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본문: 마가복음 1:21-45

설교자: 조정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됐다(막 1:1). ① 먼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세례 요한을 통하여 주의 길이 준비되었다(2-8절). ②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세례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공증하셨다(9-11절). ③ 예수께서 직접 시험을 통과하셔서 자신을 입증하셨다(12-13절). ④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이 자라신 동네 갈릴리를 시작으로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14-5절). ⑤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어받게 될 제자들의 선택이 시작되었다(16-20절). 21-4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셨는지, 그분의 일상적인 하루가(“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회당에서 나와”, “저물어 해 질 때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21, 29, 32, 35절) 마치 일기처럼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을(27절) 접한 모든 이는 큰 충격에 빠졌는데(22절, “놀라니”), 그 권위로 귀신을 쫓고(21-28, 34절), 질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다(29-34, 40-45절).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38절), 그분이 시작하신 복음의 권위와 능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악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복음 전파를 하러 오셨다. 그러면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왜 진정으로 복된 소식이 되는가? 복음을 믿거나 필요로 하는 당신은 반드시 그 참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

1. 예수님은 귀신을 진멸하러 오지 않으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의 큰 성읍으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이 있었으며, 다메섹으로 향하는 상인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곳을 복음 전파의 핵심 본부로 삼았는데, 이들의 일상은 보통 이렇게 시작되었다(“늘 하시던 대로”, 눅 4:16):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21절). 회당장의 권한 아래 평범한 유대인 남성이 경전을 읽고 가르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예수님은 이미 백성에게 두루 존경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 요단강에서 제자를 불러 모아 사역을 하던 랍비였기 때문에 기회가 쉽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치기를 시작하자,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22절). 단순히 지혜나 설득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왜?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22절).

당시 서기관들은 권위 있는 랍비의 견해를 참고하여 경전에 관한 해석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수준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예수님은 자기 권위를 가지고 매우 담대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도 성경을 읽고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4:21). 누가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무슨 뜻인지를 추측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랍비는 더 정확한 해석을 낼 수도 있겠지만, 누가 감히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오직 예수님뿐이다. 자기 영으로 구약을 직접 기록하시고, 친히 그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이런 종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이 말로만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도 그 권위가 입증된 사실이 이어지는 축귀 사역을 통해 밝히 드러났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23절).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경련과 괴성을 일으키며 나왔고(26절),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에게 말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27절).  

귀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반한 악한 세력의 주축이다.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귀신과 함께 반역에 동참했다(창 3장). 마땅히 진멸할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은 귀신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없애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귀신이 예수님을 방해하려고 덤볐다. 회당에서도 먼저 소리 질러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훼방한 것은 더러운 귀신 쪽이었다(23-4절).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았다. 같은 날 저물어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모든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왔는데(32절), 그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다(34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분이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속한 더러운 귀신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멸하실 권세가 있으셨고,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자신들을 내버려두라고 거세게 반항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그들을 진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내신 건 복음 전파를 방해했기 때문이고, 더러운 귀신으로서 예수님 정체를 밝혀 복음을 훼방하지 말 것을 철저히 금하셨다(34절). 축귀가 아니라 복음 전파가 예수님의 참된 임무였다.

2. 예수님은 질병을 없애려고 오지 않으셨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 더 큰 권위를 얻게 된 예수님의 소문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28절). 그 결과 안식일이 끝나가는 시간인 저물어 해 질때에 수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몰려들었는데(32-3절), 그 전에 먼저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가버나움 사역 때 주로 머무셨던 시몬(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셨다(29절). 예수님의 초기 제자였던 야고보, 요한, 시몬, 안드레가 함께 했고, 그 집에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30절,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다(31절).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항상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이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것과 40절부터 나오는 “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신 것은 정말로 그 당시 사회의 관습과 심지어 율법의 금지 조항까지 뛰어넘는 예수님의 끓는 동정심과 넘치는 사랑을 보여준다.

예수님께는 참으로 모든 질병을 정복하는 권세가 있었다. 시몬의 장모가 앓던 열병도 나름 심각한 병이었지만,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40-45절에 나오는 “나병”으로 번역된 피부병은 절대로 나아질 수 없는, 끔찍한 저주로 여겨졌던 죽음의 병이었다. 특별히 이 병은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가 만지는 모든 산 것과 죽은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병이라서 많은 유대인들이 부정한 죄와 연관 지어 병자를 격리했다(레 13:45).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그 병을 순식간에 말끔히 고치셨다(41-2절).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34절)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지만(41절), 그들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나병 환자에게 뭐라고 엄히 경고하셨는가? “삼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라고 하셨다(44절). 만일 예수님께서 질병에 걸린 불쌍한 환자들을 고치러 오신 것이라면, 이렇게 경고하실 필요가 없었다. 고침받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가서…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을 때, 예수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45절). 예수님께로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사방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일부러 피하신 것이다. 

귀신과 마찬가지로 질병도 죄의 결과로 발생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세상엔 죄가 없었고, 그래서 악한 세력도 질병도 그에 따른 고통과 수고와 슬픔도 없었다. 그러나 죄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을 대적한 무리가 생겼고, 생명의 근원을 떠난 이들이 상실한 마음을 가진 채 저지르는 온갖 더러운 죄와 그에 따른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왔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모든 악한 세력은 진멸할 것이고, 모든 질병은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그러나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를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오셨나?

마가는 35-39절에서 이렇게 분명히 답한다. 안식일 저녁부터 늦게까지 자신을 찾아온 모든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신 주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기도하셨다(35절). 이것이 예수님의 모든 권위의 비밀이었다. 기도로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뜻을 구하시고 매일의 필요와 악한 자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아버지께 구하셨다(마 6:9-13). 그때 마침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왔다(36절). 그리고는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말했다(37절). 간절히 병 낫기를 원하는 자들과 귀신 들린 지인을 고치고 싶은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째서 여기 한적한 곳에 계시는가?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38절). 모여든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셨을까?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따로 있어서다. 그것은 바로 전도였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복된 소식이, 귀신과 질병에서 놓임받는 것보다 더 귀하고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 소식에 관한 도를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축귀와 치유의 능력은 그 좋은 소식을 권위 있게 입증하는 은혜의 도구에 불과했다.

3.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질병이나 악한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무엇인가? 1,000억의 빚을 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대략적인 이자가 한 달에 무려 3억이 넘는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망한 인생을 불쌍히 여긴 어떤 재력가가 그의 이자를 몇 달 갚아주면 고마울까? 당연히 고마울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당장 몇 달은 고맙지만,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여전히 갚아야 할 1,000억의 빚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결국엔 계속 매달 3억의 이자까지 갚아야 하는 소망 없는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은 도저히 갚을 수가 없을 만큼 커서 영원한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만 한다. 그 죗값으로 이 땅에서도 악한 세력과 세상의 지배를 받고, 질병 등이 주는 고통과 수고와 슬픔을 지불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질병을 고치러 오셨다면, 건강해진 죄인은 죗값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건강해진 몸으로 더 많은 죄를 잔뜩 짓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악한 세력에서 구하러 오셨다면, 그때부터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만족시킬 삶을 살 수 있는가? 전적으로 부패한 양심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겐 놓임받는다 해도 더러운 자신에겐 평생 매여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자가 아니라 원금을 갚아주러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과 죄인을 단절시킨 죄,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이 바로 그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생명의 근원을 떠나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건강이나 재물과 같은 터진 웅덩이들이 아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러운 죄를 가지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목숨값으로 우리 죗값을 치르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생명의 하나님과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질병과 악의 권세에서 놓임받는 것보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을 이루게 된 것이 얼마나 더 큰 복인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와 필요를 해결하고 영원한 갈급과 소원을 영원히 변함없이 만족시키는 복인지를 반드시 알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감사해야 한다(벧전 1:8). 그러면, 우리가 지금 겪는 질병과 죄의 문제는 뭘까? 원금을 갚아주셨는데 왜 이자를 지불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주님은 다시 오셔서 모든 악의 세력을 진멸하고 질병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죄의 결과물을 모두 없애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뿌리 뽑지 않고 남겨두신 데는 이유가 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다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권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물론, 우리는 질병에서 고쳐 달라고 구할 수 있다. 얽매인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구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을 쏟아야 한다.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몸의 건강을 돌보고 영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우리는 그분의 ‘족한 은혜”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후 12:9).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강함을 의지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신다. 더 풍성한 삶이란 하나님 없이도 형통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붙어 있는 삶이다. 하나님은 영생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롬 8:28).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친히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아낌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 예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라. 그리고 더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도구와 기회로 삼아라. 그러면 약속하신 영생을 더 풍성히 얻고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