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인과 예배
본문 : 요한복음 4장 19~26절
설교자 : 조성훈
저는 목회를 하면서 대부분 주일마다 앞에 앉았습니다. 지난주에는 뒤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이 예배드리는 자세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목적은 예배드리기 위해서이고,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이며,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도 점심 먹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대화를 나누십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장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 묻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과의 동행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오산 시내에 나가 모르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려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 무례한 행동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주님을 만난 자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이론적으로 알았을지 모르지만 점점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속에서 주님에 대한 경배와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형식이고 외식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예루살렘 성전외의 장소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 시대가 끝나고 나라가 나뉘면서 사마리아에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닌, 장소와 상관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든, 언제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주일을 정해서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두 번째로 예배의 대상이 나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알지 못하는 신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참다운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복을 받은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십니까? 오늘 아침에 이곳에 주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곳에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찬송, 감사, 경배 등 여러 예배가 있는데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감동되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이 더욱 실망스럽습니까, 아니면 더욱 감격스럽습니까? 주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셔서가 아니라 그분 자체가 감격스럽고, 또 받은 은혜가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해주었든지, 해주지 않았든지 자식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고 젖 먹여 키우며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키운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재산을 안 주면 맞아 죽고 재산을 주면 굶어죽는다는 세상입니다. 부모가 어떻든 나를 낳아서 키운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맞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환경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주님 앞에 나오면 무조건 감사와 찬송이 넘쳐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옮겨주셨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습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 때 우리는 그 분 앞에 경배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대접을 받아도 되는 그런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해 그분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 우리에게 해주실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예배의 자세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한편으로 감사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습니다. 어떤 자매에게 선 자리를 주선했는데 소개한 형제가 헌 작업복을 입고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한 자매는 선보러 갔는데 상대방이 이야기는 안 하고 핸드폰 들고 문자만 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평상시 삶과 언어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 배어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한다면 부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존경함이 언어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왔을 때는 모든 것에서, 말과 행동에서 의복에서 하나님을 향한 존경하는 마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항상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를 만나러 갈 때와 선을 보러 나갈 때의 의복은 다릅니다. 시장 갈 때와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언행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너무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주일만이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뒤에 앉아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예배를 본다면 어떨까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핸드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거의 백퍼센트 그 자녀들이 이슬람교도가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정생활에서,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보이지 않으면 자녀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키운다고 할 때 여러분의 자녀들이 대학을 나온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첫째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면 자녀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어느 대학에 나와서 어떤 사람이 되었어도 하나님이 마음에 있지 않으면 그 자녀는 실패한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가 음부가운데 말하기를 ‘제발 우리 가족만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간 뒤에 자녀들이 지옥에 가 있다면 어떨까요? 서울대에 갔으니 괜찮다고 하시겠습니까?
직장과 가정에서 여러분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없기에 전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율법대로 그들의 신을 섬기는데 참 대단합니다. 삶 자체가 신앙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배의 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가 매주 예배드리기에는 조금 모자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님과의 동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면 예배와 감사가 끊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말씀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전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누가 전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설교자의 말씀에 대해 판단하십니까? 긴 설교가 지루하십니까?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에 대한 자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시는 분은 예배 전에는 꼭 화장실에 다녀오게 해주십시오. 굳이 예배나 말씀시간에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장 존경받아야 할 분이 아닙니까? 우리의 모든 언행을 통해 존경심을 표해야할 분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배나 말씀시간에 그분에 대한 경외의 모습이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는 모습이 보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위해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여러분을 부르신 그분에 대한 경외심이 삶속의 언행에서, 찬양을 부를 때,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오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자들이기에, 그분이 놀라우신 분이기에, 그분에게 매료되어 그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진정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라기를 보면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되었습니다. 장소는 맞았지만 제사 드리는 자의 자세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번폐스럽다, 안식일마다 제물을 드리기가 힘들다, 예배드리기가 힘들다 했습니다. 또한 제물이 부패했습니다. 하나님께 병든 것, 저는 것 등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적게 벌어 와서 헌금 드릴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외식 가서는 몇 십만 원 씩 쓴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에 대한 물질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니 예배가 부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부패했다면 여러분의 자세도 부패하고 모든 것이 부패한 것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종교생활에 빠진 것입니다. 주일에 빠지면 마음이 찜찜하고 벼락 맞을 것 같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우리의 예배, 우리가 나누는 교제, 우리가 드리는 물질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시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배 장소는 어디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리고 어디서든 예배드릴 수 있지만, 24시간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마땅하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의 예배는 마음속에서 나오는 진정한 예배, 그리고 미리 준비된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의복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가 의복과 언어생활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가르치십시오. 절대로 이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 듣는 자세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2:6)” 자녀로 인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 때나 말씀을 들을 때 그분에 대한 경외심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