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본문: 마가복음 1:1-8
설교자: 조정의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가 요한(행 12:12)이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그의 집은 초기 교회의 중심지였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과 오순절 성령 강림이 모두 그곳에서 일어났다(막 14장, 행 2장). 그는 예루살렘을 구제하러 온 바울과 바나바(“바나바의 생질”, 골 4:10)를 통하여 사역 기회를 얻어 안디옥 교회로 천거했고(행 12:25), 성령께서 두 사도를 불러 이방인을 위한 선교 사명을 맡기셨을 때,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함께 보내심을 받았다(행 13:13). 그러나 그는 중도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향했고, 그 일로 바울의 신뢰를 잃어, 두 번째 선교를 앞둔 바나바와 바울 간의 큰 싸움과 결별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행 15:38-40). 그러나 하나님은 마가의 미성숙함을 다듬고 믿음을 자라게 하셔서 교회를 위한 유익한 일꾼으로 세우셨다(“나의 동역자”, 몬 1:24;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 마가는 특별히 베드로의 사역을 돕는 자가 되었는데(“내 아들 마가”, 벧전 5:13), 185이레나이우스는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자’라고 불렀고, 150유스티누스는 마가복음을 ‘베드로의 비망록’이라고 칭하면서, 베드로가 전한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를 마가가 정리한 책이 마가복음이라고 했다.
마가복음의 대표 저자는 물론 성령 하나님이시다(딤후 3:16; 벧후 1:20-21). 하나님께서 마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말씀을, 오류나 부족함 없이 계시하셨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마가의 문체가 살아 있는데, 그는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인 방식으로(속보 기사)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포하고, 그분께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묻는다. 마가복음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첫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강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알게 하시고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시기를, 이미 예수님과 사귐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다시 새롭게 발휘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든 신성이 충만하신 초월적인 분이시지만(골 2:9; 요 1:14),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사람 예수로 나셨다(마 1:21). 하나님은 택하신 모든 자를 구원하실 종으로 특별히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를(히: 메시야) 이 땅에 보내셨다. 이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 곧 “복음”이다. 당시엔 세상을 변화시킬 강력한 힘으로 자기 백성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줄 통치자가 탄생한 소식을 가리켜 ‘유앙겔리온’(복음)이라고 했다. 지금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크고 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한다. 그들에게 최고의 선, 곧 구원을 가져다줄 강력한 권세를 지닌 왕이 마침내 오셨기 때문이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곧 “복음의 시작”이라고 알렸다(1절). 십자가 대속과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교리적 설명 없이 예수님이 하신 일 그 시작부터 끝까지가 모두 복음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복음은 단지 일어난 사건 또는 교리적인 공식을 알고 익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 구원을 나에게 베푸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찰스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다: “복음은 풀 수 있는 신비가 아니다. 복음은 이해할 수 있는 철학, 받아들일 수 있는 관점, 적용할 수 있는 일단의 삶의 원칙이 아니다. 복음은 인격이다.”(신약 인사이트 마가복음, 35p). 예수님도 세례와 시험을 받으시고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절).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그 복음의 시작이요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요 1:12).
우리가 보통 새로운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그와 친밀한 사귐을 시작하게 해주는 조력자가 있다. 그가 진심으로 열정을 다하여 ‘내가 신뢰하는 친구’, ‘정말 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면, 더 쉽게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마가는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는 인물로 세례 요한을 불러온다(4절). 요한은 그냥 우연히 예수님과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친척이라서 조력자 역할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그 일을 하도록 택하신 하나님의 사자였다. 마가는 그 근거를 선지자의 예언들에서 찾았다: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A보라 내가 내 사자를 B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C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2-3절).
마가가 복합적으로 인용한 구약 선지서의 예언들은 가장 가깝게는 400여년 전 A말라기서(말 3:1), 그리고 약 700년 전인 C이사야서(사 40:3), 심지어 대략 1500년 전인 B출애굽기(출 23:2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 세기에 걸친 이 예언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오실 주 하나님의 앞길을 준비하러 앞서 보내심을 받을 하나님의 사자를 약속하는데, 그것을 성취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4절). 그는 제사장 아버지 사가랴와 아론 자손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느지막히 태어난 아들로, 주의 사자가 전달한 하나님의 뜻대로 그 이름을 요한이라 지었다(눅 1:5-13). 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평생을 “빈들”(광야)에서 살았다(눅 1:80; 막 1:4).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과 같은 편안한 곳에서 지낼 수도 있었지만(마 11:7-8), 되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냈다(6절).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고 청빈한 의복과 음식, 거주 환경과 생활양식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선지자로 백성을 회개하도록 이끄는 일에 헌신한 엘리야를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인상착의를 묘사할 때, “그는 털이 많은(털옷 입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라고 했고(왕하 1:8), 대부분 광야에서 생활하였으며(왕상 17, 19장),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길 때,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 하나님의 사자였다(왕상 18장).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예수님 앞서 보내실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켜 선지자 엘리야라고 했는데(말 4:5), 세례 요한이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것만 봐도, 정말 그가 약속된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은 엘리야처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선포했다(4-5절):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엘리야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일에 헌신했고, 엘리야가 경험하지 못한 사역의 결실도 풍성히 얻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갔으며(세리와 군인까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죄 사함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세례를 그에게 받았다(눅 3:1-19). 요한이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밝혔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 그는 흥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쇠하여지기를 원했다(요 3:30). 왜냐하면 자기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고 그 길을 준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전파했다: “7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7-8절).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분이라고 믿었다. 단지 능력만 월등히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분은 주님, 자신은 그 발밑에서 섬기는 종으로 여겼다. 그래서 노예가 응당 했던 일, 자기 허리를 굽혀 주인의 신발끈을 푸는 일조차 자신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예수님은 매우 귀하고 높은 주권자시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은 요한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어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에 헌신한 종이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이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요한은 결국 자기에게 나온 모든 이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요 3:26-30), 자기 모든 인생을 바쳐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마친 후, 그분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바쳤다(막 6:14-29). 그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안드레 등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고(요 1:40), 이제 우리도 예수님께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할 차례이다.
2.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로마 최고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했던 인물이었다고 정직하게 기록했다. 마가는 그 역사적 사실을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분명한 사실인 만큼 그분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반대로 그분을 믿지 않음으로 심판받기로 미리 작정할 수도 있다(요 3:18).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더 자세히 풀어 기록했는데,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말했다(눅 3:16-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당신이 곳간에 들일 알곡인지 혹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쭉정이인지를 결정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을 위한 복음은 이미 시작되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그분은 성령으로 당신 안에서 복음이 살아 역사하도록 일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복음은 당신에게 절대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이 멸시하고 귀찮아해서 영원히 잃어버린 가장 안타깝고 통탄할 소식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리스도께 올바른 반응을 보인 자, 회개하고 돌이켜 그분을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입은 자들도 신앙의 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복음에 더는 감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다. 기도와 성경 읽기는 형식적으로 변하고, 예배는 메말라 가며, 성도와의 교제는 세상의 친교 모임과 별반 다를 바 없고, 일상은 믿지 않는 이들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영적으로 병든 여러 증상이 보일 때, 다양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한 가지 가장 중대한 문제를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다.
단순히 경건의 도구를 활용하는 것(말씀, 기도, 집회) 또는 명령하신 것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신 분,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다. 미지근한 신앙, 영적으로 곤고한 상태에 처한 성도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회복을 약속하셨는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충분한 시간을 들여 주님과 교제하라. 주님이 당신에게로 들어가 더불어 먹고 사귐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하는 모든 경건 훈련과, 말씀 순종, 봉사와 섬김이 주님을 더 많이 알고 믿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 되도록 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한 복음을 이미 시작하신 분이시고, 당신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날마다 새롭게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언제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그분을 찾고 만나고 기뻐하며 사랑하고 사귐을 누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