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관련된 사람들의 믿음의 선택을 통해 여러 두려움 속에서 참된 믿음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배우고 있다.
모세 1, 권위의 두려움(23절)
먼저 모세의 부모는 권위의 두려움 아래서 가장 높은 권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택을 했다. 성경은 세상의 권위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권위에 순종해야하지만, 동시에 그 권위 역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을 원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의 권위는 눈에 보이고 더 피부에 와닿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더 큰 압박을 느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가장 높은 권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다.
모세 2, 포기의 두려움(24-26절)
다음으로 모세의 선택을 통해서 살펴본 것은 포기의 두려움에 믿음이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가질 수도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모세가 포기했던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권력, 재물, 쾌락 등 모세는 제국의 왕자로서 정말로 많은 것을 누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세는 장성했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했다.
모세에게 포기의 두려움이 있었다. 그가 지금 포기하려는 것이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권임을 잘 알았다. 지금의 선택을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이것을 포기했을 때 그 앞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는 그는 잘 알았다. 두려웠을 것이다. 굳이 포기해야하는 생각도 했었을 것이다. 이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세는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포기를 선택했다. 무엇이 정말 얻는 것인지 믿음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 3, 죽음의 두려움(27-29절)
다음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실제 출애굽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믿음으로 극복했던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말한다. 바로 ‘죽음의 두려움’이다.
사실 죽음의 두려움은 사람이 느끼는 가장 극한의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농담도 곧 잘 하지만, 죽음이 현실로 보일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남의 죽음이든 나의 죽음이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가장 진실된 모습을 보인다. 죽음이라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두려움 앞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사람도 있고, 또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죽음의 두려움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농담을 하는 것은 그런 두려움을 부정하고 싶은 허세이거나, 아니면 그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 것이다.
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 신념을 내려놓는 일도 흔하다. 어쨌든 살고 봐야하지 않느냐는 말은 비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설득력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사람은 가장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환난 중에 교회의 믿음이 더 순수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출애굽 과정은 계속되는 죽음의 두려움과 믿음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중에 몇 가지를 언급한다.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가 애굽을 떠난 것은 2번이다. 처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나서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 거했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을 때다. 히브리서 저자가 마음에 두었을 것 같은 성경의 기록을 먼저 보자.
출 2:14–15 14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 10:28–29 28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29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생각해 보면 모세는 ‘바로’들에 의해서 3번 죽음의 위기에 처했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태어났을 때와 위에 언급한 두 사건이다. 첫 위기는 부모의 믿음으로 벋어날 수 있었다(히 11:23). 두번째 위기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고, 이 때 모세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도망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세의 믿음 없음의 증거는 아니었다.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준비시키셨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다시 부르셔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때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 4:19)고 하시면서 모세를 안심시키셨던 것도 볼 수 있다. 분명 죽음의 두려움이 모세에게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죽음의 두려움은 모세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애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환영 받지 못했고, 결국 바로의 입에서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직접적인 위협의 말까지 듣게 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는 말은 두려움의 결과가 아니라 담대함의 결과다. 바로 후에 모세는 바로에게 처음난 것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에 이렇게 하기도 했다.
출 11:8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모세는 더 이상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굴복하거나 도망하는 등의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그 믿음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모세로 하여금 참을 수 있게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해서 두려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국의 군주가 다시 내 눈에 띄면 너는 죽은 목숨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했던 모세의 믿음은 그 두려움을 참고 이겨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실 이 한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는 계속해서 보이는 바로와 싸우면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 믿음의 인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의 또 다른 예가 첫 유월절이었다.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이 사건에서는 두 가지 믿음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죽게 하실 수 있으시고,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다. 이전의 9가지 재앙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있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고민은 피 뿌리는 예식에 대한 부분이다. 장자를 멸하는 자가 애굽을 돌 때, 문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어야 했다. “아니요. 그 정도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문을 더 튼튼하게 해야할 것 같아요. 어디 안전한 곳에 지하 벙커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한 마리가 아니라 몇 마리는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일천번제를 드려보면 어떨까요?” 이런 식의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데, 그저 양 한마리 잡아서 문에 바르면 살거라는 말을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세의 마음 속에도 그런 갈등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동일한 예식을 행했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 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애굽 사람들의 집에서 곡소리가 들려올 때, 아이가 이걸로 정말 괜찮은거냐고,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는거냐고 물을 때,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믿고 안심하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했어야 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것의 양의 피의 특별한 효능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두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믿고 행한 자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 뿐이다.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찬양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죽음을 경험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때로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믿음을 증명하게 하실 때가 있다. 나무의 열매 하나 먹고 안 먹고가 뭐가 중요한가. 어떻게 하나님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실 수가 있는가. 불뱀에 물렸는데, 놋뱀을 보면 산다는게 말이 되는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가당한 논리인가.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사실을 다 이해하고 납득이 되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해서 하는 것이다. 설령 죽음의 두려움이 눈 앞에 있고, 나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인 것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통해 참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출애굽과 관련된 또 다른 믿음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번에도 역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믿음이 보여준 선택이다.
히 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여기서 저자는 모세가 아닌 백성들의 행위를 믿음의 결과로 말한다. 이것이 의외로 느껴지는 것은 홍해 앞에서 정작 믿음을 보였던 사람은 모세였지 백성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도 보게되겠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완벽한 믿음의 사람들, 그들의 완벽한 믿음의 삶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믿음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11장을 시작하면서도 말했지만,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영웅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영웅적인 모습이 그 안에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다 이런 믿음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었다. 하지만 결국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정도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모세도 죽음의 두려움이 처음에는 도망했었지만, 다시 돌아와서 담대하게 바로 앞에 설 정도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도 그런 면에서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홍해를 앞 둔 상황에서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왔을 때, 그들은 심히 두려워했다(출 14:10).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출 14:11)면서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다. 정말 믿음 없는 모습이다.
반면에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모세야 말로 여기서 참된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들” 즉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것을 믿음의 본으로 말한다. 출애굽기의 기록은 이렇다.
출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이것이 왜 믿음이었을까?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애굽의 군대에게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 좌우에는 물이 벽과 같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놀라운 기적으로 보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물이 쏟아져내리면 죽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에 따라 그들은 홍해를 건너갔다. 이들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순종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후에도 믿음 없는 모습을 계속 보이지만, 이때만큼은 믿음으로 행했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어떤 면에서는 의외로 보이는 이런 상황들을 믿음의 본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분명 독자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은 항상 지금이다. 과거에 믿었었고, 앞으로 믿을거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세도 죽음의 두려움이 도망했었지만, 결국은 믿음으로 그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선택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두려워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선택을 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두려움 앞에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미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 믿음의 선택을 하면 된다. 지금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가장 이상적인 믿음의 고백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빌 1:20–21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모세와 당시 백성들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영원한 삶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믿음도 조금은 더 쉬워져야 정상이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정말로 세상은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 4, 다름의 두려움(30-31절)
끝으로 ‘다름의 두려움’ 앞에서 믿음의 선택을 했었던 사람의 예를 보자.
‘죽음의 두려움’은 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살면서 직접적으로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 일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다름의 두려움’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두려움 중 하나다. 우리는 살면서 ‘잘 모르는게 있으면 남들 하는 거 보고 따라하면 최소한 중간은 간다’는 삶의 지혜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남들이 이미 하고 있으면 해도 괜찮은거, 남들이 하지 않고 있으면 하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큰 손해를 볼 일은 잘 없다. 혹 손해를 보더라도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도 된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선택을 해야한다는 압박이 있고, 우리 자신도 그것을 편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선택’을 요구하실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다름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앞서 살펴봤던 예시들에서도 이 다름의 두려움은 이미 있었다. 모세의 부모도 다른 선택을 했었다. 모세도 상식 밖의 선택을 했다. 장자의 죽음을 면하기 위해 문 주변에 양의 피를 뿌리는 것도 그랬다. 다름의 두려움은 우리와 가까이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먼저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백성들의 경우를 언급한다.
히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7살 짜리 아이들을 불러모아서 여리고 성을 어떻게 함락시킬 수 있을지 전략을 짜보라고 했었도 이런 전략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칠 일 동안 성 주변을 돌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했다. 그 모습을 성 위에서 지켜보던 여리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당황했을 것이다. 뭔가 숨겨진 전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경계를 더 삼엄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2, 3일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이렇게 저렇게 싸우라고 하면 이해가 됐을 것이다. 그 전략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6일을 그저 조용히 성을 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7일째가 되어 나팔을 불 때 모두가 소리를 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말씀이다. ‘다름의 두려움’이 그들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했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져서 그들은 그 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다름의 두려움’을 이겼던 것이다.
그 여리고 성에 있었던 라합은 바로 이런 믿음의 표본과 같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멸망당할 사람들에 속해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속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에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서 그곳의 상황을 엿보고 올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유숙했는데, 그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왕은 사람을 보내서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라합은 선택해야 했다. 일반적인 선택은 당연히 정탐꾼들을 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라합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들을 숨기고 도망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라합은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를 말했다.
수 2:9–11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이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라합이 계속해서 “우리”라고 말한 부분이다. 라합은 이 모든 것을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로서 말하지 않았다. 여리고의 주민들은 이 모든 일을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들을 “손종하지 아니한 자[들]”라고 표현한 것이다. 라합이나 다른 여리고의 백성들이나 같은 말을 들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고, 라합은 믿었다. 그들은 두려워하는데 그쳤고, 라합은 하나님의 편에 서는데까지 나아갔다. 그 다른 믿음이 라합이 구원을 얻게 했고, 심지어는 메시야의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리게까지 되었다(마 1:5).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라합의 다른 선택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라합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성의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이었기 때문에 분명 힘든 선택이었다. 처음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때부터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고민을 주변 사람과 나눴다면, 다들 그녀를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라합은 믿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믿음의 선택을 했다. 다름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또한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내고, ‘다른 선택’을 했다. 그 믿음에 하나님은 은혜를 내리셨다.
다시 말하지만 ‘다름의 두려움’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두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우리의 믿음을 자주 드러내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도저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그 두려움이 정말 작아서 다른 선택을 해도 아무 상관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다름의 두려움은 계속해서 우리를 압박하고 유혹한다. 같은 선택을 하라고, 그것이 안전하다고,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때 우리가 믿음에 따라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다르게 선택하길 원하신다. 그런 믿음이 참된 믿음이고,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도전
두려움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은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두려움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권위가 두려운가? 더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 포기가 두려운가?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포기한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크다. 죽음이 두려운가? 우리의 죽음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죽음 이후의 삶도 하나님께 달려있다. 다르다는 것이 두려운가? 정말 안전한 길, 옳은 길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의 선택을 하라. 그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다.
결국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있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하나님의 주권은 얼마나 절대적인지,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무한한지, 하나님의 신실하심, 불변하심 등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경험하는 만큼 우리의 믿음도 함께 자라가고 우리의 많은 두려움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연약했고, 모세도 연약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그랬다. 라합은 평생을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면서 믿음은 열매를 맺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음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두려워하고, 두려움 때문에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더 하나님을 알아가며 지금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의 대열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의 두려움과 싸우며 하나님이 그 모든 두려움보다 크신 분이심을 세상 속에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