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히브리서 강해

믿음의 대열을 따르라(2) (히 11:4-7)

최종혁 · 2026.06.13 · 히브리서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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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오늘은 어 히브리서 어 10 1장 말씀을 지난 [콧방귀] 달에이어서네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어 11장이고요. 오늘은 4절부터 7절 어 믿음의 대열을 따르라 두 번째 시간입니다.음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이제 끝까지 견디는 믿음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고 있어요.이 이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라고 표현을 하는게 그렇게 들으면은 뭔가 그게 뭐 믿음 중에 어떤 한 종류인가 이제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어 사실은 그렇지 않고요. 믿음의 특징 참된 믿음의 특징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어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 있고 그렇지 않은 믿음이 있고 그런게 아니라는 거죠. 모든 믿음은 끝까지 견디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고요. 어 그렇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39절이 이제 그 얘기를 했죠.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어, 이제 이런 믿음의 특징이요. 또 다른 믿음의 특징을 만나서 이제 근본적인 그런 삶의 변화들을 가져옵니다. 1절 11 어,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 이제 믿음의 그런 본질적인 특징에 대해서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를 한 건데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어, 증거니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속한 것이어서 혹은 영적인 세계에 속해 있어서 마치 현실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존재하는 그 실상

혹은 우리가 실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 실상을 지금 내 눈앞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믿음이다. 이제 그렇게 성경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 다르게 말하자면요. 그렇기 때문에이 믿음은 보이는 것을 다르게 만듭니다. 그죠?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다르게 만드는 거고요. 그리고 그런 믿음을 내가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면이 현실이 다르게 보이고

결국 내가 살아가는 그 삶이 달라지는 거예요. 어, 그것이 이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고요. 우리가 이제 11장을 통해서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이제 그런 사람들의 예들을 하나씩 살펴보게 될 겁니다. 어,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었는데이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아니에요. 네.이 사람들이 특별한 믿음을 가졌었던 그래서 우리가 어 뭐 나는 다른 사람 이제 그렇게 생각해야 될 그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졌었던 참된 믿음을 가졌었던 사람들의 예의일 뿐인 거예요. 어 그렇기 때문에 어 이들에 대해서 우리가 존경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존경하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어 나하고는 다른 사람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어, 이들이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이 사람들이 자기의 상황에서 믿음에 따라서 선택을 하면서 살았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오늘 내 상황에서 그 믿음에 따른 똑같은 믿음에 따른 선택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어, 그렇게 해서 우리가 믿음의 대열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거예요. 오늘은 이제 그 1열에 있었던 사람들 세 사람을 살펴보게 될 겁니다. 어, 한 사람씩 따로따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나 네. 그 욕망을 제가 잠재우고 세 사람을 같이 하겠습니다. 어 아벨, 에녹, 노아에 대해서 같이 좀 살펴보겠습니다. 어 사실 근데 믿음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예요? >> 아브라함이죠. 그렇죠? 아브라함부터 이제 시작을 할 거 같은데 아브라함은 이제 뒤에서 하고요. 사실은 그 아브라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그 아브라함보다 먼저 살았었던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어 특별히 이제 그들의 삶의 결과에 집중을 해요.

그래서 그들이 믿음으로서 하나님께 어떠한 인정을 받았는지를 강조를 합니다. 먼저 아벨을 좀 살펴볼게요. 아벨은 어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었던 아벨에 대해서 4절이 말합니다. 보시면 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지금도 말하느니라. 어

아벨과 가인의 얘기. 가인과 아벨의 얘기가 창세기 4장에 기록이 돼 있죠.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어 누가 형이었죠? >> 가인이 형이었어요. 그렇죠? 그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이 가인이었고 그다음에 아벨이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둘이 각자 이제 하나님께 재물을 가져와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누구의 제사만 받으셨어요? >> 아벨. 그렇죠? 아벨과 그의 재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재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인이 어떻게 했나요? 그래서 가인이 동생을 살례를 했습니다. 어,이 창세기의이 사건에 대한 기록에 보시면요. 하나님께서 어,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서 명시해서 말을 하지 않아요. 그죠?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 혹은요. 그 창세기에서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믿음으로 드렸다 이렇게 히브리서처럼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지도 아 않아요. 근데이 히브리서의 저자 저자 저자의 표현을 보시면은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라고 말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재물을 받으셨다라는 그

결과에 주목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다라는 의미인 거고요. 6절 말씀에 보시면은 뭐가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해요. 믿음. 그렇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라는 얘기는이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거니까 그러면은 아벨은 믿음으로 믿음의 제사를 드렸다라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어 그런데이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아벨과 가인의 믿음의 차이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사실 뭐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를 하냐면은 그들이 드렸었던 재물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고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어, 요한일서에 보시면은 3장 12절에서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뭐라고 표현을 했냐면은 가인이 자기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에 아우를 죽였다라고 그렇게 말을 했어요. 그리고 유다서에서 유다는 교회 안에 들어왔었던 그 거짓 교사들이 가인의 길을 따랐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어, 가인이 한이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악한 행위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게 그 재물을 아, 그 동생을 죽였던 것에 대해서 악한 행위라고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고요. 당연히 그것도 악한 행위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애초에 가인이 선택했었던 것, 그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재물을 드렸었던 것 그거 자체를 악한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자기 길을 선택해서 그렇게 갔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경은요이 가인의 선택을, 가인의 행동을 어떤 무지에 의한 실수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라는 거예요. 어 다시 말하면요.음 가인이 아벨과 다른 재물을 들였었던 그 이유는 단지 그가 목자였던 동생 아벨과는 다르게 농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라는 겁니다. 어, 무지한 가운데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냥 그것을

거절하시고 그랬던 것이 아니에요. 어,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실 때 창세기 4장 7절에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셨냐면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가인이 행했던 그 제사에 대해서 그가 선을 행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거 자체가 악한 일이었다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무지해서 실수한 것이 아니고요. 그것이 무슨 이유였든지 그게 뭐 피해 제사가 아니었든 첫소산을 드린게 아니어서 그렇든 어떤 이유가 됐었든지 분명히 가인은 하나님의 길을 알고 있었어요. 아벨도 알고 있었고요. 둘 다 알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아벨은 하나님의 길을 선택을 했었던 거고 가인은 자기 길을 선택해서 제사를 드렸었다라는 겁니다. 그 차이였던 거예요. 어, 의지로 그것 하나님의

말씀의 가인은 불순종을 한 겁니다. 불순종. 어 그래서 아벨과 가인이 가져온 그 재물의 차이를 성경이 말한다 그랬어요. 근데 그 재물의 차이라는 것은 결국 뭐의 차이냐면은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인 거고요. 그리고 그 근본에 있는 것은 믿음과

불신이었던 겁니다. 믿음과 불신의 차이가 그 결과로서 드러난 거예요. 행동의 차이가 곧 믿음의 차이다라는 겁니다. 어 간단 간단하게 말하면요. 가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거고요. 아벨은 하나님을 믿은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벨의 믿음은이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서 증명이 됐었던 거고요. 가인의 불씨는이 불순종의 제사 그리고 이어진 존속 살해라는 것으로서 증명이 됐었던 겁니다. 어 히브리서 저자는이 4절 끝에 보시면은 아벨이 죽었는데 그 믿음으로서 말하고 있다라고 얘기를 해요. 지금도 그가 말을 한다라고 말을 하는데요. 그것이 뭐냐면요. 바로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하신다는 그 사실이에요. 여기 보시면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라고 말을 하죠. 그렇죠?이 이 아벨의 믿음이 순종으로서 증명되었고요. 그리고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롭다라고 하셨다라는 겁니다. 어, 창세기 4장 10절에 보시면요. 하나님께서 가인한테 뭐라고 말씀하셨냐면은 이때는 이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에요. 뭐라 그러셨냐면은 너의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그렇게 표현을 하셨어요. 여기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제 그 표현을 지금 가지고 와서 말을 하는 겁니다. 아벨이 지금도 말을 하고 있다. 근데이

아벨이 어 죽음의 원통함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요. 뭐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거냐면은 믿음으로서 하나님께 그가 자 그가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받으셔서 자신을 의롭다라고 하셨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의 죽음과 관계 없이이 믿음의 길이 옳다라는 것.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의의 길 의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자, 다음으로요. 에녹을 볼게요. 5절을 보시면 에녹이 나오는데요. 어, 에녹은 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어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어, 에녹이 지금 우리들한테도 유명하죠. 그렇죠? 그 아담의 자손들 쭉 이어지는 그 어, 개보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 몇 명 없잖아요. 그죠? 제일 오래 살았던 사람 뭐 그런 사람 정도 기억하는데이 에녹은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을 합니다. 어, 유대인들에게는 특히나 사실 더 그랬었어요.이 에녹이 300년을 하나니까 동행을 했었고 그리고 아주 특별했었던 것이 뭐예요? 그 그 300년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얘기를 하죠. 그죠? 그것이 아주 특별했기 때문에이 유대인들에게도 사실은 굉장히 특별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어 그래서이 유대교회 전승에 따르면은 에녹이 그

300년 동안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이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 특별한 계시를 받고 계속해서 그 세상 가운데 그 계시를 선포했다. 이제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어 신구약의 중간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런 위경 같은 것들이 있어요. 외경 같은 것들. 이 지금 우리가 성경으로 가지고 있는 말씀 말고 이제 다른 말씀들이 있는데 어 그 중에 하나가 에녹일서라는 것이 있고요. 그 에녹일서에 보시면은이 에녹의 그런 특별한 계시들 어떤 받았던 환상들 이제 그런 것들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어요. 유다서에서 이제 그 중에 하나를 이제 언급을 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어 사실 이제 그거 제외를 하면 이제 다른 것들은 이제 우리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내용들이에요. 어, 그러니까

실제로 이제 그러한 것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 그 기간에 어떠한 사람이 그렇게 써냈었던 혹은 그들이 들어왔었던 것을 종합해서 그렇게 적어냈던 이제 그러한 어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어, 에녹에 대한 근데 성경의 기록은 창세기 5장에만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시면은이 아담의 개보에 에녹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 아담의 개보를 보시면요.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의 개보를 보시면은 어 그것이 무엇을 보여 주냐면은 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이 타락한 인간에게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죽음이 임했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해 줘요. 그러니까이 사람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자녀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항상 마지막에 어때요?

죽었다. 예. 죽었다. 이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나고 자녀낳고 죽었다. 이제 그게 계속해서 패턴이에요. 그 창세기 5장에 기록된 개보의 패턴이에요. 근데 그 패턴이 깨졌던 것이 바로 에녹입니다. 유일하게 그 패턴이 깨진 거예요. 어 창세기 5장 21절부터 24절을 보시면 요렇게 말을 합니다. 어 에녹은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았고

무드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패턴에 따르면은 방금 읽었던 말씀에서 23절에서 그는 365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제 그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 패턴이 깨진 거죠. 에녹은 죽지를 않았고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뭐 어떤 방식으로 데려가셨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뭐 이제 비슷한 경우가 누가 있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 엘리야 있죠? 그죠? 엘리야. 엘리야 같은 경우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회오리 바람으로 그렇게

올리셨었는데 어 근데 이제 에녹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 이제 그러한 부분이 없어요. 어떻게 데려가셨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데 근데 분명히 이제이 말씀에 따르면은 그런 일반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게 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것은 알 수 있어요. 그렇죠? 그니까 다른 모든 말씀들은이 죽음을 언급을 하고 있는데 에녹은 죽음을 언급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죽음 어 죽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

그러한 어 사람이었었던 겁니다. 어 그것에 대해서 이제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것이 믿음의 결과라고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이 아벨의 더 나은 제사가 믿음의 결과였었던 것처럼 에녹의 어 더 나은음 죽음이라고 이걸 표현을 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냥 더 나은 죽음이라고 말을 할게요. 더 나은 죽음도 믿음의 결과였었던 거죠. 어, 특별히 이제 에녹 같은 경우에는 그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것이니까 믿음의

보상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이 300년 동안 이어졌던 믿음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서 하나님은 에녹을 이제 죽음을 보지 않게 그렇게 하셨던 거예요. 어, 죄에 대한 그러한 저주가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풀릴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 주었던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 그 300년의 삶에 대해서 이제 창세기가 묘사한 거는 뭐냐면요. 동행입니다. 동행.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말합니다. 동행했다. 어, 히브리서의 저자는요. 여기 보시면은 어, 뭐라고 표현을 했냐면은 어,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해요. 그렇죠? 어, 요거는요. 그 헬라어 번역을 따라서 이제 기쁘시게 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은 에녹을 나와 동행한 자 혹은 나를 기쁘게 한 자라고 인정을 하신 거고요. 그래서 그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어, 옮기셨다라는 겁니다.

어,이 아벨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가 좀 칭위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면은이 에녹의 삶에서는 우리가 성화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면이 있어요. 왜 그러냐면 에녹은 긴 시간을이 믿음에 따라서 살았잖아요. 어, 에녹이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뭐 하얀옷 같은 거 있고 숲속 같은 데서 이렇게 막 유자적하면서 막 다니면서 막 이렇게 하나님 막 그러면서 얘기하고 있고 막 이제 그런 거를 생각할지도 어 그런게 좀 생각날지도 모르겠고요. 뭐 아니면은 뭐 어떤 수도처럼 막 이렇게 자기 뭐 세상하고 단절돼서 고행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거 뭐 그런게 떠오를지도 몰라요. 근데 이제 동행이라는 말을 여러분 생각합니다.

동행 무슨 뜻인가요? >> 똑같이 행동. >> 똑같이 행동하는 거. 행은 걷는 거니까 같이 걷는 거죠. 그렇죠? 같이 걷는 것. 동행이라는 뜻입니다. 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라는 말에 이제 담겨 있는 의미처럼이 동행이라는 것이요. 어 누가 누구 쪽에 맞추는 거예요? 누가 누구 쪽에 맞출까요?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는 걸까요? 내가 하나님에게 맞추는 걸까요? >> 네. 내가 하나님에게 맞추는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인간 측면에서 하나님께 그 발걸음을 맞춰서 같이 걸어가는 것이

동행이에요. 다르게 말하면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동행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거.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동행입니다. 어, 갈라디아서 보시면요. 바울이 이런 동행의 삶에 대해서 요렇게 말을 했어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 25절에 보시면 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을 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 성령으로 걷는다라는 의미인 거죠. 그렇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동행인 거예요. 바로 앞에 보시면은 내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누구의 의지대로, 누구의 원함대로 걸어가는 겁니까? 성령님의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걸어가는 거죠. 그것을 성경이 동행이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어, 그 갈라디아서 바로 앞에 말씀 여러분 아실 텐데 바울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요. 육체의 일을 버려야 된다라고 하면서 그 육체의 일에 대해서 쭉 나열를 하고요.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나열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것이 결국은 그러한 삶이다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거고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그렇게 하려면 내가 그 사람을 계속해서 살펴야겠죠. 그렇죠?이 사람이 뭐를 원하는지,이 사람이 뭐를 좋아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그것을 계속해서 살펴봐야 되는 거예요. 지나온 행적들을 보겠죠. 그렇죠? 어떤 상황에서이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면은이 사람이 뭐를 원하는지를 알 수 있고이 사람이 어떠한 선택을 앞으로 할 것인지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러한 것들을

사실은 어 우리가 뭐 결혼하면 부부상에서 그런 일들을 하는 건데 근데 하나님과 그렇게 한다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를 계속해서 살피고 그 길로 걸어가는 겁니다. 나도 그곳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은 동행이라고 [목을 가다듬음] 말을 하고 있어요. 에녹이 그렇게 살았다라는 겁니다. 몇 년을요? 300년. 최장 기록이고요. 절대로 깨질 수 없는 기록일 것 같아요. 그렇죠? 왜냐하면은 우리 중에 여기서 300년 살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죠? 그 당시에 기록으로 300년은 굉장히 짧게 산 거거든요.

예. 거의 막 800살, 900살던 때니까. 근데 300년을 동행했했했었던 사람은 에녹만 유일하게 기록이 되어 있고요. 최장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기록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어 그의 삶에 보상을 해 주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기 때문에 그 에녹을 하나님 곁에 두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라는 거예요. 어

여기서 이제 히브리서의 저자가요. 잠깐 우리가 알아야 될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넘어갑니다. 6절을 보시면 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아 같이 읽어 볼까요? 6절 시작.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어, 아벨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믿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기도 한데요. 어, 특별히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그런 인정을 받았었던이 에녹의 삶에서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 거예요.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었던 것은 뭐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믿음에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예요? 하나님의 대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이 있고요. 두 번째는 뭐냐면은 그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이시다. 상주심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어, 제가 요즘에 금요일 저녁에 변증학 강의를 하고 있어요. 들으시는 분 계실 텐데 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제가 말할 때 그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지만 결국 궁극적에

가서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은 뭐의 문제예요? 믿음의 문제예요. 그렇죠? 이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면은이 하나님은 우리하고 다른 존재셔서 우리의 눈으로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감각으로서 느끼고 경험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셔서 그래요. 물론 우리들에게도 영이 있기 때문에 그렇죠? 영이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재 같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이러한 감각들을 감각 예 감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느끼고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어 그래서 결국은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나 혹은 하나님의 부존재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라고 말하는 부존재에 대해서나 둘 다

믿음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거나 혹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겁니다. 네. 둘 중에 하나예요. 어, 하나는 믿음의 결과고 하나는 이성의 결과다. 그렇게 얘기할 수 없다라는 거예요. 그 변증과 노망 가이슬러라는 사람이 쓴 책 제목 중에 하나가 뭐냐면요. 나는 무신론자가 되기에는 믿음이 부족하다 해요. 나는 무신론자가 되기에는 믿음이 부족하다. 둘 다 믿음의 문제라는 거죠. 둘 다 믿음의 문제문 문제인데 그 믿음이 얼마나 실제적인 증거와 그리고 이성과

조화를 이루느냐의 문제인 겁니다. 어 하지만 믿음이 먼저 오는 것을 성경은 말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여기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 믿으시는 분들은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합리적인 것이다라는 것이 이해가 되실 거예요. 그러니까이 순서가 바뀌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내가 이것들을 다 재보고 계산해 보고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나니까 어 이해가 되네. 아 그러니까 믿어야겠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고 그리고 나서 성경의 말씀들을 보니까

어 이렇게 저렇게 다 이해가 되는구나. 아 이렇게 하니까 이게 설명이 맞구나. 합리적이구나.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라는 거예요. 어 여전히 사실은 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분명히 남아 있어요. 그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근데 그것에 대해서 믿는 사람은요. 어떻게 생각을 하냐면은 그건 나의 이해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예.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거예요.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그 사실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냐 하면요. 그거는 또 다른 믿음의 측면에서 오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시다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에서 와요. 어, 뭐냐 하면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라고

해서 다 믿는게 아니다라는 거예요. 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게 아니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는 하는데 그 하나님이 세상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 대해서도 전혀 심판하지 않을 거야라고 그렇게 믿는다면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별로 달라질게 없는 거예요. 그냥 어 여기서 손 들어 보라 그면 아무도 안 들겠죠? 외계인이 있다라고 믿는 사람 네. 어, 그냥 외계인이 있다라고 믿고 사는 것하고 다를게 아무도 없어요. 그렇죠? 그냥 그것에 대해서 믿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 누군가는 안 믿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실제 내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아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것은요. 하나님이 단순히 계시다라는 것만 믿는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믿는 거고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 중에서 가장 중요한게 뭐냐면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상주시는 분.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관찰하시고 보시고 그것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거예요. 어,

그렇기 때문에 300년이 됐든지 500년이 됐든지 계속해서 그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은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보고 계시고 이것에 대해서 상을 주시거나 혹은 벌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에녹을 그 좋은 본으로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겁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이 동행의 삶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하신다라는 것을 알게 하신 거예요. 어, 에녹의 300년이

순탄했을 거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처음에 동행 얘기할 때 숲속에서 하나 입고 돌아다니고 그것만 생각하면은 굉장히 순단하게 막 [목을 가다듬음] 편 평온하게 그렇게 300년을 살았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어,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한번 생각해 보면요. 노아 때에 노아 때

그때 세상이 어떻다라고 성경이 말을 해요. 그 땅 그때 그 세상에 사람들의 죄가 가득했다라고 얘기를 하죠. 그렇죠? 근데 노아 때 그 당시에 사람들의 수명을 생각해 보면요.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은 에녹대에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네. 똑같은 사람들. 물론 똑같은 사람 다 똑같진 않겠지만. 근데 그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이나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라는 겁니다. 그 죄악된 세상 속에서 에녹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그 300년 동안 지키면서 살았고요. 그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은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노아를 좀 살펴볼게요. 어, 7절에 보시면요. [목을 가다듬음] 노아는 어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어 아벨과 에녹이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의 믿음의 모습이 삶의 방향이랄지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지 이제 그런 모습을 보여줬었다면 노아는 조금 더 구체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 줘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여기 표현에 따 따르면은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죠?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해 주셨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았고요. 경외함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어, 창세기 말씀에 보시면 어, 잠깐 펴 볼까요? 창세기 6장에 [목을 가다듬음] 보시면 예, 성경 제일 앞에 있습니다. 창세기 창세기 6장 9절에 보시면 노아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를 해요. 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을 합니다. 어, 여기 이제 아벨의 아벨과 에녹에게 사용됐던 표현이 노아에게 다 사용이 됐어요. 물론 이제 아벨의 의로움에 대해서 신약에서 사용을 한 거지만 여기 보면은 노아에 대해서 의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에녹이 에녹에게 사용됐었던 것처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어,이 대용수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었던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서 살아갔었던 사람이고요. 홍수는 그의

믿음을 증명했고 그리고이 세상에 그 당시 세상에 믿음 없음을 정죄하는 하나의 도구가 됐었던 겁니다. 어 노아 이야기가이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예요. 물론 이제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은 좀 다른 문제긴 한데 어 어쨌든이 노아 당시의

세상은요. 그야말로 죄가 어 충만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렇죠? 죄가 가득한 세상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가득 채우시기 전에 그 세상은 죄로 가득차 있었다라는 거예요.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악했다라고 여기 6장 5절을 보시면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물로 쓸어 버리기로 결정을 하셨어요. 근데 8절을 보시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이 이 8절 말씀이 9절 전에 나온다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 좀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뭐냐면요. 노아의 의로움이 먼저 나온게 아니라 뭐가 먼저 나왔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 의로운 노아에게 은혜를 주신게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노아가 의로울 수 있었다라는 거예요. 어, 그런 부분도 우리가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그런 노아한테 하나님께서이 전 지구적인 홍수를 통해서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이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어, 노아에게 있어서 전 지구적인 홍수라는 것은 아직 일어난 그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일, 그러니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을뿐만 아니라요. 그 전에도 일어났었던 적이 없었던 일이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만약에 지금 하나님께서 화평행지한테 나타나셔 가지고 어, 내가 세상을 물로 멸망시킬 건데 지금부터 유평 옥상에다가 배를 지어라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못 믿을 것 같아요? >> [웃음] >> 아, 고민하네. 저는 당연히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은 한번 하셨잖아. >> 그렇죠? 한번 이미 성경에 기록이 돼 있잖아요.이 그렇게 돼 있으니까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아, 또 그렇게 하실 수 있겠네라고도 생각을 할 수 있겠죠. 물론 하나님께서 이제 무지개를 보여 주시면서 다시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가면 네. [웃음] 하나님 그거 아니잖아요라고 하겠지만 근데 그 홍수에 대한 것만 생각을 하면 어쨌든 하나님께서 한번 그렇게 하신 걸 알고 있으면 그 이후의 사람은 아 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라는 거죠. 어 근데 노아의 경우는 이제 그런 경우도 아니었었던

거예요. 그렇죠? 어 물론 이제 세상의 창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 물과을 구분하신 것을 노아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 물과 개인, 물과 육지의 경계를 정하신 이후에는 그 물이이 육지로 넘어올 수 없게 됐다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근데 하나님께서이 홍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거고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어 사실은 그렇게 받아들이기 쉬운 얘기를 하신 것이 아니었다라는 거죠. 어, 생각해 보면요. 이미이 당시에 노아는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죠? 생각해 보세요.요 상황을 생각해 보면은 노아는 방주를 짓기 전에도 주변 사람들한테 좀 제 이상한 거 같아라는 말을 들었을 법한 그런 사람이에요. 근데 그런 노아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한 일을 지금 하라라고 말씀을 하신 상황인 겁니다. 누가 와서 물어볼 수 있어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물어보면은 그것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라고 하신 거예요. 자, 그럼 노아가 어떻게 했을까요? 6장 제일 아래 22절에 보시면은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라고 합니다.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그대로 다 했다라는 거죠.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이 이 노아의 이상 행동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면은 설명이 불가능한 행동인 거예요. 어, 비가 올 것 같은 징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죠? 뭐 해수면이 계속해서 뭐 높아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점점점 고지대로 몰려들고 있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 거예요. 막 여기저기서 막 물에서 땅이 아, 물에서 땅이 된다. 땅에서 물이 물이 막 이렇게 분출돼서 나오고 막 그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막 일어나면서 전 지구적인 기상 뭐라 그러죠?이 이 이상 기후 같은게 막 일어나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 거다라는 거예요. 근데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대로 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으로 다시

가서 보시면 히브리서의 저자는요. 노아가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노아가 했었던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가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반드시 홍수가 일어날 거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 보시면요. 어 그로 인해서 그와 그의 집은 구원을 받았고요. 세상을 정죄했다라고 말을 해요. 그렇죠? 어,이 말씀을 잘못 들으시면은 이제 노아가 방주에 타 가지고 막 이렇게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막 보면서 하하 꼴 좋다. 내 말 안 듣더니 막 다 멸망해서 죽네. 막 정제했다. 막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네. 그런 의미에서 정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어, 믿음의 순종으로서 그의 믿음의

순종으로서이 세상의 불신과 불순종을 드러낸 거죠. 그렇죠? 어 뭐냐하면요.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노아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요.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변명할 수 있었을 거예요. 왜냐하면은 그때 세상에 죄가 가득했기 때문에 정말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하고 상관없이 그냥 자기 길을 따라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데 어떻게 나만 혼자 하나님 믿으면서 살 수 있겠냐?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라는 거죠. 어떻게 그런 세상이 지금 이런데 내가 여기서 어떻게이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 다르게 살 수 있겠냐? 내 그냥 이렇게 사는게 맞아라고 그렇게 자신을 합리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다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근데 예외인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노아는 그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다른 선택을 했었던 그러한 사람이었었던 겁니다. 어, 사람들은요. 그 당시의 사람들은 사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게 아니고요. 하나님을 믿지 않았었던 거예요. 죄가 하나님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어, 마태복음 24장 37절에서 39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뭐 했냐면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경고를 하셨고요. 그리고 노아가 분명히 그 당시에 설교자가 돼서 선지자가 돼서 그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사람들을 경고했을 거예요. 그렇죠? 어, 그리고 나서이 실제로 홍수가 시작되기 전까지 분명히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있었어요. 근데 사람들은 신경 쓰지를 않은 겁니다. 아무도 그 말을 듣지를 않은 겁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노아의이 믿음의 순종이라는

것은요.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두워져 있었는지를 드러냈었던 그러한 빛과 같았다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노아가이 세상을 정제했다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7절 끝에 보시면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라고 말을 합니다. 어 노아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순종의 삶으로 증명이

됐습니다. 그가 행위를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아니라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다라는 것이 증명이 됐습니다. 어, 우리가 믿음이 있다라고 말을 하면요. 우리가 의의 상속자라고 그렇게 말을 한다면요.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이에요. 보이지 않는 일, 본 적이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에 순종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또 거절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되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일이에요. 어,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어, 오늘은요.이 믿음의 대열에 가장 앞에서 있었던요 세 사람을 살펴봤습니다. 물론요 세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어,이 세 사람을 살펴봤어요. 어, 근데요 세 사람의 삶을 보면요. 좀 비슷한 면이 있고 좀 다른 면이 있어요. 그렇죠? 분명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어, 누구 삶이 제일 좋으신가요? 어차피 믿음의 삶인데 누가 제일 좋아요? >> 에녹. >> 에녹. 그렇죠. [웃음] 고르라 그러면 다 에녹 고르겠죠.

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살례를 당했어요. 그렇죠? >> [웃음] >> 교회 한번 와서 예배드렸는데네 그렇게 됐다라고 생각하면은네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닐 수 있죠. 어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옮겨졌습니다. 노아는 노아는이 땅 가운데 있었을 때 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을 했고요. 그렇죠? 경험을 했고 그리고 나서 나중에 어 죽었습니다. 어 결과를 놓고 보면요. 에녹이 믿음이 제일 컸었고 그다음이 노하고 그다음이 아벨인가 이제 그런 생각이 들 수 있고요. 혹은 반대로 어 억울하게 아벨이 죽임을 당했으니까

아벨의 믿음이 제일 큰 거 같고 편안하게 살았던 에녹은 조금 아래 있는 거 같고 이제 그러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이 말씀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난을 당하고 어떻게 하면 이적을 경험하고 이제 그런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죠?이 이 말씀은 뭐를 얘기해 주고 있냐면요. 이들이 믿음으로 살았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들이 각각의 삶을 살았고요.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다른 모습들로 그들의

삶에 보상을 해 주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에 따라서 살았고요. 그 결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어요. 받아 주셨어요. 어 우리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요. 사실은 과정일 뿐이에요. 그렇죠? 어 아벨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은 원하지 않는다라는 [웃음] 생각이 드는 이유가 어 그것이 뭔가 결과인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요. 그렇지 않아요? 근데 생각해 보면은 그것도 과정입니다. 그렇죠? 아벨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어 각자가 다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게 된 것일 뿐이지 이들 모두가 다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라는 것은 다르지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주신 거고요. 누구에게는 저런 삶을 허락하신 거고 그 다른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똑같이 보기 원하셨던 것은 뭐냐면은 믿음이었던 거죠. 믿음의 순종이었던 거고요. 그 믿음을 보실 때 기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 보시면요. 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네. 어, 하나님은 믿음을 보기를 원하세요. 우리들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어, 제자들하고 그래서 같이 계실 때도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적들이 있는데 뭐에 대해서 책망을 하셨냐면은 너희가 이렇게 믿음이 없냐? 너희가 믿음이 왜 이렇게 작냐? 그런 것에 대해서 이들을 책망을 하셨어요.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믿음을 발견하고 굉장히 기뻐하셨던 적이 있어요. 어,

백부장이 와서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나을 겁니다. 주님 오실 필요 없고요.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고 칭찬을 하십니다. 그렇죠? 그 믿음을 보고 기뻐하신 거예요. 어, 수로 보니의 여인이 이런 말을 하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네. 그 얘기를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크다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기뻐하신 겁니다. 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들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런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두실 때가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들에게는 어 때로는 아벨 같은 일이 될 수도 있고요. 때로는 에녹 같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거고 노아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각자가 다른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두시고요. 그 안에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믿음에 따라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기도하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어 하나님도 오늘이 말씀을 통해서 어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졌던이 믿음의 선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또 어 묵상해 볼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하나님 참 우리의 삶이 참 이러한 삶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참 작고 초라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들, 내가 힘들다라고 말하는 그런 힘든 것들이 참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상황이고 또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기 원하심을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 그곳에서

믿음을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심을 또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들 각자 각자의 삶 가운데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들에게 또 믿음을 더욱더 강하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기뻐하시기를 원합니다.들은 말씀을 주님께 맡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

이어서 살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