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는 주님께 어떤 책망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고난 중에 인내하며 충성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부유한 만큼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삶의 모든 것들이 종교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환난을 당했고 궁핍해졌습니다.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누리며 살아왔던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잃게 되었지만 이들은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았고 믿음을 지켜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쩌겠냐며 그래도 힘내서 견뎌보라는 식으로 격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현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고난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투옥될 것이고 순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서 그들에게 생명의 관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기준, 즉 이 세상이 전부라고만 생각하면 “죽고나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만, 부활의 삶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확실하고 의미있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은 비극적인 결말이 아니라 진정한 영광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은 절대로 과하지 않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기로에서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말씀의 의미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전하면서도 가끔은 듣는 성도들에게 이런 요구를 해야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미 많이 수고하고 있고 이미 많이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그런 순종을 말하는 것이 마치 짐을 더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데 적정선은 없습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62). 끝까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하여 믿음의 증거를 나타낼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환경이든 그렇게 충성할 각오는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피를 흘리고 죽는 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많은 손해를 보고 살 수도 있습니다. 남들 다 하는 뭐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미안한 선택을 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더 가난하게 살아야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이 아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삶을 영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워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모든 것이 없어도 그리스도로 인해 부요한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요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