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왕이 어디 계시냐?
본문: 마태복음 2장 1절~12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최근에 별을 본 게 언제인지 생각나십니까? 요즘은 밤에 불빛이 많고 공기도 좋지 않아서 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보고 있을 여유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너무 추워서 바깥에서 하늘을 보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와 달리 옛날 사람들은 밤하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은 별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이 세상이 하나의 덩어리이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 땅에서도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나심을 멀리 이방 나라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별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방사람들은 우리가 동방박사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별을 보고 그 별의 의미를 파악하고 특별한 일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동방에서 온 그 박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박사들은 오늘로 말하면 천문학자와 점성가의 역할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사건들을 알아보고 그와 관련된 이 땅에서의 사건을 알아보고 의미를 찾는 자들입니다. 박사들은 높은 지위가 있었고 부유했기 때문에 먼 길을 여행하는데 비교적 수월했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멀리 이스라엘까지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경배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생각 할 때 빠질 수 없는 동방박사 이야기, 그러면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우리들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특별한 사건입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1)
여기 나오는 헤롯 왕은 다른 헤롯과 구분하기 위해서 헤롯대왕이라고 부르는 헤롯입니다. 이 헤롯은 유대인은 아니고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이었습니다. 이두메는 구약에서 에돔이라고 말하는 지역입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자였는데 로마군의 도움을 받아 반대 세력을 쫓아내고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했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각종 건축하는 일에 백성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한 10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은 물론 아내와 아내의 어머니까지 죽였던 잔인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포악한 헤롯이 왕으로 있을 때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마태는 “동방으로부터” 앞에 ‘보라’라는 말로 동방박사의 등장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지리적인 배경 속에서, 다시 말해 헤롯 왕 때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기 위해 동방박사가 등장합니다.
박사들이 어디서 왔는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나 바벨론, 아라비아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더 나아가 소아시아나 인도 혹은 그리스 등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냥 웃고 넘기는 이야기로 동방박사가 한국에서 왔다는 엉뚱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마도 애국심에서 나온 말인 거 같습니다.
박사들이 어디 출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천문학과 점성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박사라는 단어 자체도 페르시아에서 점성술과 꿈을 해석하는 제사장 계층의 사람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고, 바벨론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어쨌든 박사들은 본문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박사들이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여러분이 왕의 나심을 축하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를 방문한다면 어디를 먼저 가시겠습니까? 당연히 먼저 그 나라의 중심지를 갈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들도 먼저 예루살렘에 갔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을 찾기 위해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2) ‘왕이 어디 계시냐?’하고 묻는 것입니다.
‘왕이 어디 계시냐?’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특히 헤롯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동방박사가 한 질문을 생각해보면 이런 겁니다. 지금 왕이 있는 곳에 가서 왕에게 왕이 어디 있냐고 물은 것입니다. 헤롯 입장에서 내가 왕인데, 내가 왕으로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데, 이들은 내가 아닌 다른 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의 왕을 찾아서 그 왕을 경배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왕위를 병적으로 집착했던 헤롯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헤롯에게 커다란 충격과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방박사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어디 계시냐?’ 박사들은 왕의 나심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이 태어나셨는지 질문하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나심을 알고 그 왕이 어디 계시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나셨으니 이 사실을 유대인들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소동할 뿐이었습니다. 멀리 이방인이 이 사실을 알고 경배하러 온 것과는 달리 유대인의 왕을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역설입니다.
충격을 받은 헤롯은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4) 헤롯은 유대인의 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메시아, 이스라엘의 소망,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가 동방박사가 찾고 있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헤롯이 어떻게 합니까?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태어난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헤롯은 다음과 같이 합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7-8)
헤롯이 ‘가만히’박사들을 부릅니다. 어디서 봤었던 단어 같지 않습니까?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 ‘가만히’ 끊으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가만히’로 번역된 이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요셉이 했던 일과 지금 헤롯이 하고 있는 일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가만히 하는 일은 완전히 다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가만히 행동했지만, 헤롯은 아기의 생명을 빼앗고자 가만히 행동합니다. 두 사람이 가만히 했던 일은 정반대의 일로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헤롯은 정치적 술수와 음모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헤롯이 한 말입니다. 자신의 진짜 의도를 감추기 위한 헤롯의 거짓말입니다. 헤롯은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며 그럴듯한 포장으로 자신의 욕심과 악한 의도를 숨겼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말을 듣고서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 때 마침 그들 앞에 동방에서 봤던 별이 나타나 그들을 인도합니다. 9절 말씀에도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래 ‘보라’라는 말이 기록되어 별의 등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박사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별은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 그 위에 머물렀고 박사들은 기뻐합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아주 강조된 표현입니다. 여러 번역본에서 이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심히 크게, 무척이나 많이, 아주 크게 기뻐했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왜 이렇게 기뻐했을까요? 흔히 볼 수 없는 특별하고 신기한 별을 봐서 기뻤을까요? 그동안 많은 별을 관찰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감회가 새로웠을까요? 별이 너무 예뻐서 저렇게 아름다운 별을 보게 되다니! 감동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동방에서 봤던 그 별을 다시 보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을까요?
그들이 기뻤던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기뻤던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고대했던 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사들은 지금 그들이 그렇게 만나기 원했던 유대인의 왕을 만납니다.
왕을 만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만나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그분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충만하면 다른 모든 기쁨은 사소한 기쁨이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밝은 태양 앞에 다른 모든 별들이 빛을 잃는 것처럼, 가장 큰 기쁨으로 인해 다른 기쁨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1)
동방박사들이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이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마구간입니다. 분명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머물 여관이 없어서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서 아기 예수님이 집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을 명한 후, 인구 조사가 끝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요셉이 거처를 마련한 다음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과 비교했을 때 시간적으로 뒤에, 나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박사들은 집에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세 가지 예물을 드립니다.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에 박사들이 세 명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립니다. 유향은 나무에서 추출한 향기 나는 송진입니다. 의료와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몰약은 나무에서 추출한 향기로운 수액입니다. 기름과 섞어 향수로 만들었는데 장례를 위해 시신을 준비하는데 사용되었고 포도주와 섞어서 진정제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세 가지 예물을 두고 예수님의 성품이나 사역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각각의 예물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보다는 박사들이 귀한 예물을 준비해서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왕을 만나기 위해서 준비했고 합당한 태도로 왕에게 나와서 왕을 경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대조되는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헤롯과 동방박사 둘 모두 왕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목적은 완전히 다릅니다. 헤롯은 왕의 나심을 알고 왕을 죽이려하지만 동방박사는 왕을 경배합니다. 헤롯과 대조적으로 동방박사는 왕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왔고 귀한 것을 드려 왕을 경배합니다.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유대인의 왕’을 알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조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나심에서부터 시작되어 계속 이어집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거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거절하든지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히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헤롯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며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분을 경배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이렇게 반응이 극단적일까요? 우리가 좋아하는 중간은 없을까요? 왜냐하면 이것은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분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십니다(2). 그분은 옛적부터 말씀하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이십니다(4). 그분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신 다스리는 자, 통치자이십니다(6).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왕이십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조하는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왕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왕을 배척하느냐 두 가지 반응뿐입니다. 그리고 이 두 반응은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의 왕 되심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왕 되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받아들이고 왕으로 인정하며 그 왕을 경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는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왕 되심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내 삶의 중심을 그분께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왕이 되어 살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간섭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내 삶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좋게 받아들이고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나와 내 필요와 내 욕심과 내 뜻대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고 나에게 맞춰주길 바랍니다. 내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왕이 나타나면 그 왕은 나의 적이고 나는 그 왕과 싸웁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그런 우리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 생각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동방박사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어디 계시냐?’ 여러분의 왕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왕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예수님이 왕이시면, 나는 왕이 아닙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면, 나는 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실제로 왕이 누구인지를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내 삶에 왕이 예수님이 맞는가? 점검해보십시오. 왕의 자리는 하나뿐입니다. 둘 중 하나는 물러나야 합니다. 내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예수님은 실제로 나의 삶에서는 왕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 헤롯과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계속 왕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내 안에서 나를 움직입니다. 내가 왕이 되게 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그만큼 더 훈련과 기도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의지적으로 더욱더 힘써야 함을 알려줍니다. 나쁜 습관들을 끊으려면 더욱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이 아니라 왕을 섬기는 자로 사는 것은 정말 치열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내 마음이 전쟁터와 같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주님께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기 위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내가 가진 귀한 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높이는 일에 여러분의 마음을 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을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왕이신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경배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또 다시 그 힘으로 왕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의 매순간마다 내가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왕이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왕이 어디 계시냐?’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따라서 나는 왕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