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음이 없는 사람(들)
본문: 마가복음 9:14-29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는 마태복음 8:5-13을 통해서 예수님께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칭찬을 받았던 한 백부장의 이야기를 살펴봤었다. 예수님은 그가 가지고 있던 믿음에 놀라셨고, 그 믿음의 특징은 ‘겸손’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하나님이신지 알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죽어가던 그의 어린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고 예수님께 구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로 그가 구한 것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바로 이 겸손한 믿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참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9:14-29의 주제도 ‘믿음’이다. 여기서는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19절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셨다(19절). 또한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했다가(22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책망을 받아야 했다(23절).
이들은 ‘믿음 없음’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지만,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만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아버지의 경우도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불신자’라고 불릴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 그들의 믿음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순간에 그들은 믿음 없는 자처럼 행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은 그들의 상태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믿음 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래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기도하는 것이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구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에 제자들의 삶이 이러해야할 것을 가르치셨다. 오늘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잠시 계시지 않는 동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에 제자들은 믿음에 따라 행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예수님께서 항상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곧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었다. 더 이상 제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귀로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모든 일들은 마치 꿈과 같이 여겨지고, 예수님의 약속들도 희미하게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했다. 무엇이 사실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서 그냥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사실인 것이 보이지 않아서 점점 희미해지고 의심이 생기기도 하는 상황에서 사실을 사실로 믿는 믿음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 믿음에 관한 교훈을 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두 부류의 믿음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은 나에 대한 과신의 결과였고(자신), 아버지의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결과였다(의심). 예수님은 이 두 불신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신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 없음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
사건은 제자들의 이야기가 앞뒤에 기록되어 있고, 그 안에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말씀의 기록된 순서를 따라 사건을 살펴보자.
불신 A: 자신(14-19절)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앞의 사건과 이어져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제 큰 전환점을 맞았다. 그동안은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과 권능으로 선포하셨다면, 이제는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을 훈련하시는데 조금 더 집중하신다. 그 전환점이 된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사건이다(막 8:27-29). 제자들의 고백 직후에 예수님은 처음으로 고난 당하실 것과 죽음,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당할 고난과 그들이 받을 영광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9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맛보기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 사건은 바로 그 일 직후에,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막 9: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내려와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9명)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다. 서기관들과 제자들이 변론하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계속해서 예수님과 갈등이 있었던 그룹 중 하나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책 잡고 무너뜨리고 싶어 했었다. 아마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고 사람들은 많이 모여 있었던 이 상황이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제자들을 무너뜨리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뒤에 나오는 것처럼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에게 더 유리하게 논쟁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여튼,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다.
막 9: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님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모세처럼 광채가 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복음서의 저자들이 언급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또한 예수님은 변화산에서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9절), 본인의 얼굴에서는 비범한 광채가 나고 있었다면 그 또한 상황에 부적합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며 환호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막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변론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한 것일 수도 있고 서기관들에게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자나 서기관 중 하나가 아니라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왔던 아버지가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더 대답하기 곤란했을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던 것 같다. 서기관들이었다면 이 상황을 이용해서 예수님께 반문을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경우는 뒤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조용히 묻는 것을 볼 수 있다(28절). 이 상황은 9명의 제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상황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책망처럼 그들에게 들렸을 것이다. 여튼,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자, 그 상황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이 나서서 답변을 한다.
막 9:17–18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사람은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였다. “말 못하게 귀신 들린”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아들은 전혀 말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절을 보면 추가로 “못 듣는 귀신”이라는 표현도 예수님은 사용하셨다. 즉, 이 아들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나면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였을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이 아버지가 그런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온다. 그나마 오늘날은 장애인들을 보조하는 도구나 제도도 어느 정도 있지만 여전히 불편함을 피할 수는 없다. 예수님 당시는 그 불편함이 훨씬 더 했다. 그들은 혼자서는 살 수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보이는 곳에 두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때로 귀신은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아서 거꾸러뜨리고 입에 거품을 물게하고 이를 갈며 파리해지게 만들기도 했다.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누가는 (말하지 못하는) 그가 갑자기 부르짖게(비명) 하고 몹시 상하게 한다고도 기록했다. 몸을 상하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 22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불과 물에 자주 던져졌다고 말한다. 아이는 귀신의 통제 아래 뜨거운 불에 몸을 던지고, 깊은 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귀신, 즉 타락한 천사들, 악한 영들은 이렇게 사람을 파괴적으로 괴롭힌다. 멸망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귀신들이 눈에 보이게 활동적으로 일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귀신들을 주요 활동 방법은 아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일한다. 은밀하게 활동한다.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길을 걸어 가는데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얼굴에는 흉터가 있고 온 몸에 문신을 하고 “태워줄까”라고 물으면 선뜻 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누가 봐도 잘 생긴 사람이 번듯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친절하게 “태워드릴까요”라고 묻는다면 마음이 동할 것이다. 사탄과 그의 세력들이 선택한 전략은 후자다. 오늘날 사탄의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젊고 멋지고 아름답고 친절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용을 보지도 않고 호감부터 가진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그들의 목적은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사람을 파멸시키기 원한다. 그것이 그렇게 보이지 않게 만들 뿐이다. 오늘날의 모든 가치관의 변화, 도덕적 기준의 변화, 삶의 방식의 변화 등을 유심히 보라. 모두 ‘좋은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모두가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에 반하는 좋은 것은 없다. 성경에 위배되는 더 나은 것은 없다. 모두가 사탄의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사탄은 그렇게 사람들을 불못으로 던지고 있다.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귀신 들린 아들은 당사자로서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버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아이가 죽지 않도록 아버지는 항상 예의주시해야 했을 것이다. 불에서, 물에서, 아이를 계속해서 건져내야 했다. 한번씩 발작을 일으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큰 일 없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 대신 제자들이 있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능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기관들이 개입하여 제자들과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그 논쟁 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제자들이 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막 9: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제자들은 이미 그들은 귀신을 쫓아냈던 적이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보내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고, 실제로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막 6:7, 13). 귀신을 내쫓는 능력은 그때만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들은 오늘 사건에서 귀신을 쫓아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의아해 하면서 예수님께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28절). 그 아버지도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가복음 9:38에는 요한은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다고 예수님께 보고 하는 장면도 기록되어 있다. 이 말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우리만의 특권이라는 전제가 있다. 즉,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 내는 일을 해왔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실패했을까?
어떤 사람은 29절의 말씀에 기반하여 이 귀신이 특별한 ‘종류’, 즉 더 강한 종류여서 제자들이 쫓아낼 수 없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영화같은데서 보는 것처럼 더 강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하거나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거나 하지 않다. 예수님은 단한번도 귀신을 쫓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으신 적이 없다. 너무 강한 귀신이어서 쫓아내신 후에 좀 쉬셔야했던 적도 없다. 지난 시간에 봤었던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그 어떤 귀신, 즉 타락한 천사라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힘, 권세는 하나님이신 예수님 아래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던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귀신은 그들의 힘으로 그냥 쫓을 수 있는데, 어떤 귀신은 기도를 해야만 쫓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실패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부르시며 한탄하셨다. 다른 번역에 보면 앞에 “오!”가 추가되어 있다. 작은 단어이지만, 예수님의 답답함이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살다보면 참 답답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를 믿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만큼 믿을 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나를 믿지를 못한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려면 내가 무슨 범죄자라도 된 것처럼 이리저리 수색을 한다.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서 확인하고, 몸에 위험한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한다. 여행 목적이 뭔지를 물어본다. 여행 목적이 여행이지 뭐 다른게 있을리가 없는데, 자꾸 확인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행기 탈 때만 그런게 아니다. 뭐만 하려고 하면 자꾸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 무슨 서류 하나만 발급 받으려고 해도 몇 번이나 뭘 그렇게 확인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속이기라도 할까봐 그러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들처럼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취급을 받는 것은 항상 기분이 나쁘다.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특히나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계속해서 지켜보던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물론 제자들의 연약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종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리석음과 불신에 대한 답답함을 표현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막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온 우주에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왜 제자들은 그런 믿음 없음의 모습을 보였을까? 힌트는 29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고 다른 것으로 귀신을 쫓으려고 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아주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들이 그동안 해왔던대로 했을 것이고, 아마 효과가 없으니 더 열심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하지 않았다.
여기서 기도는 어떤 퇴마를 위한 주문 같은 것을 외우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 같은 데서 보여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마치 자기들의 힘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을 것처럼 행했다는 의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귀신에게 나오라고 할 때, 그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도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 왜 그랬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불신은 기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느냐, 귀신을 쫓기 직전에 기도를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번 귀신을 쫓아내면서, 그들은 마치 스스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은 했겠지만, 그들은 실상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되는 성공에 그들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굳이 필요 없는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한탄하셨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좀 보이는 것 같다. 일단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믿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또한 사역에 있어서도 좋은 프로그램, 좋은 교재 등 여러 방법론들을 따르며 믿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니 잘 되었다는 사례들을 봤고, 우리도 해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이대로만 하면 될 것 같은 자신이 생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기도하기만 한다면, 우리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며 한탄하실 것이다.
불신 B: 의심(20-24절)
이제 예수님은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시고, 이를 통해 그 아버지의 믿음 없음도 알게 하신다.
막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자 그 아버지가 묘사했던 그대로 귀신은 아이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물으신다.
막 9: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마치 의사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으셨어요?”라고 묻는 것처럼 예수님도 물으셨지만, 의도는 의사와 같지 않았다. 의사는 정말 몰라서 진단을 위해 그렇게 묻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모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고통을 아셨고 그를 돕기 원하셨다. 아버지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이런 고통 가운데 있었음을 말하며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한다.
막 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 말에서 그 아버지는 믿음 없음을 드러냈다. 그는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상황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돕기 원하실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시점에서 그는 분명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실 수도 있고 하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의심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은 답답해 하시면서 한탄하셨다면, 여기서는 강하게 도전하신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은사주의나 번영복음을 추구하는 진영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면서, 우리도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선포하셨다. 이보다 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오해가 많지만, 한가지만 확실히 하자면, ‘모든’, ‘전부’, ‘전혀’와 같은 단어도 맥락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하나님이 동그란 네모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 성품에 모순되지 않는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실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말의 의미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일을 믿음만 가지면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본문의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단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그렇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고, 따라서 능히 하는 일도 예수님과 관계 없는 어떤 것이 될 수는 없다. 즉, 일단 예수님을 믿고 나면, 내가 원하는 재물이나 건강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능력에 대해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지, 누군가를 고치실 수 있는지, 어떤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지, 그런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고 구해야 함을 예수님은 이 아버지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이 아버지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이렇게 소리쳤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성경에 나오는 믿음과 관련된 가장 정직한 기도가 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 믿음이면 충분했다.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의심과 믿음의 싸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싸움 속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의 주요 온전키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구했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신다. 그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신다.
믿음 B: 의심을 확신으로(25-27절)
막 9:25–26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사람들이 점점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아이는 계속해서 고통 가운데 소리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극적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하셨다.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재발 가능성까지 막으신 것이다. 그리고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
사람들은 진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 마치 죽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도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여전히 의심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결국은 이렇게 죽은 것인가하는 마음을 품었을지 모른다. 그때 예수님께서 움직이셨다.
막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여기 사용된 표현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사용된 표현이다. 그래서 아이가 정말로 죽었고 예수님이 그를 살리셨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맥락 상 아이가 실제로 죽은 것 같지는 않다.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에 아이는 탈진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실 때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아이를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다”고 기록했다. 멀쩡해진 아이를 품에 안은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었음을 회개하며,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믿음 A: 자신을 기도로(28-29절)
그럼,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책망을 받았던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일을 경험하고 그들도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가서 물었다.
막 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의아했던 것이다. 전과 다르지 않았는데, 왜 이번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그들은 알고 싶었다.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앞서 말했지만, 전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그들은 과거에 성공했었던 경험에 따라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계시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 상황이 그들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계신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지만, 그렇다고 그 능력이 그들의 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동안의 성공을 통해 마치 그런 듯이 착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삶에 현실화 한다. 언제나 나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을 내려놓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귀신 들인 아이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끊임없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믿음 있는 자의 삶이다.
도전
오늘 말씀은 사실 바로 앞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면이 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스럽게 변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것을 목격했다. 어쩌면 그들은 드디어 구약에 약속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삶은 산 위의 삶이 아니라 산 아래의 삶이다. 보는 것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은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하는 그런 삶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소망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을 소망한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조롱과 채찍질 앞에서 의연하길 바라고, 돌로 치든 톱으로 켜든 칼로 찌르든 어떤 환난과 학대를 받아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마 그런 믿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온전한 믿음일 것이다.
그런 믿음을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나의 어떤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이 아버지의 기도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책망하셨던 부분만 바꾸면 된다. “주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제 안에 여전히 불신과의 싸움이 있지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믿음에는 분명한 결단이 따르지만, 결단이 곧 믿음은 아니다. 결단 했으니까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거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 믿음의 결단을 보였다. 하지만, 곧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도 보였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 아무리 내가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자신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이 믿음의 주이시고 온전케 하시는 이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을 구하지 않는다. 필요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구한다. 계속해서 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정말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믿음 있는 자로서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