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에 대한 말씀은 언제나 쉽게 읽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살고 있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헌금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믿어온 신앙의 유산을 귀하게 생각하고 지켜 가고 있습니다.
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성경에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또 연구하여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성직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씀을 알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 눅 11:37-44, “진짜 바리새인 되기” 설교 중
신실한 성도의 고백으로 들리는 이 고백을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동일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처음부터 ‘난 외식적인 삶을 살아야지’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소경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려고만’ 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위선적인 삶으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속이 그렇지 않으니 오히려 겉만 더욱 신경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고(27절)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도 하셨습니다(눅 11:44).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 꾸미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 속(진실)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숨기고 싶을수록 사람은 더욱 겉을 꾸밉니다. 교회로 치면, 더 주일에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교회 일에도 열심을 냅니다. 봉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주로 ‘일’에 집중합니다. 그게 자신의 ‘안’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으로 보여줄 수 있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사람’과도 잘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절하게 말하고 얘기도 잘 들어두고 위로도 잘 합니다. 앞의 경우가 회칠한 무덤에 대한 묘사에 가깝다면 이 경우는 평토장한 무덤에 대한 묘사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덤 위에 서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외식의 죄’의 위험이 누구보다 나에게 매우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한켠에 늘 있습니다. 그래야 ‘본’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가 되어야지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면 외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본입니다. 내 눈이 밝아져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 내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말했던 ‘겉’도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안’이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가득하여, 나의 겉이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매순간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내 눈이 더욱 밝아져서 그리스도를 밝히 보는 만큼 나의 삶도 그에 합당하게 변해갈 것입니다. 겉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을, 우리의 눈을 밝혀 참된 것을 보게 하시고, 세상의 허망한 것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것을 따라 살 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