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본문: 마가복음 4장 35~41절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과 제자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밤새워 기도하고 열두 제자를 세우신 예수님은(3:13-19; 눅 6:12) 그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막간의 틈을 이용하여 식사하려고 했지만, 몰려든 무리 때문에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3:20). 가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들러 왔고,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다. 그들과 길고 긴 논쟁을 마치자마자 예수님은 바닷가로 물러나셨는데, 큰 무리가 쉴 틈 없이 주께 모여들었다(4:1). 그날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가 하루 종일 무리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가르치신 후, “저물 때에” 일어난 일이 본문의 사건이다(35절).
1. 문제: 광풍은 두려움을 만든다(35-38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다른 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가자’ 하시니”(35절). 예수님이 의도하신 “저편”은 5장 1절에 기록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이었다. 이방인이 많이 살고 있던 데가볼리 지역으로 유대인이 부정히 여기는 돼지 목장도 있었다(5:11).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볼 때—철저한 외부인에게도 자애롭게 전하기를 원하셨다(사 42:6; 눅 2:32). 예수님은 가르치시던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신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36절). 심히 고된 하루를 마치고 이제는 정말로 쉼이 필요해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30~40분의 짧은 시간, 휴식을 취하려고 하신 것이다. 아마도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모시고 한 배로 가고, 나머지 제자들은 다른 배들로 함께 이동했을 것이다. 마가는 베드로가 직접 경험한 일을 대략적으로 그러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갈릴리 호수는 지구에서 가장 낮은 담수호다. 해수면보다 210미터가량 아래 있다. 또한 2,800미터에 육박한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라서 얕은 계곡에 축적된 열이 위쪽 찬 공기를 격렬하게 잡아당기면서, 마치 깔때기처럼 협곡에 부는 바람을 물 위로 순식간에 끌어내린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허리케인급의 격렬한 폭풍이 수시로 일어났다가 고요해지기도 하는데, 낮에 강한 바람이 불고, 저녁엔 잔잔한 편이라 주로 어부들이 밤에 일했다. 그러나 만일 무지막지한 폭풍이 저녁에 일어나면, 호수에 있는 자는 누구든 죽은 목숨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위험했다. 바로 그 심각한 일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발생한 것이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7절).
마태는 물결을 가리켜 “놀”(σεισμός)이라고 했는데(마 8:24), 문자적 의미는 ‘지진’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호수에 마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바람과 파도가 일어나 그들을 크게 뒤흔들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쳤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때리다, 치다’를 의미하는데, 적대적이고 의도적인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때리는 것처럼, 파도가 그들이 탄 배를 쉬지 않고 타격했다는 말이다. 급기야 물이 배에 점점 가득 차기 시작하면서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곧 침몰하게 될 극심한 위기에 봉착했다. 제자들 중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어부였고 바로 이곳에서 평생을 폭풍과 싸우며 일했던 숙련된 일꾼이었지만, 그들의 모든 경험과 기술과 지혜는 무서운 자연재해 앞에서 비참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결국 그들은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예수님을 찾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
먼저, 예수님은 그 정도로 많이 피곤하셨다. 우리와 똑같이 사람으로 시험받으신 주님은(히 4:15), 죄는 없으시지만 극심한 피로가 무엇인지, 쓰러져서 죽은 것처럼 잠드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신다. 하지만 살인적인 폭풍 가운데 제자들과 예수님이 보인 더 중요한 차이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궁극적인 뜻이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질 것을 아셨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피 흘리게 될 날은 오늘이 아니라 그때라는 걸 아셨다(막 14:24).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 폭풍 가운데 반드시 예수님과 제자들을 지키실 것이 분명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죽음의 위기 앞에 평안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사도 바울이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 배가 난파될 정도의 무서운 광풍을 만났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포에 사로잡힌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행 27:24-5).
믿음이 있으면 두렵지 않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걸 믿는 자는 아무리 무섭고 위협적인 곤경에 처해도 염려와 근심과 걱정으로 완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원망과 불신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두려움을 쫓아내고 평안이 마음을 지배하며, 원망과 불신이 아니라 신뢰와 감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그 믿음이 부족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우며 따져 물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그분을 주로 영접하는 자들과 거부하는 자들을 대조하여 보여주셨고, 제자들은 들을 귀 있는 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로 분류되어 계속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의 믿음은 급격하게 흔들렸고 약해졌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선생에 불과한 자로 보였고(눅 8:24), 그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도 않는 무능력하고 무자비한 분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인생에 크고 작은 폭풍이 불면, 우리 믿음도 흔들린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성경의 절대적인 가르침을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지만,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면서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시험하기도 하고(출 17:7), 내 눈에 보이도록 뭔가 해주시거나, 내가 경험할 수 있게 하시면 그때야 믿겠다고 불신을 드러내기도 한다(요 20:25). 그러나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20:29). 더 큰 믿음을 받은 것이 복이고 그만큼 더 큰 믿음의 열매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히 11: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은 보게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게 하고 실제로 누리게 한다.
2. 해결: 주님은 광풍보다 크시다(39절)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셨다(눅 8:24). 그리고 바람과 바다에 각각 이렇게 명령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39절). 그러자 바람은 그 즉시 그쳤다. 점점 약하게 불다가 멈추었다는 말이 아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다가 멈추는 건 일어날법한 일이다. 그러나 바다가 아주 잔잔하여지는 건 상상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일이다. 보통 폭풍이 일어난 후 수면이 요동하지 않고 완전히 멈추기까지 12시간에서 24시간, 본문이 말하는 큰 폭풍의 경우 2~3일이나 걸린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다에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바다는 곧바로 완전히 평온해졌다. 어떻게 과학적으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냐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럴만하다. 실제로 그 배에 탄 당사자도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일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도 함께 다른 배들에 탄 많은 사람이 경험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이시다(히 1:3). 언제든 원하시면 말씀으로 만물을 제어하실 수 있다. 그것을 지금 보여주신 것뿐이다.
많은 주해가들이 예수님이 무생물인 바다를 꾸짖으시고 바다가 인격체처럼 주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장면을 가리켜 악한 영들을 능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났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깊은 바다와 악한 영을 자주 연관 지었고(사 27:1; 단 7:3; 계 13:1),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광인을 만나 신적 권세를 보여주시기도 한다. 실제로 큰 광풍이 악한 영의 소행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통해 마귀가 믿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빌 2:10). 그래서 예수님과 한 배에 탄 제자들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자연 만물이든, 악한 영이든 모두 예수님 발 아래 있다. 모두 예수님께 굴복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3. 교훈: 주님을 믿는 것이 힘이다(40-41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40절). 솔직히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캄캄한 밤에 배는 미치듯이 요동치고 파도가 계속해서 배를 때리며 물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는데, 무섭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병원에서 죽을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으면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황망하다. 경제적 타격을 받아 가세가 기울면 절망적이고, 관계가 깨지고 어그러져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낄 때, 크게 낙담한다. 이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도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신 주님은, 우리가 무서워할 만한 일들 가운데 믿음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리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믿음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믿음은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 침몰하지 않도록 붙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낙심될 때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자 이렇게 자기 영혼에 계속해서 소리쳤다(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사도 바울도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믿으라고 권면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어떻게 하면 우리 믿음이 자랄 수 있을까? 그래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불안해 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다. 바람과 파도를 보고 무서워한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 두려움의 대상은 예수님이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41절).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이 진짜 누구신지를 아직 잘 모르고 또 믿지 못하는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려고 계속해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은혜를 보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면서 그들의 작은 믿음을 드러내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는 공회에 잡혀 주님처럼 심문당하고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도,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담대히 말했다(행 5:2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가? 그는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될 것이란 약속을 받았지만, 아내로 인해 목숨이 위험할까 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하나님이 약속대로 아들을 주실 것을 믿지 못해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 그 전엔 자기 종인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삭을 바치라는 허리케인급 명령에 즉각 순종했다.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할 만큼 믿음이 크게 자란 것이다(히 11:19). 주님께서 우리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주님이시고 또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히 12:2).
광야는 평탄한 길과 험난한 길이 뒤섞여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광야를 지나게 하셨다. 때로는 야만인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때로는 물과 식량이 떨어졌다. 얼마나 두렵고 염려가 됐을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일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셨다.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하게 하셨다. 우리 인생도 광야와 같다. 주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먹이고 입히고 돌보시며 보호하실 것이다. 약속하신 천국에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이르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폭풍을 허락하실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를 낮추시고 주리게 하실 때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우리 작은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때다. 우리가 그분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는 때다(신 8:3). 초대 교회는 본문 말씀을 바탕으로 모자이크나 벽화로 교회를 그릴 때, 바다에 떠 있는 배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엔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신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주님이 지키신다. 자기 백성을, 그들이 모인 교회를 마귀로부터 보호하신다. 우리 안에 시작하신 믿음을 온전히 이루신다. 믿음의 결국인 영혼 구원을 얻게 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