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본문 : 마태복음 12:46-50외
설교자 : 최종혁
누군가에게 교회는 동호회 같아서, 교회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임이다. 누군가에게 교회는 회사다. 교회에는 해야할 일들이 즐비하여 그 일들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교회는 학교일 것이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곳이 교회다. 누군가에게 교회는 병원이어서 교회를 통해 아픔이나 상처를 치유 받기 원하고, 누군가에게는 휴양지 같은 곳이어서 교회에서 마음의 쉼과 안정을 얻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이 모든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이 모든 일들을 ‘가족’으로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무엇을 하든 교회는 가족이라는 관계 위에서 한다.
과거의 가족을 생각해 보면, 가족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다. 경제 공동체였고, 교육 공동체였다. 육체의 상처나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는 병원이기도 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가족 구성원의 성공의 가족의 성공이었고, 치욕은 가족의 치욕이었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랑의 공동체였고 하나의 운명 공동체였다.
교회도 그러했다. 교회는 하나의 큰 가족과 같았다. 교회는 모든 것을 함께 했다. 그래서 지금 어르신들을 보면 목회자들을 그저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정의 가장처럼 여기시는 것도 볼 수 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은 꼭 교회가 성경의 원리를 따르려고 노력한 결과들은 아닐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에 더 가까왔던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은 가족의 모습도 과거와는 달라졌고 교회도 그렇다. 많은 부분,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요시 하는 가치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지나치게 집단을 우선시 해서 개인을 부품처럼 여기는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은 지나치게 개인을 우선시 해서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과거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간섭을 하고 그것이 무례함이 되었다면, 지금은 지나치게 조심스럽거나 무관심해서 서로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둘 사이의 균형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족이다>라는 제목으로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가족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한다.
교회는 정말 가족인가?
무엇보다 먼저 주목할 사실은 성경은 교회를 가족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러기를 원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실체다.
실체
성경에는 교회를 지칭하는 여러 비유적인 표현들이 있다. 교회는 건물, 특히 하나님의 성전으로 비유된다(고전 3:9-11, 16; 엡 2:19-22). 혹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된다(고전 12:12-27; 엡 1:22-23). 교회는 양 무리이기도 하다(행 20:28-29; 벧전 5:2-4). 이런 표현들은 비유다. 교회는 실제로 건물이 아니고, 몸이 아니다. 양도 아니다. 단지 교회의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이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교회를 가족이라고 할 때는 다르다. 이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실체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교회는 건물과 같기도 하고, 몸과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양 무리와도 같다. 하지만 가족과 같지는 않다. 교회는 실제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호칭
이 실체는 교회와 관련되어서 사용된 호칭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부를 때 주로 사용했던 표현은 “형제들”이었다. “형제”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거의 350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이 육신의 형제가 아닌 하늘 가족 혹은 그 중의 일원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현은 성도들, 믿는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 사랑 받는 자들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호칭으로서는 “형제들”이 100번 이상 사용되어, 가장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는 형제들, 형제들의 모임으로 불렸다. 물론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남성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된 호칭이다.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많이 사용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성도들이 “형제들”이라고 불린 사실은 그렇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문화, 특히 유대인의 문화를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매우 특별하다.
조셉 헬러먼은 <교회가 가족이었을 때(When the Church Was a Family)>라는 책에서 초대 교회 당시 문화의 중요한 3가지 원칙을 이렇게 말했다.
1. 집단이 개인보다 우선이다.
2. 가장 중요한 집단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3. 가족 안에서 가장 가까운 유대는 부부가 아니라 형제 자매의 유대였다.
사도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개인보다는 집단이 중요했고, 그 집단 중에서도 가족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그 가족 안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형제 자매의 관계였다는 말이다. 즉,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단순히 유대 사회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서로를 그렇게 불렀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이방인들이 교회에 더해지기 시작했을 때 교회는 더 이상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혹은 다른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진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인지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른 것이다.
증거
실제로 교회가 이렇게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신약 성경을 읽어 보면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로마에 “뵈뵈”를 보내면서 교회가 그녀를 영접하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단지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까 잘 해줘”와 같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자매 뵈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롬 16:1). 여기서 “우리”는 좁게는 바울과 동역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로마 교회를 포함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즉, 바울은 뵈뵈를 외지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영접하고 받아줄 것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요한도 요한삼서에서 형제를 영접했던 가이오를 칭찬했고, 반대로 형제를 맞아들이지 않았던 디오드레베를 강하게 책망했다. 가족이 가족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라고 반복해서 부르면서, 오네시모를 자신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며 “사랑 받는 형제”라고 표현한다(몬 1:10, 16).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형제애에 호소하여 빌레몬이 부탁을 들어주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가 모두 한 형제들이라는 가장 중요한 관계가 빌레몬의 마음을 움직일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도 가족과 관련된 단어들이 사용된 경우가 많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문맥 상 여기서 말하는 형제 사랑(우애)은 육신의 가족이 아니다. 물론 육신의 가족도 사랑해야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 안의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해야 할 것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형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단어인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는 언제나 가족의 맥락 안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유일하게 신약 성경에서만 육신의 가족이 아닌 교회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교회는 실제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딤전 5:1–2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2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지금까지 말한 관점에서 보면 이 명령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 명령은 그저 나이와 성별에 적합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다. 실제로 집에서 부모에게 하듯, 형제에게 하듯, 교회의 성도들을 대하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는 약간의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가족은 가장 편한 사람이고, 그래서 때로는 내가 편한대로(마음대로) 대해도 되는 사람들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육신의 가족 관계 안에서도 옳은 생각이 아니고, 영적 가족인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신의 가족이든 영적인 가족이든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인 공동체다. 세상도 ‘가족’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인정하기 때문에, 여전히 ‘가족같은’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모임, 가족 같은 동네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교회는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교회의 실체가 가족이다. 고객 센터 같은 곳에 전화하면 상담원의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상담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안내 문구가 나올 때가 있다. 그러니까 정중하게 대해달라는 의미다. 성경은 다른 성도에 대해서 누군가의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오면 가족까지 앉는 경우가 많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같은 줄에 앉은 사람만 내 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옆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내 가족이다. 내 앞에 앉아 계신 모친님, 내 뒤에 앉아 있는 성도들도 모두 내 가족이다. 앞에서 찬양 인도를 하는 청년들은 나의 아들, 딸들인 것이고, 애찬 준비를 하시는 자매님들은 나의 어머니들이고, 더운 날 열심히 교회 시설을 관리하는 형제님들은 나의 아버지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교회는 어떻게 가족이 되었는가?
그럼, 교회는 어떻게 실제로 가족이 되었을까?
먼저 성경이 확실히 말하는 것은 누구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 땅에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으시다. 하지만 보다 친밀한 의미에서의 ‘가족’ 개념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8:42–4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듣기에 심히 불편하고 거북하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특징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42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깨닫지 못했다(43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행했다(44절). 이런 특징을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요한일서도 같은 기준으로 이렇게 말씀한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럼, 누가 이런 특징을 보일까? 모든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의 특징을 에베소서 2:2-3절은 그대로 반복하여 말하고 있고, 그들은 불순종의 아들들이고 진노의 자녀라고 선언한다. 그 어떤 사람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것이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이 될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까?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듭남’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허물과 죄로 죽었었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거듭남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직접적으로 연결지어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양자됨, 즉 입양이다.
롬 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출생이 아니라 입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입양’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당시 로마의 입양 관행을 배경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고 말한다. 로마의 입양 절차는 크게 보면 두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입양할 자녀를 생물학적 부모와 완전히 단절시킨다. 사회적 관계, 법적인 관계 등을 완전히 끊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입양한 자녀를 새로운 가족의 영속적인 구성원으로 만든다. 입양된 자녀에 대한 모든 권리는 가장이 가지게 되고, 입양된 자녀는 자녀로서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가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입양은 새로운 출생과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입양을 하는 주체가 누구를 입양할지 알고 선택했다는 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입양하셨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자녀로 삼으셨다. 사탄의 압제 아래 있던 영적 고아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다. 사탄과 우리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셨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입양이라는 법적인 선언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자녀라고 선포하시고 자신의 상속자로 삼으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만 두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만드셨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선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셔서 그 이상의 자비를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양자됨(입양)은 구원 받은 자에게 모든 좋을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
우리가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가족이 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결과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사랑의 결과로 우리는 형제 자매가 되었고,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말씀이 나의 이야기라면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속해있고, 속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럼, 교회가 가족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로 이것은 내가 교회에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있어서, 혹은 어떤 동일한 목적 의식이 있어서 모인 단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의 가족이 되게 하신 사람들이다. 우리 육신의 가족을 생각해 보면, 그 구성원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생길 때도 있고, 반대로 불평의 마음이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주관적인 마음이 가족을 묶어주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 가족이라는 사실 자체가 유대감을 만든다.
교회도 비슷하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 성도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주관적인 감정을 떠나서 나는 그들과 함께 교회라는 가족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교회에게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내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서도 끊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다른 성도와도 연합되었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떠나 있는 것, 혹은 교회로서 모이기는 하지만 손님처럼 오가기만 하거나 방관자로서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가족으로서 더욱 교회에 속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이는 교회가 나의 일상에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쳐야 함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성경적 관점에서 교회가 가족이라는 말은 교회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관계라는 의미이고, 그 말은 교회가 나의 실제 삶에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가 된다.
그 영향은 ‘나눔’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눔’은 다르게 말하면 ‘희생’이다. 나 혼자 쓸 수도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 자녀를 양육한다. 자녀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 부모를 돌본다. 남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돈을 받고 할 일을 가족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가족은 이런 실제적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관계인 것이다.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이런 가족의 나눔을 볼 수 있다.
행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들의 모습은 정확히 가족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재물을 나누었다. 음식을 나누었다. 마음을 나누었다. 시간을 나누었다. 그들의 삶을 나눈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들은 나눈만큼 잃었다. 재물을 나눴기 때문에 더 가난해 졌다. 음식을 나눴기 때문에 먹을 것이 적어졌다. 마음을 나눴기 때문에 때로는 더 슬프고 우울하고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시간을 나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시간은 더 줄어 들었다. 물론 서로 그렇게 하면서 유익을 얻은 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고 나누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나눴고, 그로 인한 손해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교회가 그들의 일상에, 그들의 선택에 실제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가족인 교회에 속해 있다면, 나의 일상에서도 교회가 가장 중요한 결정 요소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가정을 돌보지 않더라도 교회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헌신이 아니라 죄로 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개인주의에 큰 영향을 받아 그 반대 극단으로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다. 나누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내 일상에 주는 영향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저 주말 활동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주일이 아닌 날에 교회에 가려고 하면 아이들이 “일요일도 아닌데 교회에 왜 가요?”라고 묻는 시대가 되었다. 성도들도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서만 본다. 함께 하는 식사도 주일 애찬이 전부다. 그마저도 자신의 가족끼리 앉아 식사하거나, 특정 사람하고만 하는 경우도 많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삶을 나누어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나누어져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혹, 이런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교회가 가족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족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항상 앉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앉아 보는 것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수요일에는 어떻게든 일을 일찍 마무리하고 수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노력해 볼 수도 있다. 혼자 나오고 있는 청년이나 새로 더해진 가정을 집으로 초대해 보는 것을 해볼 수도 있다. 쉬는 시간이 폰을 뒤적거리고 있는 성도에게 먼저 말을 걸어볼 수도 있다. 어색하겠지만, 그것이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나의 일상에 영향을 주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교회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셋째로 이는 교회에 대한 나의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화목이다. 부모가 형제 자매들에게 바라는 것도 그저 ‘싸우지 않는 것’일 때가 많다. 가족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면 가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들에 모두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했다(약 2:1). 차별, 즉 누군가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것은 분명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고린도 교회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거나 가진 은사를 자랑하는 것은 교회에 분열을 가져 온다. 어떤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가족으로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풍성하게 베풀어주신 은사가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감사해야지 질투해서는 안된다. 다른 성도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도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주장하는 것도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일에만 몰두할 때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교회가 회사라면 싸움이 의미가 있다. 싸움을 통해 오히려 회사는 더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가족이다. 따라서 하나됨을 깨고 교회를 분열하게 만드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떻게 드러난다고 해도 정당화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가족은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이고, 다르게 말하면 종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23:8–12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장의 더 큰 맥락에서도 보면 여기서 예수님은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는 호칭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 그리고 금하신 것은 그렇게 불리고 싶어하는 태도다. 주인이 되고 싶은 태도인 것이다. 우리는 가족으로서 모두가 한 아버지의 형제 자매들이다. 형제 자매는 동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종이 되고 누구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서로의 종일 때만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교회가 가족이라는 말은 내가 종이 되어서 하나됨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태도로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넷째로 이는 교회에 대한 나의 책임이 있음을 말해준다.
가족으로서 교회는 함께하고 같이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서로” 명령들이 바로 이런 가족 관계에 기반을 둔 명령들이다. 우리는 서로 돌아봐야 한다. 서로 짐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대접해야 한다. 서로 세워 주어야 한다. 서로 격려해야 한다. 함께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책임이다. 누가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먼저 이렇게 하면 나도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으로서 내가 해야 할 나의 책임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사랑해야 할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 요한은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요삼 1:15)고도 말했다.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도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 된다. 이런 책임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의 문제를 다룰 때도 사랑할 책임은 여전히 있다. 누군가가 분명한 죄를 범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죄는 죄로서 분명히 다뤄져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말씀은 사랑한다면 죄를 죄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로 우리는 용서로서 죄를 덮어줄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으로 죄를 덮어줄 수도 있다. 화해하는 것으로 죄를 덮어줄 수도 있다. 결국 그 사람의 죄를 그 사람의 약점으로 삼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편에 서서 죄의 공격을 막아 내어 그 영향력을 최소로 하여 그 사람을 보호하고, 때로는 그렇게 하기 위해 나도 피를 흘리는 것이 형제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할 책임이 있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럼, 끝으로 예수님도 교회를 이런 가족으로 보시는지를 살펴보자.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는가?
예수님은 교회를 이런 가족으로 보신다. 자신의 가족으로 보신다.
마 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예수님은 가족의 개념이 소멸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일상의 사건을 통해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신 것 뿐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에 대해서 3가지를 가르치셨다.
첫째로 가장 중요하고 명확한 것은 영적 가족의 우선순위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어머니와 동생들은 당연히 가족으로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우선순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께 와서 소식을 전했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셨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 있다는 것은 말을 끊고라도 전달해야할 소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족은 그 어떤 관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었다(마 10:37). 오히려 그들은 “원수”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는 가장 좋은 가족 구성원이 된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서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부모를 존경하며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지는 않는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적 가족이 더 높은 우선순위에 놓인다.
예수님은 또한 영적 가족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다. 이는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진 자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당시 눈 앞에 있던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진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다.
셋째로 영적 가족의 중심은 예수님 자신이심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표현하셨다. 영적 가족은 결국 서로 형제 자매이지만, 그 중심에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이 계시다.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는 형제 자매가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는 자들에 대한 관점이다.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가족이다. 이 가족을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관계로 보신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영적 가족인 교회를 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까지 교회를 섬기셨다. 교회를 하나되게 하셨고,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셨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피로 맺어진 가족이 된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하신다.
히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신다. 때로는 우리도 우리가 부끄러울 때가 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기 창피한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그런 가족으로서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제대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쉽게 정죄하고 비난한다. 마치 그 대상이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처럼 대한다. 마치 그 사람을 깎아 내리면 내가 그만큼 올라가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할 때도 있다. 혹은, 너무 쉽게 포기 한다. 어차피 안될 일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여전히 우리를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우리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신다. 우리의 형제로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보시기에 가족으로 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도전
오늘날 교회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관이 더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는데 더 적합하다는 주장들도 있다. 어쩌면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불필요한 공동체로 봐서는 안된다. 첫째로 주님께서 그렇게 보지 않으시고, 둘째로 교회의 실체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게 있어 최우선은 사역이 아닌 관계다. 주님은 일하는 공동체가 아닌 가족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교회를 가족으로 바라봤던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형제보다는 영적 부모로서 이렇게 말했지만, 그 원리는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해 가족으로서 이런 수고를 계속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그렇게 해야한다. 일만 생각하면 불필요한 수고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당연한 수고일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그러니 우리 가족을 떠나지 말고, 가족을 사랑하며, 가족으로서 합당하게 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