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본문: 마가복음 2:13-17
설교자: 조정의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는지 신속하게 보도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향한 미움이 어떻게 커졌는지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두 가지 극명히 다른 반응을 일으켰다: 믿음과 불신, 회개와 거부, 사랑과 혐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님을 안고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리라고 예언했는데(눅 2:34),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를 치료하고 악한 영에 사로잡혀 비참한 인생을 살던 이를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께 열광하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할 때, 그리고 실제로 죄인을 불러 구원하실 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미워했을까? 급기야 3장 6절에 가면 바리새인, 헤롯당, 그 외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기까지 이른다. 병자나 귀신 들린 자는 자기를 고쳐준 은인에게 감사하여 그를 기꺼이 섬기려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왜 죄인은 자기를 불러 사하여 주시는 구세주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것일까? 본문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명확하게 알려준다.
1.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13-14절)
먼저, 예수님이 레위(“마태”, 마 9:9), 당시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던 흉악한 죄인을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자. 사건은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셔서 그분 앞에 나온 큰 무리를 가르치시는 상황에서 발생했다(13절).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갈릴리 사역을 하고 계셨는데, 집 또는 들판, 바닷가 등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자기에게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몰두하셨다. 가버나움은 다메섹으로 향하는 무역로가 지났고,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수많은 어종과 주변 농경지에서 수확되는 각종 작물이 수시로 거래되는 곳인 만큼 소득세나 수송세, 관세 등을 거두기가 좋았다. 로마는 토지세나 인두세는 직접 징수했지만, 그 밖의 세금은 그 지역 현지인에게 하청을 주어 오늘날 지역 세관 공무원처럼 세금을 징수하도록 맡겼는데, 로마 정부가 요구한 금액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취하도록 입찰을 냈고, 그것을 따낸 사람이 세리가 되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에 가판대를 세워놓고 세금을 징수했다: “지나가시다가…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4절).
유대인이 세리를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취급한 이유는 분명하다: ① 그들은 유대 민족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로마 제국을 위해서 일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순사로 일했던 조선인과 같이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원수 편에서 일하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② 그들은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거두어 자기 배를 불렸다(세례 요한,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눅 3:13, 세리장 삭개오,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눅 19:8). 실제로 레위가 부과된 것 이상을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세리에 관한 사람들은 인식은 견고했다. 그들은 매국노였고, 약탈꾼이었다. 민족의 배신자였고,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였다. 그래서 후기 유대교 문헌인 탈무드는 세금을 걷는 유대인이 법정에 서는 것을 금한다(배심원, 증인). 그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가족도 함께 수치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리가 만진 집은 부정해지고, 세리의 돈은 더러운 돈이기 때문에 아무리 궁핍해도 받아선 안 된다. 심지어 세리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죄도 아니다. 그만큼 세리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다.
예수님은 레위가 세금을 징수하던 그 길을 지나가시다가 그를 보셨다(14절). 그를 크게 꾸짖든지, 손가락질하던지, 아니면 침을 뱉고 지나가셔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그런 흉악범에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 미움받을 일을 자초하셨다: “나를 따르라”(14절).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부르심이다. 불특정 다수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레위를 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복음들을 기회는 줘야지’라며 무심코 가볍게 던지신 말이 아니다. ‘지금부터 끝까지 나를 따르며 항상 함께하자’라고 진지하게 요청하신 것이다(현재형). 단 한 번의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친교를 나누자고 요구하신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의 의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죄인과 함께한 예수님(15절)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 들어가셨다(15절).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기 때문이다(눅 5:29). 레위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했다: “일어나 따르니라”(14절, 부정과거). 주저함 없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다른 제자들처럼, 눅 5:28), 과거의 삶에서 돌이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이 잔치는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연 잔치와 같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죄 가운데 살던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 죄 사함을 받고 다시금 관계를 회복했을 때, 아들을 되찾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베풀었던 것처럼(눅 15:23-4절), 레위는 죄인인 자신을 불러 용서하시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예수님께, 자신을 은혜로 받아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탕자의 마음으로 만찬을 베풀었다. 그 자리엔 레위가 어울렸던 이들이 많이 참석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었다(15절).
‘끼리끼리 어울린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레위가 어울리던 사람들은 세리가 포함된 “죄인들”이었다. 유대인이 볼 때, 가끔 율법을 어기는 자가 아니라 율법 밖에 있어 절대적으로 타락한 자들이다. 미쉬나에 따르면 도박꾼, 대부업자, 안식년에 장사하는 자, 난폭한 자 그리고 세리 등이 여기에 속했다. 그런데 누가 이 “죄인들”을 따로 분류했을까?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절대적인 죄인이라고 규정했을까?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이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이 유대인에게 두루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을 교정하신 적이 있다(마 5:17-48). 율법을 제대로 보면 살인, 간음만 죄가 아니라 미움, 음란한 생각도 죄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죄인끼리 더 큰 죄인이 누군지 구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리는 절대적 죄인이니까 그들에 비하면 우린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이라는 태도는 치명적인 교만이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꼬집으셨다(눅 18:10-14). 세리를 죄인으로 규정한 바리새인은 “자기를 높이는 자”였다. 그 교만이 자기 눈을 완전히 가려서 자신들 또한 예수님의 죄 사함이 반드시 필요한 환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했다.
한편, 예수님은 이 잔치에 왜 참석하신 걸까?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행보를 불편해하고 쓸데없는 의심과 불신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셨을까? 사실이 아닌 소문이 스캔들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가면 어떻게 하나? 사람의 중심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러나 레위의 잔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잠시 인사만 하고 급히 나오신 게 아니다. 15절에 두 번 언급된 “앉아 잡수실 때에”, “앉았으니”는 ‘기대어 눕다’라는 의미인데, 예수님이 잔치의 중심에서 여러 사람들과 끊임없이 음식과 대화를 나누신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17절 마지막에 나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려고 그 자리에 계셨다. 그리고 그 결과 레위를 비롯한 만찬에 참여한 많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15절).
레위의 잔치에는 예수님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15절).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은 그 자리가 편했을까? 평생 벌레처럼 여기던 이들이 잔뜩 모인 자리에 좋은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용서에 감동했을까? 복음이 진실로 모든 죄인에게 차별 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했을까? 그들은 어부였고 물고기를 매매하면서 가버나움에서 레위를 여러 번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은 레위가 예수님께 같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마가는 이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이 말로 제자들의 마음을 무척 난감하게 만들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3. 예수를 거절한 죄인들(16-17절)
“어찌하여 (그는)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 어쩌면 제자들도 마음 깊이 그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그들의 비난을 들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답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는 필요 없다. 하지만, 병든 자에겐 의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만일 병든 자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으면 어떻게 될까? 그는 의사의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상태이지만, 쓸 데 없다고 여길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여 회개하도록 이끄시지만, 정작 죄인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굳게 믿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아무 쓸 데 없는 것으로 여기고 거절할 게 분명하다.
왜 죄인은 죄라는 영적 질병을 치료해 주시는 유일한 의사를 거절하는가? 스스로를 죄가 없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서다. 왜 죄인은 은혜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미워하는가? 자기는 솔직히 완벽하진 않아도 이만하면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 가면 속내가 모두 드러나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낱낱이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죄인은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한다. 예수님께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 빛 앞에서 자신의 어둠 즉 악한 행위가 드러나는 게 싫기 때문이다. 디스크 파열로 심한 통증을 앓는 사람이 계속해서 병원에 가는 것을 꺼리는 이유와 같다. 계속해서 ‘이만하면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미루고 또 미룬다. 왜 그런가? 의사를 만나면 내 증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밝히 드러날 것이고 그것을 제대로 치료할 때 드는 수고와 고통과 비용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결국 의사를 찾는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을 마침내 인정한다.
영혼의 치료자,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자신의 평판이 망가지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말을 기꺼이 들으셨다(마 11:19).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가까이하지 않는 죄인들과 얼마든지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교를 나누실 수 있었다. 그분께 가장 중요한 것은 죄로 병든 영혼을 고쳐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는 것까지 하셨다.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자기를 믿는 자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하셨다. 오늘은 부활 주일이다. 주님의 부활이 무엇을 확증하는가? 주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은 우리 죗값이 단번에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치러졌다는 것을 확증한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어 부활의 몸을 입고 온전히 주님과 영원한 친교를 누리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을 확증한다. 베드로는 그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다(벧전 1:3).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저지른 죄의 참상이 낱낱이 드러날까 봐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죄의 짐을 지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 진 것같이 살아가는 당신을 불쌍히 보신다. 당신의 모든 죗값을 기꺼이 치르신다. 당신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건강한 영혼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신다. 아직도 당신이 건강한 자라고 우기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쓸데없다고 거부하고 있는가?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미루고 또 미루지 말라. 당신의 영혼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에게 믿음으로 도움을 구하라.
거듭난 자들이 종종 바리새인처럼 굴 때가 있다. 자신도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고, 지금도 은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비신자를 더 흉악한 죄인 취급하기가 쉽다. 예수님의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병든 영혼으로 불쌍히 봐야 하는데,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물론,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 때문에(고전 15:33), 의인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시 1:1). 그러나, 그들의 죄를 미워하고, 나쁜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도, 죄로 병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도 배우자. 세리나 죄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며, 그들에게도 우리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님은 어떤 죄인도 차별하지 않고 은혜를 약속한다는 것을: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그들을 선한 눈으로 보고 그들에게 선으로 대하라.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