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를 사하는 권세

본문: 마가복음 2:1-12

설교자: 조정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지 질병이나 악한 영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놓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명백히 치유와 축귀를 사역의 중심으로 삼지 않으시고 전도를 주목적으로 삼으셨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예수님이 전한 도는 누구든지 믿으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묻는다. 권위 있게 가르친 위대한 랍비도 많았고, 치유와 축귀의 권세를 보인 위대한 선지자도 많았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인가?

이 질문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사건이 답한다. 사건은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것으로 시작한다(1절). “한적한 곳”에 계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은(1:45)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가버나움 “”으로 들어가셨고(1:29), 그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2절). 예수님은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를 말씀”하셨다(2절).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말이다. 바로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다가, 무리들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가르치고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냈다(3-4절). 당시 유대인이 거주하던 집의 지붕은 바깥 계단 또는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곳으로, 평평했으며 기초가 되는 나무들 사이를 나뭇가지, 엉겅퀴 등으로 채우고 비가 새지 않도록 점토나 진흙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지붕을 “뜯어”(‘파내다’) 구멍을 냈다. 밑에 있던 예수님과 무리에게 흙과 지붕의 잔재가 떨어졌을 것이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가 누운 상(침낭, 담요)을 끈에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렸다(4절). 그들은 예수님이라면 반드시 병자를 낫게 해주실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졌다. 그 믿음이 현실적인 여러 장애물을(인파, 수고, 대가) 모두 극복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모여든 수많은 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래서 평소처럼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뜬금없이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5절). 

예수님의 이 말씀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옛적부터 죄는 자주 질병과 관련되었고(미리암, 민 12장; 웃시야, 대하 26장), 병의 원인이 죄라는 선입견이 강했기 때문이다(요 9장, 나면서 맹인된 자). 하지만, 신학자들(서기관들, 6절)은 발끈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속에선 아주 크게 격동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 그들의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진실로 죄 사함의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참고: 출 34:7; 시 103:3; 사 43:25; 미 7:18). 하나님께만 속한 권세를 자신이 가진 것처럼 말하는 “이 사람”은 신성모독자가 분명했고, 율법은 그런 자를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엄히 명령했다(레 24:16).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일 듯이 분노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은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절대로 신성모독의 죄가 아니다. ① 죄 사함의 권세: 누구나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에 한하여 용서할 권한이 있다(눅 11:4).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그의 범죄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자뿐이다. 그 밖은 용서의 권한이 없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어떤 죄를 지었을까? 어떤 손해를 끼쳤을까? 예수님이 단지 사람이었다면 죄 사함의 권한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가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있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얘기가 다르다.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 간에 일어나는 범죄 또한 근본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하나님께 짓는 죄다(“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4). 성경은 하나님을 “오직 한 분”이신 “입법자와 재판관”이라고 말한다(약 4:12).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에 따라 하나님의 재판을 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중풍 병자가 살면서 지은 모든 죄의 피해자는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은 그 죄를 심판하거나 사하실 온전한 권한이 있으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한으로 ‘네가 나에게 지은 죄를 사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② 죄 사함의 근거: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를 기억하는가?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증서를 조작하여 빚을 탕감해 줬다(눅 16:1-7). 하나님이 죄의 빚을 탕감하시는 방법은 그렇게 불의하지 않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고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여 해결하신다. 그것이 구약의 모든 제사가 말해주는 바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죄는 반드시 생명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 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냥 죄의 빚 증서를 조작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죄의 빚을 친히 생명으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분명히 말한다(롬 6:23). 죄가 요구하는 값인 사망을 대신 지불하고, 자기 의로움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누가 약속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자기 죗값을 치르는 데 급급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려 자기를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고 영생을 능히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굳게 약속하실 수 있다.

자, 이제 입증만 남았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이신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진실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신가? 예수님은 이것을 중풍병자를 고치는 표적으로 입증하시려고 했다: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사람의 중심을 꿰뚫고 그 속의 생각을 들으시는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그들 심중에 일어난 강력한 의문에 이렇게 되물으셨다. 중풍병자에게 (1)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중에서 어떤 말이 하기 더 쉬운가? 사실상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둘 다 쉽지가 않다.

죄 사함은 말로만 하기는 쉬운 일이다. 입증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죄 사함은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병 고침은 말로도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금방 성패가 드러나기 때문에, 병 고치는 능력이 없는 이상 반드시 낭패를 본다. 오직 하나님께만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모두 쉬운 말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둘 다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둘 다 신성모독의 말이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님께만 둘 다 쉽다”이다.

이제 병을 고치시는 표적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질병을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죄도 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입증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 바로 이것이 치유의 목적이다. 그리고 곧 예수님은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그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다(12절). 집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은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했다(12절). 

그들은 왜 놀랐을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서?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그들 눈앞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들에게 간절히 주기 원하신 죄 사함과 영생을 구했을까? 안타깝지만, 모두 아니다. 마태는 같은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그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사람으로 여겼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지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일뿐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대한 선지자, 뛰어난 랍비, 혹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치유와 축귀를 구하고 일용할 양식과 정치적 독립을 기대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간절히 주시려고 했던 죄 사함과 영생을 도무지 원하지는 않았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다.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라고 말했다(요일 4:15). 예수님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예수님은 당신에게 누구신가? 당신은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는가?

만일 당신이 예수님께 물질적 풍요를 기대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걸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께 형통한 삶과 성공을 바란다면, 당신의 바람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걸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단지 외로울 때 힘이 되고, 고통 중에 위로와 격려가 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주려고 오셨다. 바로 죄를 사하는 것이다.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 저지른(를)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예수님은 모두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자기 목숨값으로 그 죗값을 치르시고 영원히 죄에서 놓임받아 참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요 10:10). 예수님께 그 풍성한 삶을 구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그분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쉼을 누리라. 생명을 누리라.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그분이 간절히 여러분을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이다. 당신에게 믿음이 필요하다.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믿음이. 당신 마음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뚫고, 높게 세워진 신념을 넘어가야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치러야 할 대가들이 염려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주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고 “아들아/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기쁘게 말씀하실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다(마 6:12). 주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에서 우리는 주가 베푸신 죄 사함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권세와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을 들었는가? 이건 죽을 때까지 절대로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깊은 상처를 입었는가? 어떻게 그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용서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가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그 이름을 모독했으며 그 심령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자기 아들의 핏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 이런 친절과 동정과 용서를 받은 우리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말한다(골 3:15). 우리가 서로 용서함으로 화목한 관계를 누리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 곧 지배해야 한다. 다스려야 한다. 나의 힘과 지혜와 의지로 만들어내는 평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평강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일으키시는 평강. 그것이 당신 마음을 통치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형제자매를 어떻게 내가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롬 15:7). 막힌 담을 모두 허무시는 평화의 주님께 당신의 마음을 내어드리라. 주님께서 평강으로 당신의 삶을 주장하시도록.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하실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가 계속해서 화목을 누리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게 하실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끝까지 화목을 누리게 하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