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 있는 사람(들)

본문: 마태복음 23:13-36

설교자: 최종혁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누구도 화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을 7번이나 사용하셔서 화를 선포하셨다. 그 대상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신학자와 목사 정도에 대응할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서기관들이 좀 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바리새인들은 실천적인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하고, 어떻게 삶 속에 율법을 녹여낼지를 고민하여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것이다. 왜일까?

먼저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이들이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 아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을 기득권에 대항하고 약자의 편에 서셨던 분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셨지만, 이렇게 당시 경건한 자들로 여겨졌던 사람들, 사회에서 인정받던 사람들은 호되게 책망하시는 모습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본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잘못 보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들 나라를 구원할 정치/군사적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마치 사회운동가처럼 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책망 받았던 궁극적인 이유는 영적인 데 있지, 단순히 그들이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셨던 것처럼 바리새인과도 함께 식사하셨다. 세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셨던 것처럼 바래새인도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 비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더 엄한 책망의 말씀을 하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자기 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이 부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8:9-14). 바리새인은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더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포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어야할 자들을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었던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없는데,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은 의롭다고 믿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들은 다른 사람을 멸시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며 판단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마 9:13). 바리새인들이 의인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이들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일 뿐이었다(눅 16:15). 이들은 경건을 추구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은 ‘많이 받은 자들’이었다.

눅 12:48 …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이것이 성경의 원리다.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인도자들로서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13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 문”의 문지기와 같은 역할을 했음을 말씀하신다. 물론 그들이 누가 천국에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로서 그들이 가졌던 특권과 책임이 막중했음을 알 수 있는 표현이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세대와는 비할 수 없는 특권을 가졌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그들 앞에 계셨던 것이다. 그분의 전령이 와서 그들의 죄를 책망했고, 그분이 직접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셨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적했다. 계속해서 논쟁하고 비판했을 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능력을 행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정치세력과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두어시간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포장된 물질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진리도 아니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이 땅에 속한 것들이었다. ‘자기 의’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해서(눅 16:14),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눅 20:47). 25절에서 예수님은 그들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것들을 원했고, 심지어 이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으니,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더 나아가서 그냥 내버려두어서도 안되는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호되게 책망하신 이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즉 많이 받은 자들로서 자기 의만 추구했다는 부분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똑같이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롬 2:18–20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두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백성들을 정확히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인도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게 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그냥 지켜보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어 끝내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이 사람들을 좋게 타이를 수는 없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이 화는 어리석게도 이들을 따랐던 백성들에게도 해당된다. 결국은 그들도 똑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무지했던 것이 아니라 어리석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선포했던 영적 인도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따른 것은 거짓 인도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선포하신 화는 그들을 따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을 손가락질하면서 나를 그들과 분리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화가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 역시 이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지 않도록,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봐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신앙, 외식하는 신앙에서 멀어져야 한다.

전체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외식하는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대한 반응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 유념하면서 말씀을 살펴보자.본문에 선포된 7개의 화는 2개씩 짝을 이루고 마지막 7째 화는 전체의 결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본문을 나눠서 살펴보자.

화 있을진저! 열심만 있는 자들이여!(13-15절)

첫 두 화의 선포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의 모습 중 열심만 있는 부분을 지적하신다. 진리를 모르고 거짓에만 열심을 낸 결과는 정말로 끔찍하다.

마 23:1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여기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저주’와는 다르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어떤 복수심이나 나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화를 선포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측면이 모두 다르다.

첫째로, 예수님은 대상들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복수심을 품고 계시지 않다. 사실 “화 있을진저”라고 번역된 단어는 감탄사로서 비탄의 감정을 표현한다. 따라서 ‘슬프다’라고도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다. 예수님을 적대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고 해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아는데 이르기 원하시는 긍휼의 마음을 예수님은 가지고 계셨고, 그 대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로, 예수님은 단지 그들에게 임할 화 혹은 심판을 바라고 계셨던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선포’다. 3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판결은 정해져 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저주의 말이라도 퍼붓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정해져 있고, 예수님이 바로 그 심판의 주시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가운데 화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화를 선포한 대상은 특별히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외식한다”는 것이고, 이어지는 말씀들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은 ‘외식’보다는 ‘위선’일 것이다. 위선은 거짓으로 착한 척을 한다는 뜻이고, 외식은 겉만 그럴 듯하게 꾸민다는 뜻이다. 겉을 의미하는 ‘외’에, 꾸민다(장식)는 뜻의 ‘식’이 결합된 단어다. 원어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의 앞과 뒤에서 묘사하신 모습을 봐도 위선보다는 외식이 더 적합한 표현이기는 하다. 이들은 거짓으로 착한 척을 한 면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것이 착한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한 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을 “눈 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이라고 표현하셨다(16, 17절). 즉, 보고 있고,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잘못된 길을 간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보지 못해서 잘못된 길을 실제로 바른 길이라고 믿으면서 열심을 낸 것이다.

그 결과로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았다(13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인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며 그들을 인도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오히려 천국 문을 닫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안에서 닫은 것이 아니라 밖에서 닫았다. 그래서 그들도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예수님의 이 표현은 정말로 생생하게 이들의 죄를 묘사한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고 싶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천국 문까지 인도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린다.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둘째로 그들은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들었다(15절).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 그들의 열심을 강조하신다. 그들은 찾아오는 사람들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 어느 곳이든 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인’은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교인 한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이방인을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한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셨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땅의 온 민족에게 복을 주기 원하셨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들의 열심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이들이 진리 없이 열심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교인을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뿌듯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된 소식을 전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한 일은 원래 지옥 자식이었던 사람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든 것 뿐이었다. 심지어 그들 자신보다 더 지옥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이단을 보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단을 통해 ‘새로운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원래 그 안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그 새로운 진리를 추종하고 전파한다. 진리가 없는 이들의 열심은 전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 자신도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천국을 찾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고, 원래 지옥 자식이었던 사람들은 더 지옥 자식을 만들었다. 이들의 열심은 더 큰 화를 가져올 뿐이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 이렇게 진리 없이 열심만으로 거짓을 증거하는 자들이 많으니 조심하고 잘 분별해야 한다. 이들의 열심은 우리의 예상을 항상 뛰어넘는다. 그래서 ‘저 정도의 열심이라면 뭔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그들의 열심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열심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나도 조금씩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리가 사라지면 신앙의 열심은 결국 재앙이 된다. 계속해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 거하고, 그 진리에 따라 열심을 내야 한다.

화 있을진저! 말씀의 의도를 무시하는 자들이여!(16-24절)

다음으로 셋째와 넷째 화의 선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이 결국 외식으로 이어짐을 말씀하신다. 먼저는 이 예로 맹세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마 23:16–22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맹세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며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의미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맹세(서원)는 반드시 지켜야할 것을 말한다.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시편 15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를 자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했다(시 15:4).

즉, 맹세는 진실을 확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악용해서 오히려 거짓말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맹세를 사용했다. 맹세를 하긴 했는데, 성전의 금으로 하지 않았으니까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제단 위의 예물로 맹세해야 하는데, 제단으로 맹세했으니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말씀이 주어진 의도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의 맹세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예가 이혼에 대한 명령이었다. 구약의 신명기에서 이혼을 할 때는 “이혼 증서”를 써 줄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이혼하기 원하면 이혼 증서를 써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8). 즉, 이혼 증서에 대한 말씀은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의도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하고, 악한 마음으로 이혼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최소한 이혼 증서를 통해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씀의 의도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취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궤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십일조에서도 드러났다.

마 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들이 십일조에 대해서 얼마나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지를 강조하신다. 이들은 박하와 회향, 근채까지 십일조를 드렸다. 아주 작은 식물까지 챙겼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명하셨다. 이것은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기도 했고 세금 같은 개념이기도 했다. 그것을 통해 제사장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재정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절기를 지키고 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소산의 10%를 바칠 것을 말씀하셨다.

문제는 어디까지를 ‘소산’으로 볼 것이냐였다. 누군가는 자기 논과 밭에서 난 소산의 십일조만 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자기 집 텃밭에서 난 소산의 십일조까지 했을 수 있다. 누군가는 텃밭 옆에서 키운 약간의 작물에 대한 십일조까지 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자기집 화분에서 키운 것에 대한 십일조까지 했을 수 있다.

사실 끝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경건을 나타내기에 좋은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더 작은 것까지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더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디까지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를 고민하면서 본래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명령하신 본질은 잊었다. 단지 십일조를 통해 누가 더 경건한지 경쟁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말로 중요한 정의, 긍휼, 믿음은 잊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들은 정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했다. 믿음으로 살아야 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그런 나라를 만들고, 그렇게 하나님을 전파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허브 이파리를 세며 10개 중 1개를 하나님께 드리면 더 경건해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을 통해 십일조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벗어나서 불필요하게 사소하고 지엽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소하게 여기고 사소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모습을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표현하셨다. 하루살이든 낙타든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동물들이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일은 하루살이를 걸러 내는데만 집중하여 훨씬 더 큰 낙타는 삼키고 있는 모순된 모습이었던 것이다.

맹세에 대한 말씀과 여기 십일조에 대한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의도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말씀의 의도를 왜곡하여 자신들에게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적용했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말씀이 말하고 있는 이상을 하려고 했고,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의도보다 자신들의 생각이 더 중요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그러니,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없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말씀을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각하고 같은 말씀은 좋은 말씀이고, 내 생각하고 다른 말씀은 내가 원하는대로 다르게 해석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재단하면, 남는 것은 외식하는 신앙생활이다. 말씀이 드러내는 나의 죄는 감추고 합리화 하면서, 내가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만 드러낸다. 그러면서 나는 경건한 자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읽고 받아야 한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고 진정으로 경건한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화 있을진저! 겉으로만 옳은 자들이여!(25-28절)

결국 이런 말씀에 대한 태도는 겉만 옳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외식인을 만들어 낸다.

마 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을 매우 직접적으로 대면하신다. 첫째로는 이들을 그릇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이들이 그릇의 외적인 정결에 신경쓰는 모습은 실제로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건에만 신경쓰고 그들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은 내버려두고 있는 모습과 같았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이들을 무덤에 비유하셨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 볼 때 하얗고 깨끗하게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무덤의 겉을 깨끗하게 한다고 해도 그 안에 있는 것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이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와 같다고 하셨다. 겉으로 볼 때, 즉 사람들이 볼 때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의인이라 하지만 그들 안에 가득한 것은 외식과 불법, 죄일 뿐이다.

26절에서 예수님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신다. 참된 경건은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와 경건을 채울 때에, 비로소 겉이 깨끗해 진다.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원리를 부정했다. 외적인 행위와 내면의 죄를 분리했다. 그 둘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했다. 깨끗한 겉이 더러운 내면을 덮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볼 때는 이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추측할 뿐이다. 그러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이야 어떻든 밖만 깨끗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자기 의’, 즉 사람들 앞에서 옳게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내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했다고 한다 해도, 하나님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신다. 겉으로만 아름답고, 겉으로만 옳은 자는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오직 심판을 받을 것이다.

화 있을진저!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여!(29-36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궁극적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한다.

마 23:29–3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그들은 마치 그 선지자들을 죽였던 조상들과는 다르다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32절에서는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결국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시이신 예수님을 죽일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후로도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낼 것이라도 하신다(34절). 참된 영적 지도자들을 보내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외식하는 자들은 결국 그들도 죽이고 핍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로운 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외식하는 자들은 진리를 싫어한다. 진리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리가 선포될 때에 진리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그 진리를 전하는 자를 죽였다. 진리에 귀를 닫았던 것이다. 경고 표지판을 보고 멈춘 것이 아니라, 계속 가고 싶어서 경고 표지판을 부순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결국은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다.

도전

결국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는 가장 좋은 종교인들일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외식하는 기독교인들이 그렇다. 이들은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도 잘 돕는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투자하기도 한다. 세상이 바라는 그런 종교인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이 최우선에 있는 일이라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혹독하게 책망하셨던 화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우리도 처음에 말했던 ‘많이 받은 자들’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다. 우리에게 완성된 진리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내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영원에 속한 것인지, 이 땅에 속한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사람에게 속한 것을 바라고, 이 땅에 속한 것을 바라면, 결국 나의 신앙 생활은 외식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무엇보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말씀을 내 입맛에 맛게 왜곡하거나 축소하거나 혹은 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으로 내 삶을 다듬어 가고 있는지 돌아 봐야 한다. 열심을 내기에 앞서 그것이 진리에 대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항상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또 다른 나의 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외식은 멀리 있지 않다. 사탄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거짓 신앙인으로 만드려고 한다. 그렇게 거짓 신앙을 가지고 마치 천국 백성이 된 것처럼 살게 되기를 사탄은 간절히 바란다. 그만큼 사탄이 기뻐할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화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