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본문: 마가복음 8:27-38
설교자: 조정의
침례식은 결혼식과 같고, 주의 만찬 예식은 결혼 기념일과 같다. 우리는 침례에 순종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한 자가 되었음을 많은 증인 앞에서 엄숙히 서약한다(관계 시작). 그리고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희생적인 사랑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는지 기억하고 감사한다(관계 성숙). 본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에 맞춰 다시 설명하면, 우리는 침례를 통하여 이제 주를 따르겠다고 약속하고, 만찬을 통하여 계속 주를 따르겠다고 결단한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나 주를 따라올 수 없다고 못 박으셨다. 분명한 요구 조건을 제시하셨다. 주님의 요청은 이제 주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새 신자, 그리고 계속 주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기존 성도에게 엄청난 도전과 동시에 무한한 격려가 된다. 먼저, 주께서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주시는 도전을 살펴보자.
1. 도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34-38절)
예수님이 도전하신 대상은 “무리와 제자들”이다(34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다니셨는데, 길에서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27절), 대답을 들으신 후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29절).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이 바로 “무리”이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기고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다(28절). 한편, 예수님이 “너희”라고 지칭하신 자들이 바로 제자들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랐다(29절).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불러” 놓고 이렇게 도전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
“누구든지”는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예외가 없다. 무리든, 제자든,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든,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반드시 이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외면하고 그분과 자신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맹세하며 잡아뗐다(마 26:72).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그렇게 외면하고 부정하라고 요구하셨다. 이유 없이 자신을 미워하고 모질게 대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외면해야 할 때, 언제든 그렇게 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 틀이다. 오늘날 언어로 바꾸면 ‘자기 교수대를 지고 따르라’ 정도가 되겠다. 두 번째 요구는 사실상 첫 번째 요구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요구에 맞게 우리가 자신의 소원, 욕심, 갈망, 권리 등을 주를 따르기 위하여 외면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 목숨을 외면한다. 주를 따르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때,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다(눅 14:26). 예수님은 지금 선택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과 자신 중에서 언제든 예수님을 택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순간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선택을 말한다(현재형).
그래서 세 번째로 예수님은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하시면서 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절). 다시 한번 “누구든지”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를 위한 삶(“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삶)과 그리스도를 위한 삶(“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삶)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를 위한 삶은 결국 잃는 삶(“잃을 것이요”)이고 주와 복음을 위한 삶은 결국 얻는 삶(“구원하리라”)이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신다. 나를 위하여 얻고자 하는 삶은 잃는 삶이고, 주를 위하여 잃고자 하는 삶은 얻는 삶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이 땅에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계산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6-38절). 만일 당신이 자기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아서 결국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해보자. 그런데 만일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목숨이 가장 귀한 것이므로 당연히 무지막지한 손해다. 또한, 얻은 모든 것이 무가치해진다. 마찬가지로, 목숨, 생명을 영원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한 자는 아무리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거나 누렸다고 해도 결국 예수님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가지고 오실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받게 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앞에 그는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와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삶을 살아야겠는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구원)얻는 삶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 각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평안과 만족을 누리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위로와 격려를 얻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돌봄과 사랑이 필요해서, 어떤 사람은 행복을 얻으려고 주를 따른다. 어떤 사람은 부모와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앞날이 잘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닌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처럼, 사람들에겐 각각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바라는 그리스도가 있다. 문제는, 언제든 그들의 기대를 벗어날 때, 따르는 것을 멈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 조건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내 갈망과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원치 않는 시련과 핍박이 주어질 때, 심지어 내 목숨까지 위협을 받을 때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2. 격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7-33절)
34-38절의 요구만 보면, 누구도 주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만 같다. 명령은 떨어졌고, 나머지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야 하는데, 믿음도 의지도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요구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과 함께 주어졌다. 27-33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고, 주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밝히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요구는 우리가 알아서 달성하라고 던져주신 도전만이 아니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바라보라는 격려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로마의 신 판을 비롯한 온갖 우상 신전이 가득했던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선택한 신을 숭배하고 따르던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택하여 따르냐고 물으셨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로 봤다. 이스라엘을 속량하고 이방인에게서 독립시킬 위대한 통치자로서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 정치적 승리를 예수께서 가져다주실 것이라고 그들은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았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답했다(29절). 그들의 대답은 옳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칭찬하셨다(마 16:17).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도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믿고 따랐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처럼.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30절),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실 일이 무엇인지 밝히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31-2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에 관하여도 믿고 따를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32절). ‘항변하다’는 단어의 뜻은 ‘주관하다’, ‘통치하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예수님을 주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이렇게 심하게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절).
주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주를 따른다고 말하는 제자도 사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일하셔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삶을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도록 주관하려 한다면. 많은 사람이(제자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방 국가를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면 그걸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만,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수 있었다. 무엇이 더 유익한가? 온 천하를 얻고도 영혼이 영원히 버림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하지만, 우리는 자주 우리 방식이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더 잘 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렇게 해주지 않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항변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말씀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주님은 단순히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충성심을 보이라고 요청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단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만큼 각오하고 이만큼 충성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을 믿으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때로 사람의 일로 봤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이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주께서 우리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여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이 들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이한 방법으로 가장 큰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은 매순간 우리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최선(최고의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따르라(롬 8:28).
제리 브릿지즈는 <하나님을 의뢰함>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열매를 소개했다: 1) 감사, 2) 예배, 3) 겸손, 4) 간구, 5) 용서. 첫째, 당신은 범사에 감사하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허락된 모든 일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
둘째, 당신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참된 예배엔 두 가지 인식이 요구된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과 우리를 바르게 아는 것.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고 광대한 분이신지 알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완악하며 진토에 불과한 존재인지 알 때, 우리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라고 고백하며 예배할 수 있다. 예배의 상실은 하나님을 낮추거나 우리를 높일 때, 발생한다.
셋째,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도,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자신을 그 앞에서 낮춘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고 하시는 일을 겸손히 받아들인다.
넷째, 당신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는가? 감사와 예배와 겸손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은 간구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분께 구한다. 예수님처럼 간절히 바라는 것을 구하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요청한다. 계속해서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다섯째, 당신은 당신에게 죄를 범한 이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가? 용서가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연결될까? 분명 악한 말과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의 잘못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부정적인 결과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 또한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 주님을 따르자.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따르자. 그분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