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

본문: 마태복음 15장 21-28절

설교자: 최종혁

 

성경은 의심의 여지없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말한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셨고, 사람은 그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지만, 오직 성경은 그것이 절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직 믿는 자가 그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도울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를 돕는다.

그런데 이런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아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때로는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영접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진심으로 했으면 그것이 믿음이고 구원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딱히 거부하거나 하지 않으면 그게 믿음이라고도 생각한다.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믿음과 어느정도 관계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쉬운믿음주의’는 안타깝게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심각하게 왜곡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만 양산해내고 있다. 머리만 구원 받은 사람, 입만 구원 받은 사람, 손만 구원 받은 사람을 만들어 낸다. 감정만 구원 받은 사람도 있고 의지만 구원 받은 사람도 있다. 가만히 있다보니 남들이 구원 받았다고 인정해 줘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씨가 떨어진 경우에 해당된다.

13:20–22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돌밭이든 가시떨기든 공통점은 처음에는 뭔가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반응이 빠르기도 하다. 하지만 ‘처음에’만 그렇다. 그 반응이 지속되지 못한다. 환난이나 박해나 유혹이 있을 때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결실하는 데까지, 즉 구원에까지 이르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믿음처럼 보인다고 믿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참된 믿음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쉬운 믿음, 얕은 믿음, 피상적인 믿음을 그냥 ‘믿음’이라고 말하는 잘못된 관용에 빠져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9:57–62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들을 쳐내셨다.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걸러내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신 것 뿐이다. 어쨌든 예수님을 따르면 좋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여 제자인 줄 착각하는 사람만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기를 원하셨다.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렇게 하려다가 넘어지고 실패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 삼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믿음은 모두 참된 믿음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참된 믿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주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다르다. 이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주석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하거나 혹은 반대로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님도 보냄을 받은 사명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변명하시듯 말씀하셨다고 예수님을 변호하는 쪽도 있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여기서 죄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우리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차갑고 냉정하다. 가혹해 보이기까지 한다. 민족차별주의자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시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여자를 “개”에 비유하여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사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거친 말을 쏟아내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눈 먼 인도자”라고 하셨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며 저주의 말씀을 하기도 하셨다(마 23:33).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면서 그들을 다 쫓아내셨던 적도 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상황은 다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에 대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얼마전 살펴봤었던 율법교사처럼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도 전혀 없었다. 단지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러 예수님을 찾아왔을 뿐이다. 심지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딸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항상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특히나 죄 없으신 예수님이시라면 더욱 그렇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은 마지막에 나온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드러내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앞에 몇 가지 장애물을 두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도 구원 받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그 특징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본문은 예수님을 찾아왔던 가나안 여자가 구원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여자가 보여준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분명한 예시다.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먼저 이 상황의 배경을 살펴보자.

배경(21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거기”는 갈릴리 지역을 말한다. 예수님은 주 사역지였던 갈릴리를 떠나 이방인 도시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가는 예수님이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하셨다고 기록했다(막 7:24). 한마디로 숨어서 쉬려고 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것이다.

앞의 상황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반응들이 이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 받으셨다(마 13:53-58). 세례 요한을 참수 했던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생각하며 당황했다(마 14:1-12). 헤롯이 예수님을 요한처럼 대우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빈 들로 가셨는데, 큰 무리가 따라 왔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남자만 5천명이 배불리 먹었던 이 이적으로 인해서(마 14:13-21),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셨었다(요 6:15).

후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는 전통을 범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예수님을 대적했고(마 15:1-2),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고 맞받아치셨다(마 15:3-11). 이 일로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적대심은 더욱 커졌다(마 15:12).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잠시 그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자리를 피하셨다고 볼 수 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때가 되면(마 16:21),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실 것이다. 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서 피하기 위해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다. 물론 사마리아 여자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그 지역을 통과하여 가셨던 것처럼 여기서도 가나안 여자을 만나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원(22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마가는 이 여자를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했다(막 7:26). 마가의 소개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헬라인)이었다.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와 베니게 지역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두로와 시돈이 이 지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마가의 소개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마태는 이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 사람을 “조선인”이라고 소개하는 것과 같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살고 있었던 민족으로서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민족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셨고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명령하셨다(신 7:2).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조금도 이 땅에 남겨두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그 가나안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태는 지금 예수님께 나온 여자가 바로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 여자는 “그 지경”, 즉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구약의 이사야 23장과 에스겔 26-28장은 이 두 도시, 특히 두로에 대한 심판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게 화를 선포하시면서 예수님은 비교 대상으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을 언급하셨었다(마 11:20-24). 그만큼 두로와 시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의 대표적인 도시였던 것이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이 여자는 그 배경만 봤을 때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구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자도 자신의 그런 배경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22 …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가복음 3:7-8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 갈릴리에서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이 여자도 그 중 하나였을 수 있고, 아니면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가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여자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단지 어떤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것이다. “주”는 상황에 따라서 단지 공손한 예의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다윗의 자손”과 함께 이 여자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서 인지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니까 단순히 따라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유대인도 아니었다. 예수님에 대한 이 호칭은 믿음의 고백이었다. 이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가나안 여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봤고 그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25절을 보면 예수님께 절하며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예배의 모습인 것이다.

이 여자가 예수님께 나온 이유는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은 자신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도와달라는 요청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은 이런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이런 약속을 주셨으니 저에게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있을텐데, 자신은 두로와 시돈 지경에 사는 가나안인으로서 그렇게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예수님이 자신을 도와주어야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분의 자비를, 그분의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한 이유는 자기 딸 때문이었다.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부모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이다. 이 여자는 자기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다. 딸의 필요가 곧 자기의 필요였던 것이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렇게 불쌍하고, 이렇게 진실된 마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은 “내 딸아”라고 부르시면서 그의 애원을 들어주실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냉담(23-24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가나안 여자의 애끓는 외침에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사람이 많아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모두 듣고 있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여자의 외침은 너무 시끄럽고 방해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냥 저 여자가 해달라는대로 해주시고 보내달라고 요청을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무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 대답도 가나안 여자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물론 정황상 제자들 뿐 아니라 가나안 여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도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예수님은 여전히 가나안 여자의 외침은 무시한 채 제자들에게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차라리 여자의 요청을 들어주고 저 여자를 여기서 떠나게 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우선 순위를 밝히는 것으로 답하셨다.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지 이방인을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시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훈련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도 같은 지침을 주셨었다.

10:5–7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는 어떤 사역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님은 비슷한 상황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적이 있다(마 8:5-13). 그 때 예수님은 백부장의 요청에 바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답하셨었다(마 8:3).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도 고쳐주셨었다(마 8:28-34).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던 10명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눅 17:11-19).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은 유대인부터 시작되어 온 민족에게 이르게 된다. 큰 방향성과 우선 순위에 있어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배타적으로 진행될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에게 복음이 선포될 때,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혼란스러웠을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 싶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그 여자를 그냥 쫓아보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해야하는거지하고 제자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 그리고 여자와 예수님 사이의 짧은 논쟁이 진행된다.

논쟁(25-27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생각해 보면 절망스러운 상황이고 한편으로는 기분 나쁠만한 상황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중에 염치없음을 무릎쓰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소리를 무시하셨다. 제자들이 좀 도와주고 보내는게 어떻냐고 제안을 했지만 그조차도 예수님은 단칼에 거절하셨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오히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왔다. 그리고 자신을 더 낮추었다. 애초에 자신이 예수님께 긍휼을 얻을 어떤 자격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짧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예수님께 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충격적인 대답을 하신다.

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4절의 말씀에 따라 여기서 자녀와 개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자녀는 이스라엘이고 개는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예수님인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와서 긍휼을 구하던 이 여자를 “개”에 비유하신 것이다.

성경에 언급되는 개는 주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야생개로서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주워먹는 개다. 더럽고 불결해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개들이다. 다른 하나는 집에서 키우는 개로 오늘날의 애완견 개념의 개가 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개는 후자에 해당되는 개로서 어떤 번역본은 “강아지”로 조금 순화하기도 했다.

즉 예수님은 이 표현을 통해 여자를 경멸할 의도는 없으셨다. 다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사실을 강하게 표현하셨을 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강아지가 있어도 개는 개다. 물론 요즘은 이 단순한 사실도 설득해야 하는 시대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의 생명과 개의 생명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상식을 통해 24절의 말씀을 다시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닌 이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듣고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듣고’가 아니라 ‘기분이 나빠서’ 자리를 떠날 것이다. 비유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을 “개”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 좋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기분만 상하고 떠나는 사람도 양반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 나를 “개”라고 한 것이냐면서 사과하라고 소리치고 분노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말을 들어보라.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전히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을 “개”라고 표현한다.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예수님께 긍휼을 받을 만한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왔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왔던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녀를 도우실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였다. 어떤 따뜻한 위로의 말을 기대한 것이 아니다. 어떤 대단한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한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모든 대화를 끝내셔도 어쩔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 어떤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어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번영신학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번영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자격,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시고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지 말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쩌면 더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성경적인 접근은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격이 있기 때문에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은 은혜가 아니라 댓가다. 급여를 받으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내가 수고한 댓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런 댓가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기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한다. 자신이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함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긍휼은 오직 예수님이 주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다. 자격이 있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떡이 아니라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자신은 충분하다며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겸손히 구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어떻게 하실까?

결론(28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더 이상 논쟁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항상 마지막 말씀을 하셨고 놀라운 지혜로 그들의 입을 막으셨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예수님은 이기려고 논쟁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낮아지고 겸손하고 상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던 이방인 여자를 통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더 이상의 논쟁을 멈추시고 이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께서 “크다”고 칭찬하신 것은 이 여자의 “믿음”이었다. 이보다 더 지혜롭게 답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지혜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칭찬하지는 않으셨다. 포기하지 않은 끈질김에 대해서도 칭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않은 침착함도 칭찬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보여왔던 겸손함도 칭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 믿음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아는 믿음이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 믿음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있어도 그 장애물을 넘어 계속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그 믿음에 예수님은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여자가 원했던대로, 그 때로 그의 딸이 나았다. 믿음의 놀라운 역사다.

도전

믿음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나에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 가나안 여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긍휼을 베푸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긍휼을 구하는 자가 누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첫째로 나에게 그런 하나님의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아는 것이고, 둘째로 오직 하나님이 그런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선하신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장애물이 있을 수도 있고 유혹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가나안 여자는 자기 자존심 같은 것 생각하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긍휼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니까 내가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매달려야하는 사람은 나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의 가나안 여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2:11–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이 선물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