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본문 : 마태복음 5장 1~12절
설교자 : 조성훈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무리를 보면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보통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복 받은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부모를 잘 만나 유산을 많이 상속받은 사람 등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자들에 대해 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가난이라는 말은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 영혼이 가난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이,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부자냐고 물어볼 때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교하는 대상이 더 잘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캄보디아나 미얀마에 가서 같은 질문을 한다면 부자라고 할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부자인 것입니다. 의인이냐는 질문도 역시 그러합니다. 살다가 몹쓸 병에 걸리면 ‘왜 하필 나인가’라고 말합니다. 나보다 악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왜 걸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보다 훨씬 악한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등 세리와 같지 않음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과 자신을 비교할 때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설교가 끝난 뒤에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드러난 사람은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알기에 결코 자신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진정한 상태를 아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 복음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기에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비췰 때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죄인임을 인식시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인터넷에 동영상을 보니 누군가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이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거짓말을 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하면서도 죄인이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보다 악한 사람과 비교하기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신을 비출 때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나 믿는 분이나 자신의 영혼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나가서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게 될 때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탄식하고 애통하고 통곡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일이 잘못되어서 돈이 없어서 애통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진정한 영적인 상태를 알게 될 때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소욕과 육체의 소욕으로 고통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두 가지 소욕이 싸우므로 괴로울 수밖에,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영혼이 탄식 속에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육체의 소욕이 여러분을 잡아끕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방황했었지,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너무 많이 봤어, 이제는 말씀을 많이 봐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서 집에 가면 조금씩 괴로워집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원수를 사랑할 필요도, 다른 성도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밝아지면 더욱 작은 것에도 애통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 삶이 말씀에서 멀어지고 내 삶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주장해도 우리 안에 갈등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통의 외침을 기억해보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왜 내게는 그런 탄식이 없을까요?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앞에서 많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100만원을 주웠다면 돌려주기 아깝지 않을까요? 큰돈을 주웠을 때 주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양심은 무뎌질 대로 무뎌진 것입니다. 돈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돈이 떨어져 있으면 발로 밟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습니까? 그들 속에 양심이 찔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서 그런 행동도 못하고 법도 지켜야 하고 얼마나 힘듭니까?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말씀을 떠나도 떠난 괴로움을 모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면 살아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죄 많은 세상을 보면서 아브라함처럼 마음이 괴롭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열정과 갈급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영혼은 선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원하는 만큼 방해받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에서 새로운 몸을 입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짐 진 것처럼 탄식하면서 새로운 몸을 입기를 원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방해하는 것 없이 원하는 대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에 굶주리고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의 증거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자신을 올바로 바라볼 때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 보게 될 때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물질이 많다고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복 있다고 하신 자들이 복 있는 자이고 불쌍한 자라고 한 자가 불쌍한 자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왜 영적인 것에 무뎌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인 싸움입니다. 성경은 낙심하지 말고 이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말세를 살아가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많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영적으로 불쌍한 상태에 있고 육체의 소욕에 머물러 있고 영적으로 얼마나 미지근해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이정도면 됐지’라는 자만에 빠져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집에 가서 조용히 주님께 아뢰십시오. ‘제가 지금 영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보게 해주세요. 주를 향하여 마음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잠들어 있는 영혼의 상태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이 임박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가 생각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