감사의 대상이 된다.
3절은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2절과 마찬가지로 최상급의 표현이다. 세상에는 “주”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나름의 주권을 가지고 다스린다. 몇 사람만 다스리는 경우도 있고, 수십 수백의 사람을 다스리는 경우도 있다. 그 영향력이 전세계에 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주들 위에 계신 궁극적인 주권자시다.
단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당대의 절대 주권자였던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행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35편에서 강조했었던 것처럼,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우리 예배의 기초에 있다. 그런데, 136편은 우리가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인자하심”은 이미 시편 강해를 하면서 여러차례 강조했던 히브리어 ‘헤세드’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자’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인자는 사랑의 특징 중에 너그러움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헤세드가 강조하는 것은 신실함, 변하지 않음이다. 그 안에 너그러움이 포함되겠지만, 헤세드는 항상 그런 모습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징계를 통해서 헤세드가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 ‘인자’라고 번역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적절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의미를 가지면서 상하 관계에서 사용할만한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상하가 있는 언약의 관계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은 주로 ‘하’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일편단심이나 지조, 정절과 같은 단어를 생각해 보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해당되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남성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성에게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다.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신하에게 요구되는 충절이나 충정은 생각나지만, 반대로 왕에게 해당되는 단어는 생각나지 않는다. ‘은우’나 ‘권애’ 같은 표현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도 왕이 신하를 돌본다는 표현에 가깝지, 변하지 않고 그렇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즉, 전통적인 언약의 관계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돌봄을 약속하고 낮은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택하시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신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넘어서 변함 없이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호세아일 것이다.
호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겨서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다른 왕들과 같은 언약을 맺은 것이라면,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는 순간 그 언약은 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헤세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 그들을 회복하여 다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 변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인자하심”으로 번역된 헤세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니, 그 감사도 영원해야 한다.
시편 136편의 “감사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명확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고백해야 한다. 증언해야 한다.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한다. 특별히 모여서 그렇게 함으로서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모여서 공적으로 함께 드리는 예배를 경시하는 경향도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형식적인 예배로 폄훼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위험성이 공적인 예배 자체를 문제로 만들지는 않는다. 고민해야할 것은 우리가 모였을 때 어떻게 형식적이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깊게 나눌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이유’다. 단순히 예배를 한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예배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4-25절)
이미 그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났고, 매 구절 동일하게 드러난다.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같은 표현을 반복하는 것을 통해서, 정말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이 시편으로 찬양하는 예배자들이 느끼게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한 번, 혹은 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다.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먼저 창조다(4-9절).
시 136:4–9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고 말한다(4절).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셨다. 하늘, 땅, 물, 별, 해, 달,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그들에게 질서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온 우주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분명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한다. 그래서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해 보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발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우리를 떨궈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흔적들을 우리 주변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 분이신지 말해준다. 과학이 이렇게 발전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새와 곤충이 어떻게 나는지를 통해 배운다. 그들이 보고 듣는 방식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들이 집을 만드는 방식, 집을 찾는 방식을 통해서도 배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들은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연구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도 말해준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욥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욥을 도전하셨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욥 42:2–3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인 것이다. 세상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또한,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시 8:3–5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밤 하늘의 달과 별들을 보면서 다윗은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에 빠졌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실 이유가 없고 돌보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더구나 영화과 존귀로 관을 씌우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의 거대한 손 앞에서 나의 작고 하찮음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감사로 이어진 것이다.
다윗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런 감사의 찬양을 드렸다.
시 139:13–18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일시적이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윗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다음으로 구원이다(10-22절).
꽤 긴 말씀이지만,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시편 기자는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시 136:10–22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15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고통에서 건져내신 출애굽 사건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 인자하심 때문이다. 16절은 광야에서의 인도하심을 말한다. 그 인자하심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17-20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신 사건을 말한다. 그 인자하심 때문이다. 21-2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사건을 말한다. 그 인자하심 때문이다.
이 모든 역사는 분명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냈다.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경험했다. 그 모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했다. 여리고의 라합의 말을 들어보라.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다르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드러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홀로 위대하심이 그렇게 선포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은 애굽에게는 심판을 가져왔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가져왔다. 홍해에서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로 통과했지만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몰살했다. 시혼과 옥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심판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자기 백성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이 모든 역사 가운데 드러났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바로 적용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로 복음을 듣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미리 정하신 우리를 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로 회개하여 열매를 맺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에게 하늘의 기업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계속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번 혹은 가끔씩 보여주는 신실한 사랑에 대해서 영원히 감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감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셋째로 현재다(23-25절).
지금까지 과거의 역사를 살펴봤다면 23-25절은 이 찬양을 하고 있는 예배자의 현재를 통해 그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찬양하게 한다.
시 136:23–25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매우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누구에게나 이 말씀이 적용될 수 있게 했다.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은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매우 극소수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게 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다시 경험할 수는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를 여전히 공급하심으로서 그 인자하심을 나타내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이 두 가지가 언급된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먼저, 예배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심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비천한 가운데서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대적에게서 건지시는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여기 사용된 “건지신”이라는 표현은 짐승이 먹잇감을 붙잡는 장면에서 사용되기도 하는 매우 강한 단어다. 심각한 위험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급박하게 건져내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탄에게서 건지시는 것이다.
또한 예바자들은 하나님께서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심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지 않으시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런 필요를 채울 수 없다. 오늘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몸을 누이고 편히 쉴 집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절)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이것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을 세상 속에서 증언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내 삶에 그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 기억이 먼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에 지금도 계속해서 내 삶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날마다 새로운 노래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그 영원한 인자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계에 선포되었던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을 다시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심했었다. 처음 모세가 바로를 찾아간 후로 오히려 그들의 고역이 더 심해졌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다. 하나님의 10가지 놀라운 능력을 맛보고 나서 홍해 앞에 섰을 때도 그들은 두려워했었다. 광야에서는 항상 불평이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서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항상 있다. 그런데, 그런 순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감사하기 보다 원망과 불평과 두려움으로 반응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의 역사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 그리고 우리 개인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증언한다. 우리 삶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그렇게 하자. 지금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을 나타내실 것이고,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혹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면, 원망과 불평과 두려움으로 반응하지 말고, 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찾고 기다리자. 그 끝에서 우리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다시 감사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