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종인 사람(들)

본문: 마태복음 8:5-13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등장하는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 행동 등을 통해서 그런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올바르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도 한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크게 보면 믿음과 불신으로 나눌 수 있다. 예수님께 불신으로 반응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어서 결국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먹고 배부른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았고, 그 이상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떠났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지만 감사하지 않았던 9명의 나병환자들도 비슷한 경우다. 개인으로 봤을 땐,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가 있다. 그는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끝내 예수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편에 섰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결국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눈을 떠 볼 수 있게 되었던 맹인은 유대인들에 의해 쫓겨나기를 감수하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언했고 믿었다. 자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긍휼히 여기심을 구했다. 이 여자의 요청을 들어주시면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다(마 15:28). 이런 믿음의 반응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모습이 드러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백부장’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향해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놀랍게 여기셨다(10절). 이 백부장이야말로 믿음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놀라셨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자.

먼저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7장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고, 그 후에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8:1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미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이 따랐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근방에 퍼져있었고, 여기 5절에 등장하는 백부장도 그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러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마태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것은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 온 것처럼 기록했다는 점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7장을 보면 백부장이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유대 장로들 몇 사람을 대신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는 이 모든 말들이 결국 백부장 자신이 한 말이었다는 사실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말을 통해 드러난 그의 믿음을 더 강조한다.

성경에는 종종 백부장이 언급되는데, 그때마다 백부장은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던 사람도 백부장이었고, 잘 알려진 고넬료도 백부장이었다. 백부장은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으로서 병사들과는 거리가 가까웠다. 즉, 천막에서 작전을 짜고 지시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에게도 존중 받는 자리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였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백부장이 예수님께 말했다.

8: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중풍병은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마비 증상’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이 하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일어날 수 없었고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거의 죽게 되었다(눅 7:2). 그런 종을 위해 주인이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 말을 통해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지를 조금은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자기 하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백부장이 사용한 단어 ‘하인’의 기본 의미는 ‘아이’다. 누가의 기록을 보면 이 ‘아이’는 ‘종’이었음이 분명하다. 백부장은 어린 종을 “내 아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낫게 하기 위한 수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문화를 고려해보면 이례적이다.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물건이 오래 되거나 고장나면 새것으로 바꾸듯이 종도 그러했다. 그래서 종은 ‘말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자기 종을 도구로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했다. 그를 사랑했고 그가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백부장에 대한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6절에 대응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렇다.

7:2–3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앞서 말한 것처럼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고, 유대 장로 몇 사람을 대신 보냈다. 뒤에 유대 장로들이 한 말이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이 백부장은 분명 이방인이었다. 유대 장로들이 이방인 군대 지휘관과 좋은 관계였을리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어서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님께 와서 대충 상황에 대해서만 전달을 했을 것이다. ‘저기 이방인 백부장이 있는데 하인이 아프다고 한다’는 정도의 말만 대충하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다.

7:4–5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유대인 장로들은 이 일이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간절히 구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는 것이 이 사람에게 “합당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제시한 것은 그가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을 사랑하고 자기 돈으로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유대교 자체에 대한 헌신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 다른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에 대해서 누가는 이렇게 묘사했었다.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아마 여기 등장하는 백부장도 고넬료와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종도 사랑하고 이웃인 유대인들에게도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기 때문에 유대 장로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부장의 말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백부장은 당시 문화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다. 나이도 그가 더 많았을 것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그가 더 높았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볼 때도 이방인인 백부장이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존중의 의미를 담아서 “주”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 만으로도 백부장은 예수님을 충분히 존중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백부장의 말을 보면 이 말이 단순히 상대에 대한 존중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백부장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신다.

8: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원어에서 예수님은 “내가”를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그 뉘앙스를 살리자면 “내가 직접 가서 고쳐 주리라” 정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에 백부장은 이렇게 답한다.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여기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능력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자격에 대한 표현이다. 집이 누추해서, 좁아서 혹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오시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 같이 높으신 분이 그의 집에 들어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서 그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은 자신이 더 높은 사람인데 그래도 예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과 자신의 차이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예수님을 “주”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예수님은 정말로 “주인”이셨고 자신은 “종”이었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그가 볼 때 예수님은 단지 그의 주인이 아니라 만물의 주인이신 가장 높으신 분이셨다. 그런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온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겸손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한 그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존경 받으며 살았겠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높으신 예수님에 비하면 그는 한 없이 낮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백부장은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높으심을 알고 그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지만, 그로 인해서 오히려 예수님의 은혜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겸손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종이다. 하나님이 명하시면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우리로 더 낮추게 하고 무릎 꿇게 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와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기 어디 계신 분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우리 가운데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기 원하신다. 이것이 우리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 두 측면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극단에 빠진다. 하나님을 ‘다른 분’으로만 여기고 절대로 가까이 하지 못할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을 여기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면서 낮추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분명히 밝힌 진리가 바로 이 두 측면이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낮추심이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낮추거나 우리를 높이면 그것이 교만의 죄다. 하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도 불신의 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안되는 사람도 아니다. 높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는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 백부장이 그렇게 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은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은혜 구하기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절).

백부장은 예수님의 병고치는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만해도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기적적인 치유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누가복음 6:19을 보면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라는 표현이 있다. 그만큼 보편적인 믿음이었던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나사로의 죽음 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말하면서 안타까움을 표현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 계셨으면, 우리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럴 것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런 보편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믿음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9절에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믿는지를 알 수 있다.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군인으로서 ‘자리’(위치)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고, 권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낳는다. 권위를 가진 자는 명령할 수 있고, 권위 아래 있는 자는 그 명령에 따라야하는 의무가 있다. 백부장은 그동안 이 당연한 사실을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부하들에게 그는 부탁하지 않았다. 권유하지 않았다. 명령했고, 그의 부하들은 그 명령에 따랐다. 반대로 그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그에게 동일하게 했다. 명령했고 그는 따랐다. 이것이 절대적인 ‘권위’의 의미다.

따라서 백부장이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심지어 질병 위에도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요청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 심지어 질병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본 것이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 놀라셨다. 예수님을 주어로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마가복음 6:6에서 딱 한 번 더 사용되는데, 그때 예수님은 자기 고향의 사람들이 믿지 않음을 보고 놀라셨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하며 했었던 말이다.

6:2–3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백부장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고 행하신 능력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말한다. 그의 형제와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출신으로만 평가했다. 그들을 놀라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이 의미하는 바를 그들은 애써 부인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셨다.

이런 모습은 비단 예수님의 고향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라면서도 그분의 가르치시는 권세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며 따졌다. 병을 고치는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조롱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은 놀라운 믿음을 고백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만큼 높은 분이시며, 자신은 그의 종일 뿐임을 고백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질병이라고 해도 그대로 순종할 수 밖에 없음을 그는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놀라셨다.

이 말씀은 백부장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칭찬이면서, 동시에 이런 믿음을 보이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이런 믿음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보여져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그들이 이런 믿음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선 이런 믿음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동서로부터 온 많은 사람은 12절의 “그 나라의 본 자손들”과 대조되는 이방인들이다. 이방인들이 믿음의 조상, 언약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고, 오히려 그들의 혈통적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즉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선포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치욕적인 말씀이었다. 이방인들이 천국에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치욕적인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지옥에서 고통 당할 것이라는 말씀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즉, 그들은 원래 있던 곳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를 이방인들이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하셨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확히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민족에 따라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고 이방인은 지옥에 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민족적으로 그렇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눠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 이방인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천국 백성이지, 단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의 교회를 보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절대 다수다. 환경적으로 아무리 천국에 가깝더라도 결국 믿음이 아니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통해 이 교훈을 주셨다.

그리고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은 그 믿음에 따른 보상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의 집까지 가실 필요가 없었다. 그의 하인에게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말씀만으로 하인을 낫게 하셨고, 그것이 백부장에게 큰 기쁨과 더 큰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도전

백부장이 보여주었던 믿음의 가장 큰 특징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나아왔다.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지 알았다. 예수님을 그의 집에 모시는 것도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믿음은 동시에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도 보여준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예수님께 구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자신이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긍휼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했던 것이다.

내가 뭔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거절했던 유대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어쨌든 그들에게 언약이 있고 말씀이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얻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 부르게 될 것이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무언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한다. 내가 나를 높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스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삶의 주인은 언제나 나라고 말한다. 백부장도 아마 그의 작은 왕국 안에서 왕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의 작은 왕국에서 나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그런 권리를 내려 놓아야 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종으로 여겨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백부장은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같은 선택지가 놓여있다.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 세상에서 스스로 왕이 되어 살 수 있다. 내가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참담할 것이다. 우리 인생의 진짜 왕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왕이 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이 왕이시고 내가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기 백부장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주인이 되는 선택지는 없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종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인인 듯 착각하는 삶과 종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오늘 말씀의 백부장처럼 종을 사랑하는 주인이시다. 백부장은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 주인을 모시는 종은 정말로 행복한 종이다. 우리는 겸손히 그러나 확신 가운데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곳이 곧 은혜의 보좌이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은혜와 기쁨을 항상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