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네 믿음의 너를 구원하였다

본문: 마가복음 5:21-43

설교자: 조정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라고 요청하신 예수님께 사람들은 계속해서 믿음 없음으로 반응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의 권위, 치유와 축귀의 놀라운 능력에 놀라고 두려워했으며 몰려들었지만, 그분을 믿는 일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믿기는커녕 귀신의 왕을 힘입어 일한다고 비방하고, 안식일을 어기거나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걸 볼 때 신성모독자가 분명하다고 정죄했다.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미쳤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던 제자들조차 풍랑 중에 믿음 없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두 인물,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죽음의 문턱에 도달한 12살 외동딸을 둔 회당장 야이로에게서 우리는 ‘믿음’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34절), 야이로에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요구하셨다(36절).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히 11:6).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믿음이 구원하는 참믿음인가? 우리는 올바른 믿음에서 쉽게 멀어질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참된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면서 “어떤 이들은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다고 경고한다(딤전 1:19).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성경이 요구하는 참믿음인가? 말씀을 통해 점검하라.

1. 참믿음은 겸손을 동반한다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온 야이로와 여인에게서 모두 발견되는 태도는 바로 겸손이다. 먼저 야이로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셨을 때, 즉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가다라(쿠르시, 게르게사)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을 때,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다. 야이로 회당장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재산과 지위와 권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22절). 회당장은 사두개인이나 서기관처럼 전문적인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회당의 평회원 중에서 두루마리와 예식을 감독하고 교리와 전통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회당 안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1:21-28),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후에(3:1-6), 바리새인이 그분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 지도부에서 파견된 서기관들이 공적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기소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보고 발아래 엎드렸다(22절). 밤에 몰래 찾아와 아무도 볼 수 없는 밀실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큰 무리인 완전히 공개된 장소, 바닷가에서 겸손히 엎드려 간곡히 구했다(23절).

그에겐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어린 딸이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23절). 그녀는 열두 살 된 외동딸이고(눅 8:42)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이었다(“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마 9:18). 그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과 인맥을 총동원하여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사망으로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붙잡은 것이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절). ‘나는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돕지 않으시면 제 딸은 죽은 목숨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박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야이로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했다. 성경은 ‘믿어라’ 대신 ‘낮추라’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믿음에 반드시 동반되는 태도가 겸손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망적인 처지란 걸 철저히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태도다(약 4:10). 낮은 곳에서 높은 곳에 계신 분께 은혜를 내려달라고 구하는 거다. 이런 겸손의 태도를, 이어서 볼 여인에게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이 여인을 만났다(24절).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환자였다(25절). 만성 자궁출혈처럼 보이는데, 매우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수치스러운 질병이었다(“”, ‘채찍’, ‘매’, ‘고통’, 29절). 율법에 따르면 월경을 겪는 여성은 그 기간 동안 부정하여 성전 출입이 불가했고, 사람들과도 떨어져 있어야 했다(레 15:19-27). 같은 이유로 이 여성은 병이 낫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되고(금혼, 이혼), 성전 예배가 금지되며, 앉거나 누운 자리, 접촉하는 물건이나 사람도 모두 부정해지기 때문에 공동체 밖에서 격리되어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많은 의사에게 가진 것다 허비하면서까지 괴로운 처방과 치료를 받았지만(탈무드: 새끼 나귀 이마에서 피를 내어 환자의 머리에 바름, 암나귀 배설물에서 나온 보리알을 소지함) 아무 효험이 없었다. 병은 도리어 악하되었다(26절). 그녀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27절),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믿음을 가졌다(28절). 여인은 야이로와 유사한 겸손의 태도를 보인다.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낮은 곳에서 간절히 구하는 참 자세다. 후에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서 이 여인을 찾으셨을 때, 여자는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렸다(33절). 

참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완전히 의존한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그러나 자녀가 성숙할수록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부모도 그걸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러실까? 아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항상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 도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믿음 좋은 자가 아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어서, 그 앞에 날마다 엎드려 은혜를 구하는 자가 믿음 좋은 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막 10:14).

2. 참믿음은 관계를 기반한다

참믿음의 두 번째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특별히 가르쳐주고 싶으셨다. 꽉 막힌 길을 뚫고 응급차가 긴급 환자에게 달려가듯,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길에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고 미는 큰 무리를 통과해야만 했다(24절). 그때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예수님 옷에 손을 댄 여인은 그녀의 믿음대로 그 즉시 병 고침을 받았다: “이에 그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절). 증상이 완화된 수준이 아니라 병의 근원부터 말끔히 낫는 초자연적인 기적이었다. 스스로 느낄 정도로 몸은 완전히 건강해졌다. 여인이 즉시 자기 몸이 온전해진 것을 알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곧바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스스로 아셨다(30절). 예수님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셨다. 골든 타임이 흐르고 있던 그 시각, 죽어가는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이 타들어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어떤 중요한 일을 위하여 발걸음을 돌이키신 걸까?(30절). 제자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 옷에 손을 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리가 에워싸고 밀고 당기고 있는데, 여기 멈춰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재차 물으시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31절). 그러나 예수님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고침 받은 여인이 그대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녀를 찾으신 것이다(“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2절). 

여인의 믿음은 올바른 대상을 향했지만, 그 믿음 자체는 미신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 그 관계를 기반으로 그분이 하실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험한 물건을 만지면 일어나게 될 마술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쪽에 가까웠다. 전승에 따르면 이 여인은 고향인 가이사랴 빌립보로 돌아가 그곳에 예수님과 그 옷자락을 만지는 자신의 동상을 만들었는데, 예수님 동상 발치에서 자란 약초를 먹으면 무슨 병이든 나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미신이 잘못된 믿음의 전형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런 잘못된 믿음으로 교회를 찾고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일월성신에 빌거나, 다른 종교인들이 각각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자기 믿음을 보이려고 애쓴다. 다만 그 대상이 예수님일 뿐이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형성된 믿음이 아니라, 그 관계를 필요로하지 않는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여자가 모든 사실을 주님께 아뢰고 나서 주님은 그녀에게 “딸아”라고 부드럽게 부르셨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딸”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장면이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단지 신비로운 체험 또는 기적적인 경험에 머물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녀의 믿음이 예수님께 고정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녀를 관계적인 호칭인 딸이라고 부르신 거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개인적으로 약속하셨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절). 이것은 앞으로는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악몽 같던 십이 년의 고통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여인이 평안히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아무런 기반 없이 떠돌던 그녀의 믿음이 이제는 예수님과 맺어진 관계와 그 속에서 주님이 그녀에게 하신 약속에 뿌리박혔기 때문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쉽게 오해한다. 구원이 우리 믿음의 크기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간절히 믿기만 하면 주님이 들어주시는데, 그 믿음이 부족하거나 연약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정성이 부족해서’, ‘그만큼 간절히 바라거나 구하지 않아서’ 들어주지 않으신 것이라고 여길 때가 많다. 물론 성경은 낙심하지 말고 구할 것을 명령한다(눅 18:1). 그러나 이런 생각의 저변에 믿음이 관계에 기반한다는 것에 대한 망각이 깔려있다. 관계는 쌍방이다. 믿음은 내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붙들고 영원히 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분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큼 세게 붙잡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붙잡고 있는 분이 누구시냐는 것이다. 그분이 얼마나 강한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시느냐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나온 아버지는 자기의 믿음 없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예수님은 강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둔 믿음, 참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3. 참믿음은 결과를 의탁한다

마지막으로 참믿음의 특징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이 가장 선하고 좋은 것이라는 걸 믿는 것이다. 길에서 지체하는 동안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왔고,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알렸다(35절). 예수님은 바로 곁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를 들으셨고, 방금 자식을 잃은 아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무얼 믿으라는 것인가? 다 끝난 것이 아닌가?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은 더는 소망이 없다고 여겼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비 나사로가 죽고 나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보였던 믿음도 그랬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다(요 11장). 예수님이 무얼 하실 수 있고 없고를 자신의 믿음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의탁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둔 그 믿음을 거두지 말고, 계속 붙들고 있으라고 권하셨다(현재형). 믿음은 믿는 대상에게 끝까지 의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회당장과 그의 아내(40절)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밖에는 이미 고용된 애곡하는 자들의 피리 소리와 우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예수님은 마치 자고 있던 아이를 깨우듯,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고(41절), 그 즉시 소녀는 벌떡 일어나 걸어 다녔다(42절). 비웃었던 사람들은 곧 크게 놀라고 또 놀랐다. 예수님은 소녀의 배고픔까지 자상하게 챙기셨다. 그리고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많이 경계하셨다(43절).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줄 것이라고 믿으며 예수님께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참믿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끝까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무엇을 주든지 끝까지 의탁하는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믿음의 본이 된 선진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35). 어떤 사람은 야이로처럼 부활로 죽은 자식을 얻었지만, 어떤 사람은 결박되어 심한 고문을 받기를 택했다. 전자는 믿음의 결실을 얻은 것처럼 보이고, 후자는 믿음이 없었거나 부족했거나 혹은 믿음의 배신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었다. 이 땅의 삶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얻은 것이다. 참믿음은 이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주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그분께 모두 맡기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약한 데서 점차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순한 것이 제거되면서 점점 더 순수해지는 과정에 빗대어 말했다(벧전 1:7). 그러므로 강한 믿음 혹은 참믿음이란 순도 높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 믿음, 교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엎드려 겸손히 고백하는 믿음, 하나님이 무엇을 허락하시든지,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시더라도, 결국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는 믿음, 믿음의 결국이 내 주관적인 믿음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주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고 그 피로 맺으신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언약 관계 안에서 얼마나 신령한 약속을 하셨는지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붙드는 믿음. 그 믿음이 바로 참믿음이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