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큰 일을 행하사 불쌍히 여기신 주님
본문: 마가복음 5:1-20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복음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는 복음이다(1:4, 14, 38; 2:9, 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능력을 얻으려면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의 열쇠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능히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믿어야 한다(마 1:21):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그렇다. 광풍과 파도가 즉각 순종하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누구겠는가?(4:41).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토록 강력하고 파괴적인 더러운 귀신을 단숨에 제압하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주님이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 또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셨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큰 일을 행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더 굳센 믿음과 진정한 감사로 예배드리자.
1. 큰 일을 행하신 주님
사건은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1절). 마태는 가다라 지방(마 8:28)이라고 했는데, 본문에 기록된 무덤과 가파른 언덕이 있는 장소는 가다라가 맞고, 데가볼리의 더 넓은 지역을 거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마가와 누가도(눅 8:26) 틀린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직전에 갈릴리 바다에서 목숨이 심각하게 위태로울 정도의 광풍과 파도에 시달렸고 마침내 위험한 바다 밖으로 나와 안전한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건 미친 바다보다 더 무서운 미친 사람이었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2절). 숨돌릴 틈도 없이 즉시 예수님께 달려 나온 사람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 3-5절까지 마가는 이 사람을 장악한 귀신이 얼마나 통제 불능의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 아주 생생히 묘사한다.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첫째로 귀신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이 사람을 장악했다: “아무도 그를”(x2). 고랑과 쇠사슬로 수없이 묶어봤지만, 삼손이 결박한 것을 손쉽게 끊어버린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번번이 깨뜨렸다. 둘째로 귀신은 파괴적으로 타인을 위협하고 자신을 망가뜨렸다. 가족을 포함한 주민 모두가 그를 거주지 밖으로 쫓아냈고, 그래서 무덤 사이에서 죽은 시체처럼, 산에서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귀신의 통제를 받을 땐, 연쇄살인마처럼 타인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변하여 단단히 묶어둬야 했고,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땐, 이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스스로 소리 지르며 돌로 자해했다. 성경에서 이처럼 비참한 삶을 산 사람은 모든 재물과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고 온몸에 종기가 생겨서 밤낮 고통으로 시달린 욥 정도다. 하지만 예수님께 달려 나온 이 사람의 고통이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더러운 귀신이 이 사람을 쉴 틈 없이 강력한 힘으로 괴롭히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마귀는 밖에서 욥의 인생에 재앙과 질병을 줬지만, 이 사람은 안에 들어가 인생 전체를 장악하고 살아있는 지옥, 소망 없는 저주를 맛보게 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모르거나 의심했지만, 귀신은 정확히 알았다. 그래서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했다(6절). 귀신은 예수님께 반항하기는 했지만, 그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처럼 철저히 굴복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절). 괴성을 지르면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둘 것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라고 요구한 것은 귀신의 지극히 반항적인 모습이다. 예수님이 이미 그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절) 명하셨지만, 귀신은 거역하고 싶은 아주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귀신은 예수님께 허락을 간구하며 부르짖었다(7, 10, 12). 귀신을 압제하는 큰 능력이 주님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귀신의 이름을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귀신이 답했다(9절). 이름을 묻는 것은 권세 있는 자의 행동이다(관등성명). 군대(Λεγιὼν)는 로마 군대의 여단 규모를(6,000명) 뜻하는 군사 용어다. 실제로 이렇게 많은 귀신이 한 사람을 괴롭힌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후에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돼지 떼가 수몰된 것을 생각하면(12-3절), 귀신의 말처럼 ‘많은’ 귀신이 이 사람을 장악하고 파괴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 사람 안에 다중 인격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고 타인에게도 극심한 위협을 가한다. 이 사람 안에는 수천의 인격이, 그것도 더럽고 악하며 파괴적인 초자연적 인격이 있었다. 누가 이렇게 많고 강력한 영적 군대를 물리치고 사람을 건져낼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군대 귀신은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만 간청할 뿐이었다: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10-13절). 귀신은 계속해서 이방인의 지역을 장악하고 영혼들을 멸망으로 이끌며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간청을 듣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심판의 장소인 무저갱보다는 돼지에게라도 들어가게 허락해달라고 애원했다: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마 8:31).
이 또한 주님의 허락 없이는 귀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님은 허락하셨고,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무섭고 끔찍한 일을 벌였다. 왜 그랬을까? 읍내와 여러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아왔을 때, 보였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고(15절), 돼지 떼가 당한 일을 보면서(16절)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다(17절). 정확히 귀신이 의도한 결과다. 오랜 세월 귀신 들린 자 때문에 두려워하던 주민들이 그 귀신을 단숨에 제압하고 평안을 가져다준 분을 왜 쫓아내는가? 경제적 손실 때문이다. 수천 마리나 되는 가축은 그 지방 주민의 공동 재산이었을 것이다. 굳이 오늘날 화폐 가치로 계산해 보면 10~15억 정도 규모의 자산을 상실한 셈이고, 이는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귀신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 일을 벌인 거다.
그러면 주님은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모두 다 아신다.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날 것을 다 아시면서도 광풍과 파도를 잠재우고 거라사인의 지방까지 건너오셨고, 결국 쫓겨나실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허락하신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
2. 불쌍히 여기신 주님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함께 있기를 간구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귀신 들렸던 사람이다(18절). 거라사인 지방의 모든 주민들이 예수님과 조금도 함께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왜 그런가? 구원의 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로 뛰어들어 몰사하는 장면은 남들에게 재앙이었겠지만, 그에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의 소식이었다. 내 안에서 저렇게 지독한 발악을 하던 악한 영들이 이제는 내게서 떠나갔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저 묶어두고 방치할 뿐. 주민들에게 그는 무덤에 묻힌 죽은 사람과 다름없었고, 이천 마리의 가축보다 못 한 짐승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다 아시면서도 호수를 건너와 그를 만나서 생지옥과 같은 삶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더라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대가를 아낌없이 치르셨다. 주께서 행하신 큰 일을 목격한 자는 많았다. 돼지를 치던 자들과 귀신 들린 자, 나중에 와서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 들은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놀랐고 큰 일을 행하신 주님을 두려워했지만, 오직 한 사람만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다. 바로 자비를 얻은 사람이다.
주님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함께 있게 해달라는 간구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19절).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가족에게 그리고 나아가 데가볼리에 사는 많은 사람에게 전파했다(20절). 예수님은 후에 다시 데가볼리를 방문하시는데(막 7-8장), 그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주님은 귀신 들렸던 사람을 사용하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귀신 들린 이 사람을 만나지 않으셨다면, 이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이방인 지역에서 빛도 못 보고 철저히 어둠 가운데 살아갔을 이들은 또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놀랍고 감사한 건 주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3.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큰 일을 행하신 주님
전도는 사실 복잡한 게 아니다. 물론, 복음에 관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전달할 수 있으면 많은 유익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전도란 기본적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알리는 것’이다.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얼마나 벅찬 기쁨과 감격 중에 가족들과 재회했을지 상상해 보라.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들과 이웃에게 그렇게 주님을 전하는 거다. 때론 거라사인 지방 주민들처럼 주님이 행하신 큰 일보다 더 커 보이는 것들 때문에 전도에 힘쓰지 못할 때가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 문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나 본인과 자녀의 진로 문제 등.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들이 여전히 작지 않은 일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얼마나 큰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인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할 장애물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배하는 대상을 자연스럽게 전파한다.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관련 소식을 전하기 마련이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 몰입한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변 사람에게 홍보한다. 우리는 왜 주님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가? 우리가 더는 주님께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귀신의 역사로 비참한 인생을 살면서 결국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돌진하는 죄인들을 볼 때, 주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 우리가 말과 삶으로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려면, 그래서 가장 먼저는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으며 얼마나 큰 일을 베푸셨는지 기억해야 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천 마리의 돼지를 죽도록 허락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변호하려고 애쓰는 성경학자들이 꽤 많다. 그들은 예수님이 동물을 학대하는 분은 절대로 아니라고 힘들여 설명한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주님께서 내 영혼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귀하게 보실 뿐만 아니라(마 16:26),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자기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나를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멈춘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증명된 것이다. 나를 향한 풍성한 은혜는 창세 전에 시작해서 영원까지 멈추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환난이 있다. 환난 중에 우리는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데(시 119:71), 이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롬 5:3-4).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환난 중에 즐거워하고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이다(롬 5:5-8).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으신(완료형) 하나님의 사랑. 사랑받기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 아니면 우리는 조금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인생이다. 은혜 아니면 우리의 영원한 결말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저주받은 운명이다. 우리에게 부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할 수 있다. 은혜를 아는 자로 사는가 아니면 모르는 자로 사는가? 그것이 관건이다. 분명한 건, 우리가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엡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