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정말 무엇이 손해인지 아는 지혜

최종혁 · 2024.05.31 · 고린도전서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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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의 문제에 이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성도 간의 송사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앞의 음행의 죄는 두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음행 자체가 큰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가 그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않고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여기 송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사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교회가 성도 사이의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성도 사이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교회 안에 없다는 사실에 통탄했습니다. 성도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표현을 보면 음행과 다르게 그 문제 자체가 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둘 사이에 판단 혹은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더 얻기 위해 싸웠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개인 사이의 문제가 그렇게 커졌는데 교회가 지혜롭게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이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까지 가지고 간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여기서 다루는 죄는 형법이 아니라 민법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형법 상의 죄가 발생했다면 이 말씀을 근거로 그것을 덮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성도 개인을 보호해야할 부분은 보호하겠지만, 세상의 법에 따라 처벌 받아야 할 것은 처벌 받게 해야합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간의 이해 관계가 얽힌 것이라면 교회는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를 죄의 문제로 만든 것은 성도 개인의 이기심입니다. 그들은 양측 모두 손해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가 세상의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일지라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욕을 받게 되고,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무의미하게 보여져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내가 손해보지 않고 이익을 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묻습니다(7절). 그렇게까지 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와의 관계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얻어야할 중요하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참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어리석음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이 참 괴롭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오히려 멋있어 보이기까지 할텐데, 그게 되질 않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만큼 여전히 나에게는 내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얻어봐야 결국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얻기 전까지는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이걸 중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가장 심각한 중독일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손해고 어떤 선택이 유익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주시길, 그리고 그 지혜에 따라 결단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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