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악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23절). 이는 빌라도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무리 중 한 사람에게 “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선동되어서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중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는 ‘신성모독’이라고 답을 했을 것입니다(마 26:65). 하지만 “예수가 어떤 신성모독을 했습니까?”라고 한번 더 묻는다면 그 역시 제대로된 답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기준으로 하든 그들의 전통을 기준으로 하든 신성모독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어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을 그냥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예를 들어 잘못을 해서 매를 맞는 경우에도 내가 잘못한 것은 알지만 그렇게까지 잘못을 했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명백한 내 실수로 어떤 일이 틀어질 때도 그것을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하고 나를 변호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물며 잘못한 것이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억울한 것을 참지 못합니다. 부당한 고난은 절대로 나에게 있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나의 권리를 위해. 나의 명예를 위해. 나의 자존심을 위해. 나를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전에만 해도 예수님을 말로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어려운 질문을 해대던 사람들을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드셨던 분이(마 22:46), 이런 부당한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일인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동일인물이 맞습니다.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셨을 때도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때도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셨을 뿐입니다. 나의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엇’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이런 인내의 목적 중 하나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나를 위해 싸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삶입니다. 부당한 고난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꺼이 침묵을 택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셔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기꺼이 따르는 내가 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