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 생명을 지키는 줄, 기도
본문: 마태복음 7장 7~8절 외
설교자 : 이병권
우리 생명을 지키는 줄, 기도는 생명줄과 같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에서 기도를 생명줄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오늘 제목으로 인용해보았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참 중요한 주제입니다. 동시에 기도는 무거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생각하면 기도에 대해서 부족한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에 대해서 내가 바라는 모습이 있고 또 나의 실제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에서 오는 찔림과 죄책감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더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특별한 이유 없이 교회가 함께 하는 일에 계속 빠진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문제는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떨까요? 예외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도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과 나만 아는 부분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감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보다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기 쉬운 것이 기도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만큼 기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기도에 대해서 더 마음을 써야 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기도할게요.’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힘이 되는 참 좋은 말인데 ‘기도할게요.’라는 말이 단순히 인사치레로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만하고 실제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기도하기를 쉬고 있을까요? 생각보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습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다가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니까 기대한 만큼 실망합니다. ‘기도해봐야 똑같아!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불평이 나옵니다.
몸이 아플 때 낫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약을 먹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텐데 왜 기도하는 거지? 결혼을 위해 취업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나의 상황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기도해야 될까요? 우리가 접하는 안타까운 일들, 가슴 아픈 사고들, 기도하면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을까요? 아니라면 기도가 무슨 소용입니까?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경험은 기도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기도를 불신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노기대’, 기대하지 않습니다. 기대한 만큼 실망할까봐 마음을 비웁니다. ‘노수고’, 수고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문제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안중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삶에서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나의 태도라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기대하며 수고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들은 특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는 명령을 세 번 거듭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가장 많이 알려진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 외에도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명령이 다양하게 많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도들을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주께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서로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에 항상 힘쓰라”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명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에 기도가 왜 이렇게 많이 기록되어 있는 걸까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괜한 잔소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의 삶을 말할 때 자연스럽게 기도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우리 믿는 자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기도를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기도는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분에 따라 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누리며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안 됩니다. 기도 없이는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가지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 나타나는 여러 모습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이 전부라면 이상한 일입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의 특징은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주님의 허락하심과 주님의 다스림 안에 있음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믿는 자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내 삶이 주님의 것이고 내가 사는 이유가 주님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기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회사를 다녔을 때 월요일 아침이 되면 부서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실에 모여서 시간이 되면 회의를 하는데 한동안은 시작할 때마다 이상하고 어색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는데 기도 없이 뭔가를 시작하니까 그게 그렇게 어색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여기는 교회가 아니라 회사지!’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상황이 그러합니다. 기도가 어색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매순간마다 짧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드리고 도움을 구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는 중에 잠시라도 기도할 수 있고 식사하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루를 마치고 나서 혹은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가족들과 함께 성도들과 함께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같은 일을 해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고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기도할 때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나는 어떤 자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공로가 아닙니까? 주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하라는 명령은 은혜입니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둘째로 주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주님께서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
주님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늘 그렇게 해왔던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는 몸에 배어있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마다 기도하셨고 계속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큰일을 앞두고는 더 간절히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에 무엇을 하셨을까요?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을 보내시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께서는 정말 힘을 다해 애쓰며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처음과 끝에서 우리는 기도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삶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른 새벽에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본을 보여주셨고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늘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셨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던 주님께서 때마다 사람들을 피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고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가 기도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괜찮지 않은데 착각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도하지 않으면서 괜찮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누구도 기도 없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니까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못하지만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있으면 기도할 만큼의 시간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평생 그런 여유와 시간은 생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기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여유와 시간이 생긴다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변명과 핑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수고함으로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수고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주님께 질문한다면 주님은 어떤 대답을 주실까요? ‘주님, 어떻게 그렇게 기도하셨나요?’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실지 모릅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스마트폰이 없었잖아!’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내가 기도보다 다른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보다 더 좋아하는 것,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도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은 선택사항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위한 수고는 너무 크게 생각됩니다.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기가 싫은 겁니다.
하지만 나의 죄악 된 본성에게 속지 마십시오. 가만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는 주님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안에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더욱 크게 불러일으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저항하는 죄악 된 본성과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에 수고한다는 것은 그러한 치열한 싸움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기도를 위한 수고를 계속하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일입니다. 수고가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도하기 위해 시간과 힘을 쓰시고 수고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셋째로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이 말씀은 교회가 죄를 범한 형제를 치리하는 과정을 말씀하는 문맥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죄를 다루며 함께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때가 있을까요?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함께 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럼 이 약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해가 떴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가 모든 곳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어나 유리창 앞으로 가서 창을 통과해서 오는 햇빛을 맞으면 어떨까요? 햇빛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햇볕의 따뜻함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은 특별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고 기도할 때 우리는 보다 실제적으로 주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이 약속에는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응답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을 응답이라고 한다면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은 말뿐인 약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실망하고 기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기도해도 변화가 없으니까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대감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간절함이 없어집니다. 기도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기도의 능력을 기대하며 그 능력을 경험하기를 간구하기보다 그냥 삽니다. 그저 그런 삶, 영적으로 메마른 삶을 선택합니다. 영적인 생명이 주는 활력을 잃어버리고 힘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나에게 생명이 있음을 드러내고 살아있음을 나타내기보다 호흡기를 달고 누워있는 것처럼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정도로 살아갑니다. 기도하면서 생명줄을 붙들고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데 그냥 숨이 붙어있는 정도의 인생을 살면서 안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대하면서 기도하십니까? 그런 기대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노기대’입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할 때 쉬운 사랑이 있고 힘든 사랑이 있습니다. 쉬운 사랑은 말처럼 하기 쉬운 사랑입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 그냥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달래고 훈계하는 일은 힘이 드니까 아이를 그냥 방치하는 겁니다. 아이를 향한 미안한 마음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주면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많은 부모들이 이렇게 쉬운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녀에게 중요한 일, 자녀를 위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내 시간이 중요하고 내 취미가 중요하고 내 인생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어떻습니까? 힘이 듭니다. 돈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던져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서 아이에게 유익한 것을 주기 위해서 고민하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수고하며 자신을 희생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쉬운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진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몇 가지 들어주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계속 영적으로 자라가도록 우리를 사랑으로 양육하십니다. 단순히 “응답”이라는 선물이 아니라 “함께” 라는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 힘든 일일까요? 그냥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때로는 기도를 거절하시면서, 때로는 응답을 연기하시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어서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 모든 인생을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의 상황과 관계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죠지 뮬러가 있습니다. 그는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5만 번 기도했다는 말이 아니라 5만 번을 응답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번 기도응답을 받으면 137년이 걸립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근데, 우리가 뮬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일생 동안 뮬러는 사산된 아기 둘, 돌 지난 아들, 성인이 된 딸, 그리고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두 아내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뮬러가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느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어떤 응답의 약속보다 더 좋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기도한 대로 이루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기도를 통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이 정말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과 위로와 힘이기 때문입니다. 응답과 상관없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주신 응답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거라면, 어떤 응답을 받게 되든지 그 응답을 통해서 내가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이유로 충분한 것입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능동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대감을 가지십시오. 기도할 때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주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응답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나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 나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주님이라면 기도의 대한 우리 관점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기도에 대한 안 좋은 태도들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노기대’, ‘노수고’, ‘안중요’, 기도를 방해하는 3종 세트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기도는 믿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본을 좇아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고민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권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기적인 기도일까요? 아닙니다.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 되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삶에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고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기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기보다 먼저 나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나의 영성을 자라가고 나의 인격이 더 다듬어 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영적으로 자라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더 이타적인 일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해졌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상황들은 때로 절벽 앞에 있는 것처럼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것처럼 두렵고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절박한 상황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벼랑 끝에 있는 나의 인생을 번지점프로 만들 수 있습니다. 기도가 우리 생명을 지키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줄이 있기에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생명줄이 있는 자는 아무리 무서운 절벽이 있다하더라도 그 절벽을 번지점프로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기도로 주님을 신뢰하고 붙잡을 때,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매달릴 때, 벼랑 끝에서 느낄 수 있는 어려운 마음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인생의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줄이 있을 때, 기도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명줄을 놓지 마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