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다

본문: 마 16:18-19 외 여러본문

설교자: 최종혁

지난 설교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교회가 사랑스러운만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회를 사랑해야하는 이유는 교회 자체가 아닌 예수님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낚시 좋아하는 남편을 사랑한다면 낚시도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하고 똑같이 들릴 수 있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낚시 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낚시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돈도 많이 들고 차도 망가뜨리는 낚시를 하지 못하게 막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남편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어떤 취미에 대해서라면 이런 생각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남편이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 기대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의 문제라면 그렇지 않다. 만약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나 형제, 부모님을 낚시처럼 대한다면 문제가 있다. 굳이 내가 그 사람들까지 관심 가져야하냐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남편과의 관계도 결코 좋을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면,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어떤가?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취미와 같은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사랑이고, 기도이며, 가족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자신을 줄 만큼 사랑하신다. 교회의 하나됨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시며 교회를 가족이라 하신다. 만약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계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하고, 따라서 우리도 교회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럼 이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지 일부러 노력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데 익숙하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미운 사람은 미워하는데 익숙하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할 것을 명하시면서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마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익숙하다. 우리에게 사랑은 ‘가슴이 시키는 것’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랑해야해서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기도 하고,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한 관계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가슴이 시키는 대로’만 하지는 않는다. 부부 관계가 그렇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렇다. 형제자매 사이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친구 관계도 비슷할 것이다. 사랑해야 해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도 있다. 관계 자체가 중요한 경우에 그렇다. 사실, 가슴이 시키는 대로만, 즉 감정에 따라서만 사랑하면 관계라는 것은 지속될 수가 없다. 사랑에서 감정은 쉽게 오고 가기 때문이다. 중요한 관계일수록 우리는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감정에 상관 없이 노력한다. 애초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 노력을 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다른 모든 종교처럼 교회도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힘들면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굳이 참고 견딜 이유가 없다. 그러려고 종교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된 신자라면 교회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여러 이유로 지금 교회를 사랑하기 어려워할 수는 있고 심지어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사랑한다. 이미 그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 실천적인 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먼저 중요한 것은 교회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겠다 혹은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말하는 경우, 대부분 그 이유가 자신의 경험에 있다. 경험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경험을 통해 교회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각은 왜곡되기 쉽다. 그래서 너무 쉽게, ‘교회는 진리를 떠났어, 교회는 사랑이 없어, 교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해’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이 시각을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교회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왜 저렇게 좋아하지?’라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스스로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본다면 교회는 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교회를 볼 수 있다면, 우리도 교회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은 마태복음 16:18-19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보신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씀에서 핵심은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회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내 교회”라는 표현을 통해 교회는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세우리니”라는 표현을 통해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모든 논의를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첨탑이 달려 있는 커다란 건물이다. 아마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적 의미에서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예배당 건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건물주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셨다. 사실 에클레시아는 오늘날의 ‘교회’처럼 특정화된 단어가 아니라 당시에는 일반적인 단어로서 사람들의 ‘모임(무리)’을 의미했다. 그래서 에베소 지역에서 바울을 대적하여 소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무리도 ‘에클레시아’로 불린 것을 볼 수 있다(행 19:32, 39, 41). 하지만 서신서를 보면 결국 에클레시아는 아무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특정화된 표현으로 자리 잡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시작은 바로 예수님의 “내 교회”라는 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에클레시아가 일반적으로 ‘모임’ 혹은 ‘무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은 신약의 특정한 하나님의 백성만을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의 백성을 의도하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세우리니”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신다.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이미 하고 계신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 반석 위에”라는 표현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을 말한다. 즉, 교회는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공통점을 가지는 부분이 있지만, “한 새 사람”(엡 2:15)으로서 차별점을 가진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런 내용들을 다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교회’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뭔가 새로운 ‘무리’를 시작하실 것이라는 정도만 이해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무리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무리’라고 지칭할 때는 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냥 ‘사람들’일 뿐이지 ‘무리’는 아니다. 앞서 에베소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무리’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특징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교회”라는 표현으로 이 새로운 무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셨다. 이들은 예수님께 속했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든지 예수님께서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교회의 이런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 중 하나가 요한복음 10장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에 비유해서 말씀하시는데,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를 대조하여 말씀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양과 그렇지 않은 양도 대조하신다.

요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시는 이미지는 예수님 당시의 양 방목장의 모습이다. 목자들은 방목장으로 자기 양들을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다시 양을 데려갈 때가 되면 문지기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고 자기 양을 부른다. 그러면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온다. 반대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인의 음성이면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이것이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27절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것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내 양”이라고 부르는 양들의 특징이다. 목자가 그 양을 알 뿐 아니라 양도 목자를 알고 따른다.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인지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보라.
요 10:25–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즉, 예수님의 양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양은 목자를 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답했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예수님께 속한 양의 고백인 것이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내 목자가 맞는지 아닌지 헤깔려하지 않는다. 목자가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그들은 목자를 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며 중요한 특징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를 아신다.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유익이 아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 궁극적인 유익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모임이 교회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뛰어남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는 없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양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10:27–30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우리는 제발로 예수님을 찾아 오지 않았다. 우리가 목자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나아가게 하신 것 뿐이다. 언제 이 모든 은혜로운 계획이 세워졌는지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을 때?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았을 때?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인 ‘창세 전’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 전에 이 모든 계획이 세워졌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음성에 반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면 교회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물이니까 아들은 그냥 받기만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선물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도 계획해 두셨다. 바로 그 선물인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다.

예수님께 이 사실은 숨겨져 있지 않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억울해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기꺼이 이 땅에 오셨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나타내셨다(마 16:21).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하며 말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해서 값을 지불하고 교회를 사셨다.

행 20:28 …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내 교회”라고 부르시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구원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고, 그들은 하나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교회, 자신의 희생으로 값주고 산 교회, 예수님께 이 교회는 얼마나 귀하겠는가.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교회를 볼 때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실 것이다. 교회를 위해 자신이 치른 희생을 기억하실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볼 때 기억해야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방금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하나님)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말씀 때문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교회의 첫 교황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교황’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다. 또한, 만약 베드로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교황의 위치에 있었다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베드로는 훨씬 더 권위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베드로 자신도 베드로전서 5:1에서 자신은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표현했지, ‘교회의 반석’이라거나 ‘머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와서 기록한 베드로후서에서는 그의 후계자에 대한 언급이 있었어야 할텐데 그에 대한 암시조차 없다. 로마 가톨릭 자체도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언급한 것은 서기 250년이 되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세우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그 시작에 있어서 사도들,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기초(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답한다(고전 3:11).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으로서 베드로를 교회의 ‘기초’로 삼겠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라는 ‘사람’이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고백, 베드로의 가르침이 기초가 된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여기서도 사도와 선지자들이 교회의 ‘터’로 언급되지만, 그 터의 기준이 되는 모퉁잇돌은 예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유의 핵심을 봐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사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교회의 모든 것이 달려있게 된다. 교회의 모든 것은 예수님께 달려 있지 어떤 한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처음 고백한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시작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들에게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를 약속하기도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무오한 존재’가 되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충실하게 전하는 한, 예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의 기초를 놓고 교회를 세워가실 것이었다. 실제로 가룟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성스럽게 전했고, 그들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확고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셔서 그 확실함을 더욱 견고하게 하셨다. 어떤 죽음의 권세도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9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우실 이 교회가 가지는 놀라운 권위를 말한다. 교회는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실제로 교회가 누군가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 누군가의 죄를 사하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교회가 말씀에 따라 그런 사실을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할 수 있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 자를 교회는 불신자로 선포할 수 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이 어떻게 초대 교회에서 이루어졌는지를 기록한 역사다.

처음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했고 사람들은 마음의 찔림을 받아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물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고 그 날에 신도의 수가 3000명이 더해졌다. 베드로의 놀라운 언변과 설득력으로 가능했던 일일까? 그렇지 않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무리가 혹은 어떤 개인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 때마다 교회의 수는 늘어났다. 예수님은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기도 하셨다. 빌립을 세우셨고, 베드로를 세우셨다. 바울과 바나바도 세우셨다. 복음을 전할 자들을 세우시고 복음을 들을 자들을 예비하셨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누가 교회를 세웠는가? 사도들인가? 사도들이 수고한 것은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을 구원하기만 하셨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것은 단지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사도행전을 보면 구원 받은 자들은 구원 받고 각자 알아서 신앙생활을 해다고 말하지 않는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구원 받은 자들은 모였다. 교회가 되었다. 함께 예배했고, 함께 교제했다.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서로를 돌봤다. 그들 가운데 죄가 있을 때는 그 죄를 드러내기도 했다. 갈등이 생겼을 때는 인도자들의 결정에 따라 갈등을 해결하기도 했다. 큰 환난으로 교회가 흩어지기도 했지만, 흩어진 그곳에서도 그들은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또 다른 교회가 생겨났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세우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교회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교회도 세우셨다. 그 둘이 함께 모이는 교회도 세워졌다.

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복수형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곧 교회는 아니다. 두 세 사람의 성도가 모여도 교회일 수 있지만, 100명의 성도가 모여도 교회는 아닐 수 있다. 100명의 성도가 매주 모여서 등산을 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등산 동호회일 뿐인 것이다. 100명의 성도가 매주 모여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그것은 음악 감상모임이지 교회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의미하셨던 것은 단순히 구원 받는 사람의 숫자만 늘어나게 하겠다고 하셨던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교회로 세워졌다. 그 모습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의 의미는 21절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이 되는 것이다. 그냥 돌끼리 모여 있기만 한 것을 건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모든 돌들이 자기 자리에 있어야 그것이 건물이다. 교회가 그렇다.

이 말씀은 지역 교회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분명히 지역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에베소서 4장을 보자.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7절). 그리고 그 은사를 활용하는 것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12절). 이는 분명 지역 교회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 끝에 어떻게 말하는지 보라.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동일하게 교회의 각 지체(건물의 비유에서는 각 돌)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져 간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냥 교회만 오가는 사람들만 있다면 이런 교회는 세워지지 않는다. 교회에 방관자만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사도들이 그러했듯,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 안에서 행할 때,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교회를 이렇게 세우려고 하실까? 왜 교회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교회를 세우려고 하실까? 아니, 애초에 괜찮은 사람들만 모아서 교회를 세워도 될텐데, 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를 세우느라 이런 수고를 하실까?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위함이다(엡 3:21; 엡 5:27).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결국 이것은 구원의 목적이기도 하다. 구원의 목적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것만 생각할 때가 많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뿐 아니라 교회로서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엡 4:13),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엡 4:15)은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계속해서 교회를 세우신다.

교회는 연약해 보일 수 있다.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교회가 처한 환경도 쉽지 않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이 약속에 따라 반드시 세워질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룰 것이다. 그조차 처음부터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마 13:31–33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물론 이 말씀이 어떤 지역교회도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아니다. 문을 닫는 교회는 모두 잘못된 교회라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는데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말씀에 따라 행할 때 예수님의 이런 확실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땅의 교회를 이렇게 보신다. 폐허가 되어 아무 소망도 없는 건물이 아니라, 세워져가고 있는 건물이며 반드시 완성될 건물로 보신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교회를 그렇게 봐야 한다. 연약할지라도, 부족할지라도,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 건축에 동참해야 한다.

도전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다. 교회는 예수님께 더 없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교회를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상당 수는 사라질 것이다. 잘못된 기대를 버리고 올바른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축구 경기를 보면서 선수나 감독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비판하는 것도 쉽다. 교회에서 한발 물러서서 교회를 보면 비판할 수 있는 것, 비판할만한 것들 투성이다. 교회를 남의 건물 보듯 하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게 하면 내가 뭔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고, 나도 역시 교회를 그렇게 봐야 한다. 남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다. 내가 할 일은 이 교회 건축 현장에 뛰어 드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교회다. 교회로서 살아야 한다.

교회가 어떤 사람에게 속해있거나, 어떤 사람이 교회를 세운다면, 굳이 그 교회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 교회는 우리와 관계가 없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고 사도들이 기초가 된 바로 그 교회라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교회다. 그리스도의 약속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소유인 교회를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