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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낙심하지 않게 하는 믿음
본문 :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설교자 : 최종혁
다른 제목은 ‘보물이 모든 것을 바꾼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말씀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바꾼 사람이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 다르게 말하면 구원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구원을 받는 것’, ‘영생을 얻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로 비유하십니다. 뜻밖의 보화를 발견한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단순하고 짧은 비유입니다.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구원의 가치, 영생의 가치가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보다 크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가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소작농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소유가 있었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소유를 팔아서 밭을 산 것을 보면 그 정도의 재산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밭을 가지지 않고 소작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당연히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밭을 살 이유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집도 없고 살림살이도 없이 밭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집에 아내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와 다름없이 밭일을 하러 나갔던 남편이 헐레벌떡 돌아오더니 집문서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모든 살림살이를 다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 다 팔겠다고 합니다. 그걸 다 팔아서 밭을 하나 사겠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고 뜯어 말릴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회사 갔다 온 남편이 엄청난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집 다 팔고 그거 하자고 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전혀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하나의 일에 대해서 한 사람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한 사람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요?
보물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포기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매일 아침 힘든 몸을 일으켜 직장을 향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얻을 가치가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는 가치가 더 많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직장을 바꿀 생각을 합니다. 자연스럽고 현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정말 중요합니다. 무엇의 가치를 더 높게 혹은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분명 다른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달라진 삶은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꽤나 극단적이고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보고 있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바꾼 사람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종교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지 뭐. 의지할 수 있고 위로도 되고 보람도 느낄 수 있고. 사이비만 아니면 무슨 종교든 나쁠 것 있나.’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대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광신도’를 싫어 합니다. 적당히 종교 활동하면서 사람들하고 어우러져 살면 되는데, 굳이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하거나 혹은 다른 것보다 종교 활동을 우선시 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삶의 의지도 되고 위로도 됩니다.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삶 속에 삶의 보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신을 믿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 믿는다고 힘들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그 정도의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은 세상에도 많습니다. 보람 있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하실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지불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지와 위로, 보람, 평안을 위해서 그렇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과도한, 혹은 어리석은 투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어리석은 일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것을 택했습니다. 그의 배경이나 그가 받은 교육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그의 학력, 지식수준, 열정을 생각해 보면 그는 뭐가 되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 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누리고 있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선택해서 그분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칩니다. 이런 선택을 했으면 결과적으로 뭔가는 좋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삶을 보면 ‘그럼 그렇지. 유망한 청년이 예수 때문에 인생 망쳤네.’라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바울이 당했던 일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바울이 당했던 일들 -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함”, “답답한 일을 당함”, “박해를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8~10절)이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이 당했던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후 11:23-27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처음 구원 받고 세우심을 받을 때부터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행 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실제로 바울은 구원을 받은 직후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일을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행 9:23). 그가 예루살렘으로 도망해서 그곳의 성도들과 교제하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바울과의 교제를 두려워했습니다(행 9:26). 바나바의 노력으로 성도들의 영접을 받고 또 다시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했지만 사람들을 또 다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행 9:29).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직후 계속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힘썼고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했다”(고후 4:12)는 그의 고백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갔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주변에서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겠지만, 바울 자신은 어땠을까요? 바울 스스로도 후회스럽고 왜 이런 삶을 내가 살아야 할까 회의감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바울의 고백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낙담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힘이 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것을 원합니다. 좀 더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려운 상황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그럼, 바울은 전혀 낙심하지 않을 만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저 고난없이 평안한 사람이 하는 배부른 소리였을까요? 어려움 중에 낙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네가 이런 일 당해 봤어?” 같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말이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더한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말은 어떤가요? 바울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면 그는 분명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바울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겉사람이 낡아져 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감당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육체적으로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되어갑니다. 바울은 여러모로 점점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낙심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가 당했던 모든 일들은 그가 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그는 그런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멈추면 그만입니다. 그 일만 하지 않으면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비결
그 비결에 대해서 17~18절에서 설명합니다.
- 그가 알고 있었던 사실
- 그가 보고 있었던 영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