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책하는 마음 말씀으로 지키기
본문: 마태복음 27:3-10; 요한복음 21:15-17 외
설교자: 조정의
살면서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가벼운 후회는 종종 무거운 자책으로 이어진다. “후회”는 단순히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인 반면, 자책은 “자신의 결함이나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을 말한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자책은 자신의 과오를 더 깊이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기 허물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자신을 몰아세운다. 그래서 후회는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자책은 부정적으로 여겨질 때가 훨씬 많다.
실제로 세상은 자책하는 마음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본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로 어떻게든 자기 잘못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책임감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자책하는 마음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건강한 자책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게 한다. 자기 죄를 정직하게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죄책에서 벗어나 용서와 사랑을 풍성히 누리게 한다. 더 견고한 관계를 맺게 한다. 수직적 관계에서도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건강한 자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오히려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도 않는 마음(그리고 남의 잘못만 보고 추궁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하나님과도, 이웃과도, 화목한 관계를 절대로 누릴 수 없다.
자책을 일으키는 마음의 기관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된 것을 볼 때, 불쾌한 마음을 일으키며, 그 잘못에 관한 합당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한다(“하나님을 알 만한 것“, 롬 1:19).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을 때, 양심도 손상되었다. 그래서, 자책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회개와 회복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 가룟 유다와 사도 베드로는 둘 다 자책하는 마음에 빠졌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를 냈다.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신을 파괴했고, 베드로는 회복되어 교회를 견고하게 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자책하는 마음에 빠질 때,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힘써 지켜내도록 하자.
1. 자책하는 마음 말씀으로 진단하기
먼저, 가룟 유다는 삼년 반 동안 함께 했던 자기 선생 예수를 은 삼십에 판 잘못을 저질렀다(마 27:3-10). 그는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앞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정죄 받고 빌라도의 손에 넘겨져 억울한 죽음에 내몰리는 과정을 지켜보고,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고 “스스로 뉘우”쳤다(3절). 자책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잘못을 자백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4절). 다른 사람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고, 자신이 한 일은 분명히 “죄”라고 인정한 것이다. 유다는 자기 죄의 일부만 인정한 것이 아니다. 죄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고발한 것이 아니라 무죄한 분을 고발했으므로, 100%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유다의 자책 바로 직전에 베드로의 자책이 기록되어 있는데(마 26:69-75), 장소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이었고, 바로 거기서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불의한 심문을 받고 있었다. 베드로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서 뜰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거짓 증인에 따른 불의한 재판을 받고 손바닥으로 맞고 침 뱉음을 당했다(66-68절). 그때, 베드로를 본 한 여종이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증언하였고, 베드로는 성급히 그 집을 나가면서(앞문) 다른 두 사람에게 추궁받았지만, 세 번이나 한결같이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부인했다. 저주와 맹세까지 하면서(74절). 누가에 따르면 마지막 세 번째 예수를 부인할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눅 22:61). 베드로는 그때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고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75절).
어떤 사람은 예수를 판 것과 부인한 것은 죄책이 다르다고 본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서 어쩔 수 없이 부인한 죄는 동정할 수 있는데, 돈에 눈이 멀어 스승을 죽게 한 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책할 때, 예수님은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하실 것 같고, 자책하는 유다에게는 ‘어떻게 나를 팔 생각을 했니, 너는 안 되겠다’라고 하실 것만 같다. 그러나 모든 죄는 마귀적이라는 면에서 같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요 13:2). 마귀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위아래로 흔들어댔다(눅 22:31). 두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지 않고, 마귀가 원하는 대로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력하여 온전히 선을 이루셨지만, 유다와 베드로의 죄는 회개와 회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같았다.
자책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발견되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거나 자기 잘못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려 한다.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땐, 상대방의 잘못이 얼마나 더 큰지 따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대응한 것뿐이라고 핑계 댈 때가 많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자기 잘못을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자기 과실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와 허물을 덮기 위해 십자가에서 쏟으신 풍성한 은혜를 거절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 잘못은 어찌 할 수 없어,’ ‘내가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책임져야 해’라고 판단한다. 가룟 유다가 그랬다. 자책하는 마음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토로했을 때, 그들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말했고(4절), 유다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5절).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죗값을 치르겠다고 결심한 거다.
2. 자책하는 마음 말씀으로 처방하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가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교만이지만,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하실 죄로 보고 계속 자책하는 것도 교만이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고발하셨을 때, 시편 51편을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건강한 자책의 특징을 발견한다. 1) 자기 죄를 있는 그대로 자백한다. “상한 심령”은 ‘깨진 마음’, ‘상한 마음’, ‘찢어진 마음’으로도 바꿀 수 있는데, 아프고 속상하고 화나고 부족하고 불안정하고 연약한 마음 그대로 제사(예배)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우리의 예배”, 잔치공동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말한다. 자기 죄를 모두 인정하고, 책임에 통감하고, 죄를 미워하고 뉘우치는 마음이다.
2) 자기 죄를 주께 가지고 나아간다. 다윗은 자기 죄를 향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고서는 그 죄가 너무 크고 수치스러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는가? 아니다. 그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않으실 것이라 확신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상한 심령을 제사로 원하신다고 굳게 믿었다. 하나님께 먼저 드릴 제물은 수소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었다.
자책하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사람 낚는 제자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가려 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던(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3)라고 맹세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스러웠을까? 베드로는 자신의 상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기보다는 숨거나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만나러 오셨다(요 21:15-17). 그를 위해 생선과 떡을 준비하시고 함께 나누셨다. 식사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16, 17절). 마지막 세 번째 물으실 때, 베드로는 근심했다(17절). 예수님이 지금 무얼 하고 계신지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17절).
주님은 베드로의 상한 심령을 구하신 것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은 멸시하지 않으시고 은혜로 받아주셨다. 베드로의 죄책은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라졌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에게 약속되었다. 베드로는 상한 심령으로 주께 나아와 은혜로 용서를 받고 깨끗함을 입어 다시금 화목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책하는 마음을 가질 만하다. 성도를 옥에 가두고 죽일 때 찬성투표를 했으니 말이다(행 26:10):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말하기도 했다(딤전 1:15). 그런데 그는 자기 죄를 축소하거나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책하는 마음을 처리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은 자기 과실에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가져와 해결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른다. 때로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기도 한다. 우리의 결함과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자신을 책망할 때, 다시 말해 자책하는 마음에 빠질 때, 그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와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죄를 보시는 관점과 기준에 동의하라.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고 죄책을 반드시 찾으신다는 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한 진노를 우리 대신 아들에게 쏟으셨다는 것,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아니라 아들에게 물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라. 복음의 은혜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또 자책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게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