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본문: 마가복음 3:1-6
설교자: 조정의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죽이는 것’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은 목숨이고(마 16:26), 그래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생명을 구하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지만, 무엇이 옳으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사건에서 명백하게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려고 하셨고, 바리새인과 헤롯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죽이려고 했다. 왜 서로 다른 선택을 했을까?
1.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보신 예수님
사건은 또 다른 안식일에 일어났다(2절). 예수님은 평소처럼(1:21; 눅 4:16),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1절).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회중 가운데 있더니(1:23), 이번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다(1절). 누가는 그 한쪽 손이 오른쪽이었다고 밝힌다(눅 6:6). 전승에 따르면 이 사람이 하던 일이 건축(미장)이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고나 질병으로 손이 오그라들거나 마비 증상을 겪기 시작하면서 직업을 잃고 구걸하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고 그의 불쌍한 처지가 공동체에 알려졌을 것이다.
의아하다 못해 충격적인 것은 회당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다(2절). 경찰이 CCTV를 통하여 범인의 행동을 유심히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나 집중하여 지켜봤다는 것이다. 육신의 질병으로 비극적인 삶을 사는 이웃이자 동족을 안타깝게 여기고 예수님이 은혜와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2절). 이미 예수님과 한바탕 안식일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2:23-28) 그분이 안식일을 어긴 확실한 증거를 어떻게든 잡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순하고 무정한 마음을 훤히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펴 보아라우리말성경)라고 말씀하시어 즉시 그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6절). 만일 예수님이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셨다면, 괜히 병자를 고쳐서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고발 거리를 주지 않기를 원하셨다면, 복음 사역에 불필요한 장애물을 만들지 않기를 바라셨다면,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 시간까지 기다리시거나 조용히 병자를 불러 그를 은밀하게 고쳐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라고 말씀하셨다(3절). 안식일에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손 마른 자를 고치려고 하신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간절히 구하려고 하신 생명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온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막 6:34). 그들은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철저히 지켜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불가능한 삶을 사느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것 같이 고생했다. 손 마른 자가 사고나 질병으로 오그라든 손을 가지고 불편하게 고생하며 살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구원의 길로 스스로의 삶을 오그라들게 얽맸다. 예수님은 그들을 쉬게 해주고 싶으셨다(마 11:28).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목자로서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그분을 통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다. 양과 같이 길을 잃은 자들을 그들의 목자와 감독 되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벧전 2:25). 그래서 자기 안위가 위험해지더라도, 거짓 소문으로 평판이 더럽혀지더라도, 헛된 고발 거리를 제공하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세워두고 이렇게 물으시면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절).
지난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을 오용하고 있다고 예외 상황을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셨다. 이번엔 실제로 그들 눈앞에 구원이 필요한 생명, 선을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동료를 두고 무엇이 옳은지 그들의 가슴으로 답할 것을 요구하신다. 의학 드라마에서 종종 의사인 주인공이 관행이나 규율을 깨고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시기하고 사사건건 방해하던 동료 의사가 자기 자녀가 응급실에 실려와 급한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동안 고집했던 자기 생각을 돌이키고, 그동안 미워했던 주인공에게 회개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예수님은 오그라든 손을 가진 형제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기를 바라셨다. 그를 불쌍히 여기며 율법주의를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2.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본 사람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람들은 손 마른 형제에게 매정했다. 회당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을 고쳐주소서’라고 구하지 않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으며 예수를 고발하려는 도구로만 삼으려고 했다(마 12:10). 예수님께서 그를 한 가운데에 세워두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을 때도, 사람들은 병자를 동정하지 않고 이용하려고 했던 무정함을 돌이키거나,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려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돌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이런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잠잠하거늘(4절).
그들의 긴 침묵은 어떤 의미였을까?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런 질문도 하셨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12). 이것이 그들이 일상에서 내렸던 답이다. 자기 가축은 한 마리라도 귀하게 여겨서 구덩이에 빠진 날이 안식일이더라도 즉시 끌어냈었다. 그러면 양보다 훨씬 더 귀한 아브라함의 후손, 유대인 형제의 생명은 얼마나 더 불쌍히 여기고 선을 베풀어야 하겠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너무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러면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라서 계속 침묵을 고수했다. ‘맞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불쌍한 형제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맞지요’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옳고 선한 일 한 것으로, 생명을 구원한 것으로 고발하려고 한 죄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그들은 병자를 고통의 구덩이에 내버려두는 것, 선하신 구원자 예수를 죽이려는 것이 오히려 옳다는 마음을 굳히고 계속해서 침묵시위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침묵에 또 다른 침묵으로 답하셨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5절). 예수님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셨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침묵엔 탄식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이 장면을 묘사한 헬라어 동사 시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먼저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부정 과거형이 사용됐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지 보신 주님께서 순간적으로 분노하신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끝까지 자기의 의를 붙잡으려고 할까?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끝까지 무지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반항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곧 탄식으로 변했다. 깊은 슬픔으로 동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탄식하사”는 현재형이 사용됐다. 일시적으로 분노하신 예수님이 이어서 그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바라보셨다는 말이다. 죄인이 자기 길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을 주님은 슬퍼하시고 심히 고통스러워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결국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위와 능력으로 고쳐주셨다. 이런 은혜롭고 놀라운 기적이 사람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녹였을까? 그렇지 않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6절). 바리새인은 유대인 전통을 사랑하고 이방 종교와 문화를 배척하는 분리주의자고, 헤롯당은 이두매인이었던 헤롯 가문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여 유익을 얻으려는 무리였다. 율법이나 유대교를 쉽게 무시했고 그들의 추종자인 헤롯 안디바는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고 따른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흉악한 범죄자였다. 그런데도 바리새인이 헤롯당과 손을 잡은 건, 그들의 손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그들은 침묵으로 반항했고, 행동으로 답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에,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주를 죽이려고 악한 자들과 손을 잡은 건 그들이었다.
3. 적용
성경은 모든 죄인의 특징으로 이 “완악함”을 손꼽는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다. 그는 십수 차례의 하나님 권능을 목격하고도 그 완강한 마음을 꺾지 않았다(롬 9:18). 하나님은 죄인에게 끊임없이 은혜받는 길을 제공하신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러나 죄인은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고 믿는 길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거부한 하나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슬퍼하면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도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이 물으신다면, ‘당연히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답할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명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셔서 영원한 형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미움과 시기와 모욕과 조롱을 받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당신에게 선을 베푸신 예수님을 왜 믿지 않는가? 왜 거부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마음이 그만큼 완악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것이 이미 심판받은 증거다(요 3:18).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모든 죄인이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 스스로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면, 누가 그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이킬 수 있냐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으신 새 언약의 약속은 이렇게 답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돌같이 완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신다. 그럴 때 우리는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한다(롬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나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 되고, 그분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은 나의 목자,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오직 은혜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셔서 마침내 구원을 얻게하실 것이다(빌 1:6; 살전 5:23-24). 그런데 분명 은혜로 시작했는데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갈 3:1-3). 어떻게 점검할 수 있는가? ① 은혜로 사는 이들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한다. 하나님 베푸신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내가 받기에 합당한 것은 지옥의 영원한 심판과 저주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② 은혜로 사는 이들은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③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염려하거나 불신하지 않는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모든 것을 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④ 은혜의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미움과 시기와 분노를 그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한다. 그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⑤ 은혜 아니면 한순간도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교만할 수 없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고집하거나 말씀의 권면과 훈계를 무시할 수 없다.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⑥ 은혜로 사는 이들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