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본문: 마가복음 2장 18-28절
설교자: 조정의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괜히 벌여 일을 키우고 악화시킨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유대교에 신실했던 이들의 눈에 점점 그런 존재가 됐다. 함께 해서 좋을 일 없는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서 식사와 친교를 나누는가 하면(13-17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훈련은 거부한다(18-22절), 그리고 모두가 거룩하게 지키는 안식일에 하지 않아도 될 일, 아니 하면 안 되는 일을 해서 문제를 키운다(23-28절). 특별히 금식과 안식일 논쟁을 일으킨 주범은 제자들이었다(18, 24절). 그러나 예수님은 ‘얘들아, 복음을 전해야 하니까, 제발 사람들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은 하지 말자’라고 그들을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인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그들이 추구하는 구원의 길과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새로운지 가르치실 기회로 삼으셨다. 예수님에 대한 미움은 단지 긁어 부스럼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이 그들이 평생 고수해 온 신앙을 철저히 버릴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 사람의 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길
바리새인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 추구한 길은 한마디로 금식이나 안식일 지키기 등과 같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길이었다(18, 23-4절). 기원을 따지자면 금식과 안식일 규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주신 율법에 있었다. 하나님은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명령하셨고(레 23:27-9), 하나님 주신 십계명 중 넷 째 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였다(출 20:8). 바리새인은 하나님 주신 율법을 해석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만들었는데, 1년에 한 번 있던 속죄일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 하도록 권하고(눅 18:12), 안식일에 하면 안 될 39가지 항목을 만들어 철저히 지키게 했다(수확, 요리, 여행).
바리새파는 주전 2세기경 경건주의 운동으로 시작된 유대교 3대 종파 중 하나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을 점령한 그리스-로마 제국에 의하여 헬라화되는 것에 반대하여 율법 중심으로 신앙을 회복하고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경건한 삶으로 유대교의 부흥을 꾀하는 평민 중심의 신앙 운동을 일으켰다. 회당을 세우고 경전을 가르치며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한 이들의 노력이 모두 다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도 이렇게 그들을 평가했다: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3-4).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친 것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본받지 말라고 한 그들의 행위는, 사람이 질 수 없는 무거운 짐, 즉 그들이 볼 때 ‘성경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해석하여 실천하게 하는 여러 행위를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조차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행 15:10) 지우고 제대로 메지 않은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했다.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을 어긴 죄인 취급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이렇게 따져 물은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절).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3-24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율법에 기록된 금식과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 아니다. 바리새파가 생각할 때, ‘이렇게 해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기준을 따르지 않은 것뿐이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결국 사람이 만든 여러 행위들을 부지런히 실천함으로 율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율법의 요구를 채운다’라는 생각은 결국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만든 새로운 종교를(유대교) 만들어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예수의 도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자신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여겼고(빌 3:5-6), 예수님이 비유로 묘사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온통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인지 자랑하는 말로 가득 찼던 것이다(눅 18:12).
사람이 만든 모든 종교가 바리새인이 제시한 구원의 길을 가리킨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와 같은 세계 주요 종교뿐만 아니라 멀리 오지에 있는 소수 부족이 따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만든 도는 하나같이 자신의 업적과 행위로 신을 감동시키고 신에게 은혜를 사려한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신앙고백, 기도, 자선, 금식, 성지순례), 불교의 수행과 참선, 힌두교의 지식, 행위, 헌신, 명상, 모두가 다 구원의 필요조건인 사람의 행위다. 심지어 기독교와 매우 유사한 천주교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믿음이 단지 그리스도로 인해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공식 선언했고(트리엔트 공의회, 1545~63), 믿음만이 아니라 신자의 행위 그리고 일곱 가지 거룩한 예식이(세례, 견진, 고해성사 등) 협력하여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사람의 도를 따르는 이들은 ‘내가 이것을 행하고 있으니 나는 천국백성이야’, ‘완벽하진 않아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어’라고 굳게 믿는다.
2. 주님의 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
주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은 “믿음의 도”(유 1:3)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예수님은 제시하셨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길이라서 사람의 도와 도저히 섞일 수가 없었다: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1-22절). 새 천과 낡은 옷, 새 부대와 낡은 부대.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의 도와 예수님이 새롭게 제시하는 도를 구분하셨다. 이 두 가지를 섞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모두를 망친다. 새 천은 축융 과정(줄어듦 방지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낡은 옷에 기우면 줄어들면서 낡은 옷을 당기어 헤어지게 하고 결국 못 입게 만든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면서 가스를 배출하는데, 새 부대는 탄력성이 있어서 괜찮지만, 낡은 가죽 부대는 탄력을 잃고 딱딱하게 굳은 상태라서 터져버린다. 그러면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 부대도 못 쓴다.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전파하신 복음,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과 사람의 도, 즉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길은 절대로 교차하거나 합쳐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유대교를 맹신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뒤, 이렇게 밝혔다: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그는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만든 율법의 여러 행위를 흠 없이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걸 깨달았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신 “하나님의 의”, 곧 믿음으로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길을 받아들였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에게 새로운 길을 깨닫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를 책잡으려고 달려드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이 사람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셔서 그 구원의 길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을 밝히셨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어 그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획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로 자기 백성을 택하고 사랑하신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섬기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깨우쳐 주셨다. 먼저 금식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절). 이스라엘 혼인 잔치는 길었다(일주일). 신랑신부와 그 가족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날, 누군가가 거기서 바리새인의 규정에 따라 금식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바리새인 랍비들도 이때만큼은 결혼식의 기쁨을 망칠만한 모든 종교적 의무를 벗으라고 판결했다. 만일 율법이 반드시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목적으로 주어졌다면, 예외가 있을 수 있나? 율법은 은혜로 자기 백성을 택하고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법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아히멜렉)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25-6절). 진설병은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만 먹도록 율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레 24:9). 그런데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사례를 보면, 다윗은 식어서 성소 밖으로 내온 떡을 요구하고 받아먹었다(6절). 이것이 옳은가? 율법을 철저히 지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옳다면 다윗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궁핍한 도망자 신세가 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이 교체되어 나온 떡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27절). 주객전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율법은 그 행위를 쌓아서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에 도달하라고 사람에게 부과된 족쇄가 아니다. 율법은 도저히 행위로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발견하고(롬 3:20), 그 불쌍한 죄인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시고 일방적으로 변함없이 사랑하신 것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도록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3. 사랑의 도: 믿음으로 행함을 맺는 길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을 수 있었다. “네가 뭔데 이런 주장을 하는가? 어떤 권위로? 우리는 유명한 랍비들의 권위로 율법을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절). ‘내가 안식일을 제정한 하나님(큐리오스)이고, 그래서 안식일에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대상이며,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해석을 절대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엿새 동안 만물을 만드시고 칠 일째 쉬신 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안식일을 자기 백성에게 지키도록 제정하시고 기념하게 하신 그 하나님이시다. 누가 예수님보다 높고 뛰어난 지혜와 권위를 가지고 율법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율법주의자들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면 율법은 무시해도 좋다는 말인가? 함부로 대하고 어겨도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결혼식 비유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20). 금식의 규정이 결혼식에서는 예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말씀 뒤에 덧붙이신 것인데, 신랑신부가 떠나면 다시 금식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신 말씀처럼 보이진 않는다. “빼앗길 날”이라는 표현이 너무 강해서다(‘제거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제거되실 것을 아셨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5, 18).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요 10:10).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 길에 서게 된 이들은 이제 감사함으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율법의 요구를 면제해 주신 것이 아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대신 만족시켜 주신 것이다. 그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모든 일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고자 한다(갈 2:20).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도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그 율법에 순종하여 은혜가 풍성하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 자발적으로 말이다.
바울은 여전히 사람의 도를 따라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성도를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율법은 우리 행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 외에는 죄인에게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알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돌려보낸다. 이제는 율법을 자유롭게 지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사랑하도록 만드신다. 야고보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하나님의 인정과 호의를 받으려는 모든 행위를 버리라. 그걸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도 말라. 그 길은 틀렸다. 오직 믿음으로 우릴 의롭다고 하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도록 권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