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본문: 마가복음 4:1-20
설교자: 조정의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려졌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씨가 떨어진 여러 가지 땅의 비유’라고 하는 게 맞다. 땅의 종류를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이렇게 네 가지로 보거나, 좋은 땅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들로 각각 구분하여 여섯 가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비유(παραβολή)의 뜻은 ‘유사하다’, ‘닮다’인데, 친숙한 일상의 예시를 들어 그 유사성으로 설명하려는 바를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비유에 탁월한 교사, 예수님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한 서기관에게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는 집 그리고 나라와 유사하게 사탄도 자기를 거슬러 분쟁하지 않는다고 비유로 반박하셨다(3:23-6).
비유를 해석할 땐, 그 속에 담긴 단순하지만, 핵심이 되는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과제이고,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찾으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공관복음이 모두 중요하게 다룬 여러 가지 땅의 비유는 예수님의 나머지 모든 비유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데(13절),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이례적으로 비유의 의미를 친히 설명하셨다(3-8, 14-20절). 그러나 먼저,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어떤 사람은 보고 알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돌이켜 죄 사함을 받은 자인가, 아니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영원한 죄를 고집하는 자인가를 엄중하게 분별해야 한다.
1.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9-13절)
예수님은 아무런 맥락 없이 비유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는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족들과 서기관들의 배척을 받은 그날 주어졌다고 말했다(마 13:1,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그날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성령 하나님의 증거를 모독하는 죄라서 영원히 사함받지 못할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하셨다. 그리고 다시 바닷가로 가셨고, 그곳에 모여든 큰 무리를 가르치셨다(1절). 오늘날 갈릴리 호수 부근, 가버나움과 타브가 사이에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만’이라 불리는 장소, 자연이 만들어낸 원형극장에서,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앉거나 서서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가지 비유를 들었을 것이다(2절). 3-8절까지의 씨가 뿌려진 여러 땅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었다(10절).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비유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11…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1-12절). 예수님은 청자를 “너희”와 “외인”으로 나누신다. 너희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비롯한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다(“둘러앉은 자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3:34-5). 그들에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마침내 드러난 복음의 비밀이 그들에겐 밝히 알려진 것이다(골 1:26). 한편 외인은 그 밖의 사람들로 예수님께 모여든 셀 수 없이 많은 군중이다. 그들은 본인 또는 지인의 치유나 축귀를 원하거나, 놀라운 표적과 권위 있는 가르침에 매료되었거나, 양식 얻기를 원하거나, 이스라엘의 회복, 정치-군사적 독립을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 똑같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외인들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 복음에 대한 반응이 회중의 상태를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의 가르침이 내부인과 외부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극명하게 가른다고 말씀하셨다. 비유는 믿는 자가 하나님 나라 비밀을 더욱 분명히 알고 소유하게 했고, 믿지 않는 자는 더욱 완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13절). 이 비유는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를 담고 있고, 모든 비유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데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인이 잔뜩 섞인 무리에게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씀하셨다(9절). 그들 모두가 복음을 듣고 깨달아 믿게 될 것이라고 보지 않으신 것이다. 씨가 뿌려진 여러 가지 땅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네 가지 혹은 여섯 가지 종류의 땅은 사실 두 가지 영적 상태를 말해준다. 들을 귀 없는 자와 들을 귀 있는 자.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죄 사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다.
2. 들을 귀 없는 자들의 비유(1-7, 14-19절)
먼저, 들을 귀 없는 자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그들은 비유 속에서 길 가, 돌밭, 가시떨기에 해당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농부는 허리춤에서 씨를 던져 밭에 먼저 뿌리고 쟁기질로 흙을 덮는 방식으로 파종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밭의 한쪽 끝엔 덤불과 가시나무가, 다른 쪽은 마을로 향하는 길이 연결되어 있어서, 씨를 뿌리다보면 일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엉뚱한 곳에 뿌려지기도 했다. 비유에서 씨는 말씀을 뜻하고,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14절).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받는 들을 귀 없는 자들의 마음은 각각 다음과 같다:
① 길 가는 사람이나 가축이 많이 다니면서 딱딱하게 굳은 땅으로 씨가 심기지 못한다. 결국 길 가에 뿌려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4절). 그 의미를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5절). 그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다. 들은 말씀을 깨닫거나 묵상하지도 않는다. 무관심 또는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라서 그렇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는데(롬 10:17), 그들의 들음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 사탄이 들은 즉시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씨나 뿌리는 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그곳에 있었던 바리새인, 율법 교사,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을 생각해 보라. 놀라운 권위와 지혜가 담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도, 그들의 마음엔 조금의 깨달음도 감흥도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고 완고하게 만들었다(3:6).
② 돌밭은 “흙이 얕은”, 겉으로 볼 땐 그냥 밭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거대한 암석이 있는 땅이다. 표토가 얕기 때문에 온상처럼 발아가 빠르고 급속한 성장을 보인다(“곧 싹이 나오나”, 5절). 하지만 뿌리가 깊이 내릴 수 없기 때문에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린다(6절). 주님은 이런 영혼들을 가리켜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셨다(16-7절). 믿는 자도 고난을 당할 때, 넘어지기도 한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버리고 떠났고(막 14:50), 마가 또한 선교 사역의 어려움 앞에 후퇴했다(행 13:13).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넘어지는” 것은 계속해서 죄를 고집하는 배교를 뜻한다. 생명의 떡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많은 이들의 비방을 받자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기로 결단한 많은 제자들(요 6:66), 종말에 실족하여 서로 배반하고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을 받게 될 많은 사람들(마 24:9-12)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한때, 성도로 인정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를 나누기도 했었지만,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를 완전히 떠나 죄악된 삶을 고집하며 영원한 멸망을 향해 걸어간다.
③ 가시떨기밭은 실제로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가 아니라, 밭을 정돈하면서 덤불과 가시를 잘라냈지만, 뿌리는 남아 있는 상태의 땅을 말한다. 씨가 뿌려졌을 땐, 돌밭과 마찬가지로 잘 자랄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기 때문이다(7절). 가시는 급속도로 자라서 토양 속 양분과 수분을 다 빨아들여 다른 식물의 성장을 막는다. 그리고 자라면서 햇빛을 가려 다른 식물을 질식시킨다. 주님은 영적으로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9절).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주님은 가시라고 하셨고, 그 가시가 가리키는 것은 곧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및 기타 욕심이라고 하셨다. 돌밭의 경우가 핍박의 문제였다면, 가시떨기는 미혹의 문제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은 영생의 말씀을 따를 기회가 있었는데도, 재물이 많아 발길을 돌렸다(막 10:17-22). 가룟 유다도 돈궤를 맡은 자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요 12:6).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배교했고(딤후 4:10),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떤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염려 때문에, 혹은 가족이 마음에 걸려서 주저했었다(눅 9:57-62).
이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자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육신적인 모습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지만, 어쨌든 예수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니까 믿고 거듭난 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하다. 그들에겐 열매가 없다. 주님은 다른 비유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3:10). 세상과 벗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가? 아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약 4:4). R. C. 스프로울은 그래서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 침투한 가장 끔찍한 교리 중 하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입니다”라고 말했다. 맞다! 세상과 불륜을 즐기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는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3. 들을 귀 있는 자들의 비유(8, 20절)
그러면 어떤 사람이 들을 귀 있는 자들인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④ 예수님은 이들을 “좋은 땅”에 비유하셨다. 여기 뿌려진 씨는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는데, “삼십 배”, “육십 배”, 심지어 “백 배”가 되었다(8절). 주님은 이것을 풀어 설명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받아” 이런 “결실을 하는 자”라고 하셨다(20절).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열매란 무엇일까? 분명한 건 단순히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여러 가지 업적을 말하는 건 아니다. 종말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7:22-23).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씨가 가리키는 말씀, 그 말씀이 맺는 결과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믿음을 태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자라게 하고,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키워준다. 점점 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하게 이끈다.
성경은 모든 말씀이 추구하는 열매가 무엇인지 밝히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물론 믿는 자도 말씀 앞에 냉담해지거나 견고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환난과 핍박 앞에 움츠러들 수도 있고 뒷걸음질 칠 수도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흔들리거나 미혹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당연하거나 장기적으로 계속 그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히 10:39). 그만큼 우리 자신이 믿을 만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아버지는 자녀를 끝까지 책임진다.
당신은 어떤 밭인가? 길 가, 돌밭, 가시떨기라면 당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로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를 고집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영원히 그렇게 정해져 버린 것인가? 누구도 죽기 전까지 그걸 알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좋은 땅을 타고 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쁜 땅을 타고 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완악하고 딱딱하며 더러운 마음 밭을 은혜로운 쟁기질로 갈아엎어서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정결한 마음으로 바꿔주신 것이다(겔 11:19; 36:26).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라.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요 15:1), 내 마음 밭을 일구어 달라고, 그래서 복음의 씨가 심겨 열매 맺을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간절히 구하라. 주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눅 11:13).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비유 속 좋은 땅이 바로 그들이란 걸 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계속해서 말씀이 마음 밭에 심기기를 바란다. 말씀의 씨를 간절히 기쁨으로 받고 삶에서 자라나 열매 맺기를 구한다. 그냥 적당히가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나 되는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당신 안에 머물도록 힘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