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행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6:13-24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몇 가지 권면(13-14절)과 당부(15-18절), 그리고 문안(19-21절)과 끝인사(22-24절)로 이루어져 있다. 사도 바울은 13장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말했다(13절).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바울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세 가지 덕목, 믿음, 소망,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래서 본문을 각각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행하라”라는 권면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교회를 사랑합니다”라는 목표로 올해 고린도전서를 다루면서, 아주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진실로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행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사도의 마지막 권면에 교회가 아멘으로 화답하며 교회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함께 세워 가기를 바란다.

1. 믿음 가운데 행하라(13절)

믿음”은 바울이 권면한 내용의 핵심이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13절). 네 가지 명령어(‘깨어라’, ‘굳게 서라’, ‘용감하라’, ‘강건하라’)가 모두 믿음과 관련이 있다. 간단하게 각각의 명령을 살펴보기 전에, 여기서 믿음이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객관적 진리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각자 주관적인 지혜와 믿음을 가졌고 자랑했다(2장).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굳게 선 곳이 참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그는 “주께 받은” 진리(11:23), “성경대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복음을(15:3-4) 다시 그들에게 제시하면서, 믿음을 올바른 곳에 두라고 서신서 내내 권면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권면하면서(1:25),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가 자기 지혜와 자기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믿으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의 지혜만을 신뢰하고 붙들기를 바랐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교회에 집약적으로 권면한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는 먼저, ① 경계하라: 거짓 교훈과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항상 자신을 지켜야 한다. ② 믿음에 굳게 서라: 그리고 올바른 믿음에 굳게 서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진리의 기둥과 터”, 딤전 3:15). ③ 용감하라: 교회는 또한 바른 교훈을 믿고 전하는 데 어떤 핍박과 위협이 있더라도 용감하게 맞설 수 있어야 한다. ④ 강건하라: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부지런히 먹음으로 믿음과 지혜가 점점 자라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린아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자로 성숙해야 한다(3:1). 이것은 교회의 일부 성도에게만 주어진 권면이 아니다.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몸 일부만 병들어도 몸 전체가 아픈 것처럼, 건물 일부만 부실해도 건물 전체가 위태로운 것처럼, 반드시 일부가 아닌 모든 성도가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세 가지 질문으로 자신을 점검해 보라: ① 나는 정말 성경의 바른 교훈에 믿음을 두고 사는가? 생각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성경의 바른 교훈에 믿음을 두지 않고 그것이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거짓 교훈에 믿음을 둔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반석과 모래를 섞은 위태로운 기반에 집을 세우지 않는다(눅 6:48). ② 나는 어떤 시험과 유혹을 만나도 믿음을 타협하지 않는가?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기쁨으로 받았는데, 시련을 당하거나 이생의 염려에 빠지거나, 재물과 향락에 취하여 믿음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눅 8:13-14). ③ 나는 올바른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잘 안 먹으려는 아이’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적 양식을 정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섭취하려는 이들은 하늘 아버지 마음을 얼마나 애타게 할까? “말씀을 경험”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로 성장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무엇을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히 5:13-14).

고린도 교회는 주님이 아니라 사람을 따랐고,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자랑했다. 그들의 모임은 유익보다 해가 더 많았고, 그들에게 풍성히 주어진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었다. 이 모든 폐해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 위에 믿음을 두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성경은 우리 삶을 믿음의 경주 또는 씨름(싸움)이라고 부른다(히 12:1; 엡 6:12). 함께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하자.

2. 소망 가운데 행하라(22절)

고린도 교회가 처음부터 바른 믿음에서 미끄러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경계에 실패하고, 담대히 믿음을 변호하지 못하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를 멈춘 까닭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세상에 두기 시작하면서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일꾼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교회에 들여왔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대로 모이고 은사를 활용했다. 심지어 죽은 자에 관한 부활의 소망도 잃어버리고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고대 시대 욜로 정신으로 방탕하게 살기에 이르렀다(15:32). 누가 소망 없는 일에 열심을 내겠는가? 소망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견실하고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라는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동력을 모두 잃어버렸다(15:58).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소망을 일깨운다. 13절에서 21절까지의 모든 권면과 당부와 문안을 마친 후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22절). 이것은 바울의 저주인가? 아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아람어 “마라나타”의 음역)는 주께서 곧 오실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진정한 고백의 인사말이다. 주가 오시면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보상하실 것이고(“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15:58), 반대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저주하며 그들의 행위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고전 5:13).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하는 수고에 더욱 항상 힘써야 한다. 교회가 가진 소망이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바라고 즐거워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사람의 영광인가? 당신의 소망은 환난을 인내하고 연단에 이르게 하는가 아니면 환난을 피하고 멈추게 하는가? 당신은 매일 ‘마라나타’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며 사는가? 주 오심을 준비하는가?

3. 사랑 가운데 행하라(14-21절)

사랑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의 핵심이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라는 권면에서 시작되고(14절), 15-21절까지는 사랑의 당부와 문안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22절에선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모든 문제가 결국엔 ‘사랑’의 부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은사의 부족함이 없었던 그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러 번 강하게 질책했다(13:1-3).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사랑으로 는 일이어야 한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형제자매 사랑이 모든 일의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요일 3:14; 4:20). 말씀을 전하는 일도, 청소와 설거지를 하는 일도, 학생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도, 반갑게 성도를 맞이하는 일도, 찬양을 부르고 연주하는 일도, 밥을 짓고 잔디를 돌보는 일도, 모두 주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동력으로 하는 일, 주와 성도를 사랑하기 위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모든 방언과 예언,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믿음과 구제와 봉사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15-18절에서 바울이 소개한 인물 곧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는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라고 명령했다(18절). “알아주라”라는 말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인정하고 그들이 본을 보이고 가르치는 대로 따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16절). 스데바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아가야의 첫 열매로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얻은 성도였을 것이다(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들은 회심 직후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고(15절) 성도들은 그들이 얼마나 사랑으로 수고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15절). 브드나도아가이고는 각각 ‘행운’, ‘아가야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출신이 자유인이거나 노예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사회적 출신이나 지위, 형편, 민족 등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너희의(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채웠”다는 그 사랑의 헌신만을 높인다(17절). 그들은 바울을 직접 찾아와 고린도 교회를 염려하면서 날마다 속이 눌렸던 바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18절). 그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너희)를 이어주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 세워주는 일을 하게 하려고 사랑으로 수고했고, 바울은 이를 크게 기뻐했다(17절).

주님이 알아주시는 교회의 섬김은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오래 섬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사랑으로 섬기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교회가 알아주고 본으로 삼고 따라야 할 사람은 유명한 사람도, 사회적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다. 사랑의 본을 보이는 사람이다. 더 겸손히, 더 온유하게, 발 씻기는 종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 그가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19-21절까지는 문안 인사가 이어진다: “문안하고”(19절), “문안하니”(20절), “문안하라”(20절), “문안하노니”(21절). 바울은 그가 현재 머물고 있는 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이 그들에게 문안한다고 알렸다(19절). 그리고 함께 동역하고 있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그리고 그들 집에서 모인 교회간절히 문안한다고 알렸다(1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모든 형제”가 그들에게 문안한다고 알렸다(20절; 고전 1:2,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21절에서는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하면서 대필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써서 사랑의 인사를 전달했다. 바울은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서로를 향한 합당한 태도라고 믿었다. 그래서 지역 교회, 그 교회를 구성하는 일꾼과 성도, 그리고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가 다 함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비는 사랑의 인사를 나누기를 바랐다. 그리고 직접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명령했다: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20절). 입맞춤은 유대인들이 사랑으로 문안하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다(창 27:26; 마 26:49; 눅 15:20). “거룩한”이란 수식어는 입맞춤에 성도사랑 외에 그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문안은 일방적인 사랑의 인사가 아니다. “서로”에게 적극 베풀어야 할 사랑의 인사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주의와 개인주의에 병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가 성도 간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문안 인사에서 드러난다. 아는 사람, 친한 사람에게만 문안한다. 성도로서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안녕을 빌어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한다. 고린도 교회 만연했던 분열과 차별은 결국 사랑의 부재가 그 원인이었다. 우리는 정말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교회인가? 우리의 사랑은 서로 문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서로 문안하라!

4. 결론

바울은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의 역학 관계, 연결 고리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했다(롬 5:1-8):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마임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객관적 진리에 기반한 믿음은 환난도 꺾을 수 없는 소망을 만들어내고, 소망은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성령으로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그 풍요로운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연단한다. 믿음, 소망, 사랑이 협력하여 더욱 주를 사랑하고 주의 일에 힘쓰도록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축복의 인사를 남겼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23-4절).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어서 성도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을 잃지 않기를,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품은 이 사랑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 가운데 “예”로 응답받기를 간절히 간구하며 축도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한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나의 간절한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하기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행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