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 같은데, 예전에 ‘백마 병’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왕자를 태운 백마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인사하고 절하는 줄 알고 우쭐하는 것에 빗댄 표현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내가 아닌 내 옆의 사람, 주로 내가 ‘모시고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향하고 있는데 마치 나에게 그 관심이 향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단순히 관심에 대한 착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마치 자신이 어떤 힘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위에 있는 그 사람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게도 머리를 조아리니, 실제로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참 말이 예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백마 병에 걸린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표현에서 아름다운 것은 ‘보배’이지 ‘질그릇’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배를 담고 있으니 질그릇도 아름다운 것 아니냐는 쪽으로 자꾸 생각하고 그렇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자꾸만 ‘나’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 내가 보배가 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그런 의도를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귀한 자들이 되었는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목적은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7절).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게 하려 이 귀한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질그릇이 귀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질그릇이 귀하면 보배는 그만큼 덜 귀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보배가 더 드러나게 하기 위해 질그릇은 욱여쌈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항상 죽음에 넘겨집니다. 질그릇은 정말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질그릇은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구원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여 심히 큰 능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셨던 그 창조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입니다(6절). 그렇게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게 되었고, 질그릇의 연약함은 보배의 가치를 더 드러냅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표현을 좋아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좋아해야 합니다. 내가 귀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리스도와 복음을 귀하게 드러내시기 때문에 좋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 낮아지고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바울처럼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후 12:9-10). 질그릇임을 기뻐하고 더 천하고 낮은 그릇임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더 영광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마같은 질그릇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낮아지고 하나님께서 드러나실 때, 더욱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