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따라서 어떤 사람의 선택을 모아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은 싫어하고 무엇에 약한지 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선택에 큰 영향을 주는 것 중 하나가 두려움이다. 사람은 무엇이 좋아서 어떤 일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을 두려워해서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고도 하셨다.
눅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생명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해도 이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이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이에 있으면서 우리 매일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고통을 두려워한다.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거절 당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묻거나 부탁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무리에서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자리는 처음부터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래서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그렇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책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등 다 나열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어떤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주셨을 것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가 행하는 조심성 없는 일들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고 또 주게 될 것이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만 행동하게 될 것이다. 즉, 올바른 두려움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빠르게 올바른 선택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두려움들이 우리로 이런 저런 선택을 하게 하려고 한다. 그 중에 어떤 두려움은 올바른 두려움이고 어떤 두려움은 잘못된 두려움이다. 그 기준은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 혹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게 하는 두려움은 필요한 두려움이지만, 그렇지 않은 두려움이라면 우리가 싸워야할 두려움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여러 두려움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자.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특별히 시련의 상황 속에서 보였던 모습을 통해 참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제 모세와 관련된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로 주목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여러 두려움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모세 1, 권위의 두려움(23절)
먼저 모세의 부모의 부모를 통해서 권위의 두려움이 있을 때, 믿음은 어떤 선택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이 번성하여 이제는 민족이 되었고, 애굽의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동화되지 않고 살아가는 이 이방민족이 위협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는 그들을 건축과 농사 등에 투입시키며 종으로 부렸고, 심지어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렸다(출 1장).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고,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그를 3달 동안 숨겨서 키웠다. 그리고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 강의 갈대 사이에 두었다. 바로 이 선택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으로” 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알았다. 이 표현 자체는 모세가 여느 다른 아이(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아이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모세가 다른 아이와 다르게 특별히 아름다운 아이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일 것이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말을 보면,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그 형제를 돌볼 생각이 났고, 실제로 그 생각을 행등으로 옮겨서 한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때 모세의 생각에 대해서 스데반은 이렇게 말했다.
행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후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기 전에 이미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그 사실을 알게 하셨을 수도 있지만, 부모에게 먼저 알게 하셨고 부모가 그 사실을 모세에게 전해주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특별히 아름다운 아이로 보았던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어느 쪽이든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였다는 사실이 그들 눈 앞의 두려움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지금 그들 눈 앞에는 아이를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왕의 명령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모세의 부모는 실제로 다른 아기들이 나일 강에 던져지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스스로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던 다른 부모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보았을 것이다. 왕의 명령에 따라 아기를 나일 강에 던지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 발각이 되면 그 아이와 자신들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 앞에서 모세의 부모는 무력했다. 사람의 생사를 말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는 바로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고,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강제로 받아들이게 되든지의 선택만 있었을 뿐이다.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멀게 느껴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치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말처럼 들리고,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비난의 말처럼 들린다.
이것이 권위 아래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순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 권위가 크고 강할수록 이런 두려움도 함께 커진다. 그 권위가 말하는 결과가 반드시 내가 경험하게 될 현실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권위에 순종할 것을 말하기도 한다.
롬 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권위에 순종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어떤 능력이나 인품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있어서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위에 있는 권위로 세우셨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명령은 하나님이 모든 권세 위에 있는 권세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세우고 폐하시는 궁극의 권세시다. 따라서, 어떤 권세의 명령이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 권위에 불복해야한다. 이때도 단순히 그 권위가 싫어서, 내 생각과 달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모세의 부모가 권위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했던 것은 바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선구자적인 선택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보다 더 높은 권위인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 그렇게 했다. 앞서 읽었던 말씀처럼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믿음의 결과였다. 그들의 믿음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들 눈에는 절대적 권위인 바로가 보였지만, 그들의 믿음은 바로가 아닌 하나님이 절대적 권위임을 볼 수 있게 했다. 그것이 보이면 선택은 명확해 진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고 믿음의 선택이다.
명확한 선택이라고 해서 그것이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세의 부모는 여전히 바로가 두려웠을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한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두려움보다 큰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왕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다.
이와 동일하게 권위의 두려움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믿음의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포로의 신분으로 왕의 진미를 거절했다.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했다. 왕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명을 거절했다. 왕의 진미가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도 아니었다. 잠깐 기도를 쉬는 것이 죄여서도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왕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절했다.
신약에 와서는 사도들도 동일한 선택을 했다.
행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고, 우리에게 그 대열에 합류할 것을 강요하며 압박할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누가 더 높은 권위에 있느냐다. 그리고 더 높은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선택이다.
이런 권위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있다. 바로처럼 태어난 아기를 죽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낙태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괜찮다고 인정할 것을 강요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진화론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세상에 남자와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개의 성별이 있음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성적인 쾌락은 결혼과 관계 없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음을 인정하라고 하고 있다. 자녀는 부모가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양육하는 것이고, 체벌 같은 훈육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음을 받아들이고, 성경도 하나의 고대 문서임을 인정하라고 하고 있다.
이 중에 어떤 것들은 이미 법제화 되어서 우리 위의 권위가 되었다. 자녀 체벌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성경은 자녀를 양육하는데 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이미 우리나라도 그것을 법으로 막고 있다. 다른 많은 부분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세상의 권위는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간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것은 더 높은 권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 두려움 속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모세 2, 포기의 두려움(24-26절)
다음으로 모세의 선택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포기의 두려움이다. 모세는 포기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바른 선택을 함으로 믿음의 본을 보였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말씀에서 모세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보자.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포기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포기했다.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했다. 여기서 ‘포기했다’는 말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았다는 의미다. 즉, 모세는 이런 것들은 어차피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고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말이다.
F. B. 마이어, “그가 마차를 타고 거리고 나가면 왕자의 행차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호령이 퍼져나갔을 것이고, 나일강으로 가면 황금으로 꾸며진 의전용 배에 향락적인 풍악이 울려나왔을 것이다. 무엇이든 그가 원하기만 하면 이집트의 재화와 보물을 거의 무제한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공주의 아들로 살아왔다. 왕궁 안에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복종했고,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 하지만 원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오를 수 없는 자리에 모세는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태어나면서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이 어떤 노력도 없이 그런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모세가 딱히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는 그 힘으로 많은 낙(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즐거움이 무엇이든 원하면 가질 수 있었다. 학문을 좋아했다면, 최고의 스승에게 배우고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면 아무나 구할 수 없는 진미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성적인 쾌락을 원했다면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 것이고, 여행이든, 운동이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가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포기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모세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세는 살면서 돈이 없어서 무언가를 못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걱정, 옷에 대한 걱정, 집에 대한 걱정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원하는 것은 언제나 얻을 수 있었고, 혹 그의 나라에서 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남의 나라에서라도 사올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묘사에 가장 어울리는 성경 인물은 사실 모세가 아니라 솔로몬일 것이다. 하지만 모세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큰 제국의 왕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솔로몬보다 모세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자라왔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모세는 이 모든 것들을 누려왔고 앞으로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의 앞에 있는 이 모든 권력과 낙과 재물을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모세의 상황이었다. 누구가 부러워할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장성했을 때 ‘선택’을 했다. 변화를 선택했다. 최상의 상황에서의 변화는 곧 그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보화로 여겼다. 왕자라는 신분, 보장된 즐거움과 재물을 포기하고 노예라는 신분과 고난, 수치를 선택한 것이다. 일부만 포기했던 것이 아니다. 모세는 전부를 포기했다.
모두가 ‘도대체 왜?’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했다. 모두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포기하고,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에는 대부분 순간의 감정이나 인정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한다. 모세의 경우도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26절에 사용된 “여겼으니”는 철저한 계산을 의미하는 단어다. 모세는 계산해 본 것이다. 그리고 명백하게 옳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
모세의 입장에서 위에 언급한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모든 것이 보장된 삶을 버리고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삶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무 것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 모르겠는데, 모세는 그동안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가 포기하는 이 삶이 어떤 삶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세는 포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계산해 본 것이다. 지금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비교해봤다. 지금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과 영생의 낙을 누리는 것을 비교해봤다. 애굽의 보화와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비교해봤다. 그러니 답이 분명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 손해였다. 모세는 그렇게 포기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믿음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을 때, 예수님은 참된 제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눅 14:25–33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단지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다. 순간의 감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계산하고 선택하라고 요구하셨다. 믿음으로 볼 수 있다면, 그 계산의 결과는 언제나 동일할 것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언제나 더 남는다. 무한히 더 남는다. 그래서 똑같이 계산해 본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얻는데 방해가 되는 것는 모두 해로운 것이었다.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다. ‘포기’라는 단어를 쓰기도 아까운 것들인 것이다. 당연히 버려야할 것, 죽여야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은 힘든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다. 바울과 모세, 그리고 다른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바로 그 계산을 했던 것이고, 그 계산의 결과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 계산이 바로 포기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특히 모세가 선택한 고난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모세가 아직 오지 않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자신의 선택을 바로 그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굳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독자들이 바로 이 수모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 때문에 믿음에서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려고 하는 ‘모세’조차도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음을 저자는 독자들이 알기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곧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모든 재물과 비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잘 계산해야 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실제로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고, 낙을 누리는 것이 죄가 아니고, 부한 것이 죄는 아니다. 우리가 포기한 것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두실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있는 그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포기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지만, 막상 내 상황에 적용해 보면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모세처럼 대단한 것이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이것도 포기해야하는 것이 맞나 싶다. 이것은 가지고 있어도 별로 상관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있다. 이것마저 포기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나만의 취미 같은 것이 그런 것일 수 있다.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것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포기의 두려움이다. 그럴 때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잘 계산해봐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선택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에는 항상 중간이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려면,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하기 때문이다. 이 거래는 분명 하나님 입장에서 손해다. 하나님의 전부는 무한이고, 나의 전부는 그저 이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신다.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이 불공정한 거래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포기’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분명 ‘포기’가 맞다. 우리도 기꺼이 우리의 전부를 포기하여 하나님의 전부를 누리는 즐거움에 참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