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전도의 중요성
본문: 마태복음 28장 18~20절
설교자: 조성훈
전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령의 열정이 구원받은 햇수가 많아질수록 식어지는 것 같습니다.
왜 전도가 중요할까요? 첫째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시키라는 명령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주어진 목적이, 여러분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쉽게 전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밤하늘에 오로라처럼 천둥번개를 치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쓰면 사람들이 많이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십니다. 믿는 자를 통해 구원하시고 자원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말했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는 것을 달려갈 길과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복음 전하는 것을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책망과 심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강권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신다, 돌보신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을 전하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바울은 그 사랑 때문에 복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주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배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꼭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그 때의 열정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참 불행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냥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끝나면 그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찾으려고 산과 들을 다니고 있습니다. 나무에 절하고 돌에 절하고 자신의 죄를 써서 불에 태우고 어떤 사람은 히말라야에서 옷을 벗고 물구나무를 서 있습니다. 더러운 물에 목욕을 하면서 죄를 씻으려 하고 쇠꼬챙이를 혀에 꽂아 물동이를 들고 가고, 삼보일배를 하며 죄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짐승 중에 이렇게 죄용서를 구하는 것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전할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뿐입니다. 그런 모든 고행으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 해결책을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알고 있습니다. 요양원에 가보면 많은 생각이 듭니다. 요양병원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도 나이들어 병들면 그곳에 있습니다. 70-80%이상이 코에 호스를 끼우고 있습니다. 코로 음식을 받아먹고 누워있는 환자들이 하와이 여행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인간의 비극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죽음 앞에선 비극입니다. 사실은 그 비극은 시작일 뿐입니다. 지옥에 가면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됩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고통 중에서, 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 땅에 살 때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싶다면 치과에 가서 마취하지 말고 생니 하나를 갈아내어 보십시오. 우리가 지옥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무섭고 비극적인 운명이 모든 사람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해결책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머니에 한 알만 먹으면 완전히 치료되는 약을 잔뜩 가지고 있는데 암 환자에게 가서 “어서 치료되기를 바랍니다.”하고 그냥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됐다고 말만 하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도살장을 향해 가는 돼지들에게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수많은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그들에게) 무엇을 알려줘야겠습니까?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면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어릴 때는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와 성관계를 가지면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몽둥이로 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법적인 어떤 하자도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유행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태를 보면서 주님 오심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되고 있는데, 또한 주님의 명령을 분명히 보고 있는데, 왜 우리는 잠잠하고 있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관심사가 모두 나 자신입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자식들을 고생 안 시키고 잘 먹고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사명과 주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입니다. 저 자신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많이 해이해져 있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습니까? 성경은 한 영혼이 온 세상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는 훗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세상에 두고 온 돈이 생각날까요? 한 영혼도 주님께 인도하지 못했다면 얼굴을 들고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전도에 힘쓰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영적 가치관이 많이 퇴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 이유는, 그동안 전도를 해봤는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의 멸망을 전할 때 많은 이들이 회개했던 것처럼 그렇게 회개가 일어난다면 우리도 신나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전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들이 우리의 전도를 좌절하게, 주저하게 만듭니다. 어떤 점에서 이제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만큼 들은 것입니다. 이제는 뿌릴 때가 아니라 추수할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책임이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의무는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구별되지 않기에 전도에 힘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자녀교육이나 생활방식이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생명의 빛을 보고 따라오게 마련인데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비추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유평마을에 사는 사람은 유평마을 사람들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산도 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이 선택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거듭나게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낭떠러지로 가는 사람들에게 그곳으로 가면 죽는다고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전하고, 또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를 다 안 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도 전하지 않고 삶으로도 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전하느냐 전하지 않는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사는 목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 목적에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마음 불편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아마 곧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복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죽기 전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이 지금 오신다면 모든 구원의 기회는 끝납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만병통치약은 예수님이 오심과 동시에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배가 침몰하고 우리가 그 안에 있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거절한다고 해도 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잔치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잃어버린 드라크마, 양 등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얼마나 한 영혼을 기뻐하시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점점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찾기 위해 산과 들을 다니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고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점심을 먹고 운동을 조금 하다보면 잊어버립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 섰을 때 틀림없이 복음 전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의 삶이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기회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이것은 명령이고 도리이고 상급과 관련된 일입니다. 주님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리고 삶으로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