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는 그리스도의 기도다
본문: 요한복음 17: 20-26 외
설교자: 최종혁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후로는 사람들이 항상 예수님의 주변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방해 받지 않는 한적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을 복음서에 종종 볼 수 있다. 오병이어 사건 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산에 올라가서 혼자 기도하기도 하셨다. 기도할 시간이 되면 기도하셨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기도할 시간을 만드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눅 11:1-4).
특히,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던 것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요한의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눅 3:21). 12 제자를 택하기 전에도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고(눅 9:18), 가까운 3명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변화산 사건 전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셨다(눅 9:28-29).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자가를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주기도문’으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 6장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며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이지,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신 내용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도 몇 가지는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그 외에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하셨던 기도나 어린 아이들에게 구원의 지혜를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신 기도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7장은 이런 면에서 보면 매우 이례적인 말씀이다. 26절 전부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17장은 거의 전부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18장에서 예수님은 체포되셔서 심문을 받으시고, 19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신다. 즉, 14-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인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말씀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하시기 전 제자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 14-17장인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 없이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할 제자들을 예수님은 위로 하셨고,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도 약속하셨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시며(요 16:33),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참된 평안을 누리라고 용기를 주셨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다른 기도는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으셨지만, 이 기도만큼은 자세하게 기록하셨다. 그만큼 중요한 기도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기도다.
이 기도가 특별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17장의 기도는 대상을 기준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1-5절), 제자들을 위해(6-19절),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믿을 모든 믿는 사람, 즉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다(20-26절). 하지만 이 기도의 내용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 영광의 복음을 먼저 믿고 세상에 전할 사명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되어 그 사명을 다 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런데, 이는 몇 명의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는 아님을 예수님은 20절에서 분명하게 하신다. 20절 이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내용을 거의 비슷하게 반복하여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아직 이 땅에 시작되지 않은 교회를 위하여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신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런 중보 기도는 현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하고 계시는 일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그 모습을 미리 짧게 보여주셨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고, 또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다. 오늘은 그 중 20-23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셨는지 살펴보자.
요 17:20–23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기도의 대상: 교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9절에서는 이 기도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면 21절의 말씀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그런 간접적인 면에서 이 기도는 세상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직접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한 세상을 위한 유일한 기도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 뿐이다.
이 기도는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다. 6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셨다. 16절에서는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들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떠날 것인데, 계속해서 그들이 속하지 않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11-12절은 이들이 갸롯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상을 마음에 두고 계셨음을 20절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하신다.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제자들(“이 사람들”)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시작될 교회(“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해서 기도하셨다. 당장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 즉 교회를 위한 기도인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과 이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요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눠졌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했고, 어떤 사람들은 영접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주셔서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그들 영혼의 구원자시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활한 엘리야나 약속된 특별한 선지자로 생각은 했지만,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이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가장 종교적이고 세상의 기준에서 도덕적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자유인도 있었고 종들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었고 멸시받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적은 사람도 있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건강한 사람도 있었고 아픈 사람도 있었다.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다른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이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다는 것,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고 그들에게는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리가 주어졌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을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들만이 예수님께서 “나의 것”, 즉 예수님께 속한, 예수님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다. 말씀에서 믿는 자들의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을 더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다(“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믿음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도들의 말로 말미암을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각자가 무언가로부터 특별한 깨달음을 얻거나 영감을 얻어서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제자들도 먼저 이렇게 말씀을 듣고 믿었다.
요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따라서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말”, 즉 제자들의 말은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들은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즉, 믿음은 개인의 어떤 경험이나 감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기초 위에 생긴다. 제자들은 실제 말로서 이 말씀을 전하기도 했고 또한 그 말씀을 기록하여 전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말씀의 전파를 통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만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에 포함된다. 이 진리의 말씀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누구든 예수님의 이 기도가 나를 위한 기도라고 받을 수 있다.
둘째,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이다.
사도행전 1:8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자신의 증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증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다. 예수님은 어떤 가능성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요한복음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들의 말로 인해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희망 가운데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제 얼마 후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아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두려워서 숨어 있을 것도 아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들은 말씀의 신실한 증인들이 될 것도 아셨고, 그런 그들을 통해 믿는 자들이 있을 것을 확신 가운데 말씀하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으셨을까? 제자들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해 믿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앞서 6절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을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셨지만, 2절에서는 모든 영생을 얻는 자들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고, 여기 24절에서도 모든 믿는 자를 “내게 주신 자”라고 표현하신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을 예수님은 보전하고 지키신다(요 17:12).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알고 양도 자기 목자를 알기에, 목자의 음성(말씀)에 양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어떤 양도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않으신다. 따라서 예수님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가 아니라 확신 가운데 믿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믿을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지만, 불특정다수를 위한 기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믿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예수님의 무한한 지식으로 인해 이 기도는 정말로 정해진 대상을 위한 기도가 된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기도 안에 있었다. 따라서, 이어지는 기도는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이지만, 나를 위한 개인적인 기도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기도가 주는 위로와 도전을 특별히 더 깊이 생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기도의 내용: 하나됨
요 17:21–23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반복되는 표현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기도의 내용은 바로 “하나됨”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생각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필요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숫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다. 교회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어떤 성격의 사람들, 어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으셨다. 믿는 자들로 세워질 교회의 모습은 다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안의 하나됨이었다.
교회의 하나됨은 크게 두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신분적인 하나됨이고 다른 하나는 상태적인 하나됨이다. 신분적인 하나됨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의미한다. 상태적인 하나됨은 보이는 실제적 모습을 의미한다. 신분적 하나됨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됨이고, 상태적 하나됨은 우리가 이루어야할 하나됨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씀은 하나됨의 두 측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 이미 우리에게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힘써 지키라는 명령도 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 신분적인 하나됨이고, 그것을 힘써 지키라는 명령이 상태적인 하나됨이다. 이는 1절에서는 좀 더 포괄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명령으로 제시되어 잇다. 부르심을 받은 일이 신분이고,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상태다. 예수님은 굳이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셨다. 결과적으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신분적 하나됨 없이는 실제적 하나됨이 존재할 수 없다. 실제적 하나됨 없이 신분적 하나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먼저 예수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상태적 하나됨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안의 ‘하나님의 하나됨’을 그 본으로 제시하셨다.
요 17:21–23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22…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의 하나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존재적인 측면에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여기서는 사랑의 관계적 측면에서의 하나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다(마 3:17).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다고 증언하셨다(요 17:24). 하나님은 아들을 위해 창세 전부터 교회를 생각하시고 교회를 아들에게 주셨다. 아들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실 것이다(빌 2:9-11).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신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말씀하셨다(요 5:19, 30; 8:28; 12:49 등). 십자가를 앞두고 괴로움에 기도하실 때도 결국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 26:39). 모든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신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하나됨이다. 두 분은 다르시다. 하지만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일하신다. 두 분은 분명한 역할의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아들이다. 하지만, 두 분은 사랑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신다. 상대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먼저 자신이 해야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 결국 다르지만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교회의 하나됨의 모습도 이러하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획일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생각하고 동일하게 움직여야, 그것이 교회의 하나됨은 아니다. 하나됨은 다양성을 제거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사랑으로 한 마음으로 한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건물로 예를 들 수도 있다. 우리가 건물의 벽을 구성하는 돌이라면,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벽돌들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찾아온 야생의 돌들과 같다. 각자의 모양이 다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모두 같은 모양으로 만드셔서 벽을 세우지 않으신다. 우리 모양에 맞는 위치에 우리를 두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깎여야할 부분들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됨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획일화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됨을 위해서 내가 버려야할 것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두가 사랑으로 기꺼이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교회의 하나됨이다.
이런 하나됨에는 신분적인 하나됨이 전제되어 있다. 신분적 하나됨 없이 이런 상태적 하나됨은 불가능하다.
신분적인 하나됨과 관련해서는 앞서 말한 부르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았다. 각 사람의 구체적인 간증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핵심 이야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간증이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구원 받기 전에 허물과 죄로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 구원 받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죽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 혹은 이 모든 것의 주어가 “그”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가 동일하게 이렇게 간증한다. 하나님께서 죄 중에서 나를 건지셨다고 간증하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모습에 대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묘사한다.
엡 2:2–3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렇게 살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세상 속에서도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칭찬 받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은 무난한 죄인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삶이라해도 우리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믿는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교회 안에서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하여, 믿음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지조차 못한다 해도, 우리는 한 때 다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 어떻게 받았는가? 내가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다. 나에게 남보다 나은 무엇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엡 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구원에 이르는 과정도 구원 받기 전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내가 구원 받을 만해서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앞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절대로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악한 사람은 악해서, 선한 사람은 선해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선택의 교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사실은 인정한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모두 동일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격 없는 나를 구원하셨다고 간증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행하는 두 예식도 이 간증과 관련되어 있다. 만찬 예식에서 떡과 잔을 나누면서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을만큼 내가 큰 죄인임을 고백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 감사한다. 침례식도 그렇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침례식이다.
하지만 이 두 예식은 그런 개인적인 측면 이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는 한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나타낸다. 또한 침례를 통하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자들임도 나타낸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동호회, 클럽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교회도 어쩌면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공통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서 모인 곳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적으로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교회의 하나됨은 그런 ‘자연스러움’을 뛰어넘는 ‘초자연스러움’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만드신 하나됨이 있는 것이다. 교회는 모이고 싶어서 모이기도 하지만 모여야 하기 때문에 모이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되고 싶어서 노력하기도 하지만, 하나되어야 하기 때문에 노력하기도 해야한다.
세상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안에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솔직히 나 같은 사람이 나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교회 안에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하고 다른 사람들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나와 계속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하는 것은 힘들 수 밖에 없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사회에서 만났으면 절대 말도 섞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말도 섞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렇게 실제적으로 하나되기 어려울 때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신분적인 하나됨이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들을 십자가로 하나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게 하셨다. 그래서 한 사람이 되게 하셨고,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간증을 하는 자들이고 하나의 찬양을 드릴 자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됨, 신분적인 하나됨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이런 신분적인 하나됨을 실제 삶에서도 이룰 것을 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교회의 하나됨의 중요한 요소다. 신분적인 하나됨 없이는 상태적인 하나됨도 없다. 상태적인 하나됨이 어렵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분적인 하나됨이다. 나와 달라서 하나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그 성도는 나와 동일한 간증을 하는 사람이다. 나와 동일한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그렇게 하라고 내 옆에 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하나되기를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나를 위해, 그 사람을 위해 동일하게 기도하셨다. 나와 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기억하고 하나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기도의 목적: 증언
어쨌든 신분적으로 하나됐으면 된거지,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하나될 것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 이렇게까지 실제적으로 하나되는 것이 중요할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적을 통해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요 17:21, 23 …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결국 그렇게 할 때 세상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앞선 13장에서도 예수님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회의 하나됨이 곧 교회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데 있어 교회의 하나됨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더 큰 능력을 구하지 않으셨다. 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더해지기를 구하지 않으셨다. 교회가 더 재밌고 즐거운 곳이 되기를 위해 구하지도 않으셨다. 교회가 세상과 화목하게 지내기를 위해 구하지도 않으셨다. 그런 것들을 통해 교회의 사명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과 다름을 보여줄 때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다. 교회가 세상보다 낫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게될 때,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다.
교회에 PC방이 있고 노래방이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까? 교회 안에 흡연 부스가 마련되어 있고, 무료로 음료와 주류가 제공되면 사람들이 몰려올까? 교회에 멋진 음악이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까? 교회가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고 놀거리가 가득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가? 그렇지 않다. 세상이 하고 있는 것을 교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교회는 사명을 다할 수 없다. 교회가 세상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다. 교회가 세상보다 나은 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교회는 그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되었음을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하나됨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하나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이라는 영적인 실체는 삶의 변화로 증명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이처럼, 영적으로 하나된 자들은 당연히 실제적으로도 차이를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적인 실체의 존재 유무에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은, 존재의 의의에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하나됨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에 세상은 의문을 가질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도 다를 것이 없다면, 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느냐고 세상이 우리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교회의 신분적인 하나됨을 위하여 죽으셨고, 상태적인 하나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기도를 하고 계실 것이다. 이 기도만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예수님의 기도에 이 내용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분명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은 모두 하셨다. 신분적으로 하나되는 일은 모두 이루어졌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되는 일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할 때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다.
도전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예수님께 이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의 하나됨은 되면 좋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 중요성을 알아도 여전히 하나되는 것은 어렵다. 애초에 우리의 죄악된 성품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하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공식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 서로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되기 어려운 이유는 하나되기 어렵게 하는 그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어 그런 면도 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든 내가 맞춰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더 어려운 것이다. 이에 대해 A. W. 토저는 피아노 조율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100대의 피아노를 같은 음으로 조율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서로 서로 음을 맞추다 보면 계속해서 음이 맞지 않는 피아노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의 소리굽쇠에 음을 맞추면 100대의 피아노는 모두 같은 소리를 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 가장 힘써야할 것은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모니를 이룰 수 있다. 사람을 보고 있으면 하나되기 어렵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히기 쉽다. 우리가 함께 하나되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실제로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면, 예수님의 기도처럼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세상에 우리는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은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도 같은 기도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신다. 내가, 옆의 성도가, 우리 교회가 그런 그리스도의 기도임을 기억하고, 함께 하나됨을 힘써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